고조선 이전 우리나라의 이름은 한(韓)이었다.
우리가 한민족이고 우리나라의 국호가 대한민국인 것은 바로 이 한에서 유래한다.
조선이라는 이름이 기록상에 처음 등장하는 건 기원전 3세기 무렵.
하지만 이 한이라는 국호는 기원전 9세기 무렵의 유력한 기록에 나온다.
그런데도 우리는 일본인들이 그어놓은 금을 한 발짝도 넘어가지 못한 채 우리 고대국가는 고조선이라고만 알고 있다.
대한민국의 한이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면 삼한이라고 대답하는 게 고작이다. 그러나 이 삼한이 어디서 왔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나는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의 국호인 한이 어디서 왔을까 하는 의문에 사로잡혀 한이라는 글자를 담고 있는 이 세상의 갖가지 오래된 기록들을 찾아헤매 왔다.
지구상의 온갖 서책을 다 뒤진다는 각오로 고군분투하던 내게 윤내현 교수의 중국 문헌에 대한 조언은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추적의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기원전 7세기 무렵 편찬된 사서삼경 중의 한 권에서 나는 우리의 조상 한후(韓侯)라는 왕을 찾아낼 수 있었고, 후한의 대학자 왕부가 이 한후를 분명 우리의 조상이라고 확인한 저작과도 만날 수 있었다.
뻥 뚫린 상태로 있던 우리의 고대사에 고조선보다 훨씬 이전에 존재한 나라의 확고부동한 실체가 등장한 것이다.
나는 이 엄청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누구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확고한 자료를 근거로 이 책을 써냈다.
특히 나의 서지학적 추적과 별개로 천문학자 박창범 교수의 실험을 소개했다.
그는 <단군세기>에 기록된 기원전 18세기의 행성집결 현상을 과학으로 재현함으로써 한민족의 독자적 기록이라면 무조건 부정되거나 위서(僞書)로 밀어붙여져 온 풍토에 큰 충격을 주었다.
지식과 과학기술의 급격한 발달에 따라 모든 학문의 영역에서 한 해가 다르게 새로운 방법론과 해석이 나오고 있지만, 우리 고대사만은 글자 하나 바뀌지 않은 채 60년 전의 기술이 그대로 교과서에 실려 있다.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이 일렬로 늘어서고 남해안의 조수가 먼바다까지 밀려난 걸 이미 기원전 18세기에 기록했던 확고한 문명국이 한낱 웅녀니 단군 할아버지니 하는 아이들 이야기 수준으로 버려져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이 우리의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는 데 이바지하기를 바란다.
권동현 이용흠 김영일 한명선
이들과 출간의 기쁨을 함께 나눈다.
또한 홀로 내면의 길을 걷는 명덕에게 용기를 주고 싶다.
제천 용두산 기슭에서
김진명
점심시간을 갓 넘긴 종로경찰서 형사계의 졸리던 분위기는 한 통의 전화벨 소리에 깨어났다.
「여기 명륜지구대 박 순경인데, 죽은 사람이 있습니다.」
「죽은 사람? 어디요?」
죽은 사람이라는 말에 형사들의 눈초리가 일제히 전화기로 쏠렸다.
「명륜동입니다.」
「아니, 명륜동을 묻는 게 아니라 죽은 장소가 어디냔 말이오?」
「집입니다. 개인주택입니다.」
「어떻게 죽었는데?」
「목을 맸습니다.」
「목을 맸다? 그럼 자살이라는 얘긴가. 왜 죽었다는 거요? 주변에 누구 없어요? 가족이라든지.」
「가족은 없이 혼자 사는 여자라고 합니다. 여교수라는데 파출부가 이틀에 한 번씩 와서 허드렛일을 도와주는 외에는 찾아오는 사람도 거의 없이 혼자 조용히 지내는 사람인 모양입니다. 파출부가 좀 전에 와서 발견하고 신고를 했는데, 그저께 와서 보았을 때는 기분이 괜찮아 보였다고 합니다.」
「그저께 기분으로 보아 오늘 자살할 이유가 없었다고 할 수는 없어. 어떤 사람들은 죽기 오 분 전까지도 깔깔거리다 갑자기 목을 매요. 그런데 대학교수라 그랬어요? 그거 참. 교수가 목을 매다니. 현장 상태는 어때요? 심하게 어질어져 있다든지 뭐가 깨진 게 있다든지 하지 않아요?」
「목맨 현장인 서재는 아주 잘 정돈이 되어 있고 외부에서 사람이 침입했다거나 한 흔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시체가 아주 이상하게 목을 매고 죽었습니다.」
「어떻게 이상하다는 얘기요?」
「목을 천장에 맨 게 아니고 책에 매고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서서 죽은 게 아니라 앉아서 죽었다는 얘깁니다. 저는 이런 모양은 처음 봅니다.」
「목을 어디에 매고 죽었다고?」
「빨간 비닐 노끈을 엮어 목에 걸고는 그 끝을 책장에 꽂혀 있는 책에 칭칭 감고 죽었습니다.」
「그러면 책이 쏟아지지 않나? 아무리 무거운 책이라 하더라도 몸무게를 버틸 수가 있나?」
「사서삼경 전집류인데 책이 커 책장의 네모난 칸 안에 꽉 들어차 있기 때문에 묘하게도 앞으로 쏟아지지 않고 힘을 충실히 받게 되어 있습니다.」
「사서삼경 뭐? 근데 앉아서 목을 매고 죽었다고? 그게 가능한 얘기야? 앉아서 목을 매고 죽어? 하여튼 알았어요. 사람이 나갈 거예요.」
보고를 받은 경찰대학 출신의 목 반장은 자신이 직접 나가보기로 했다.
현장에 도착하자 젊은 반장은 순경과 파출부의 증언을 듣고 서재로 들어가 시체의 차림새와 장신구는 물론 얼굴에 남아 있는 화장기까지 세심하게 살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이 살아온 내력은 말할 것도 없고 현재의 형편, 성격, 나아가서는 사건 발생의 원인까지도 말하는 법이다.
공교롭게도 <논어> <맹자> 등 사서삼경에 매달려 죽어 있는 시체는 아주 평온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목 반장은 연신 몸을 폈다 구부렸다 하며 죽어 있는 여자의 전신을 세심하게 살폈다. 삼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혀를 약간 빼물고 있어 자살한 여느 시체와 다를 바가 없었다.
「온도를 재봐요.」
「네.」
옆에 대기하고 있던 형사가 주머니에서 체온계를 꺼내 시신의 체온을 쟀다.
「30.5도입니다. 죽은 지 약 6시간 됐다는 얘깁니다.」
「6시간이라······.」
반장은 6시간이란 수치를 머릿속에 집어넣으며 이번에는 눈에 들어온 끈을 유심히 살폈다. 여러 겹으로 엮인 빨간 비닐 끈은 단단한 올가미가 되어 책과 목 사이에 걸려 있었다.
다른 형사들도 올가미를 유심히 살폈다. 빨간 비닐 노끈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것이었다. 줄의 잘린 단면이 전혀 흩어져 있지 않고 깨끗한 걸로 봐서 목을 걸 용도로 새로 자른 것임에 분명했다.
「누구 집 안에 이 줄 뭉텅이 같은 게 있는지 찾아봐요.」
목 반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배 형사가 기다렸다는 듯 싱크대의 서랍에서 찾아낸 노끈 동태를 내밀었다. 10년 이상의 강력반 근무로 이미 현장 포인트를 훤히 머리에 넣고 있는 그는 시체를 보자마자 끈 뭉치부터 찾아낸 것이다. 반장은 노끈을 대조했다.
「여기서 잘라냈군.」
동태에 감긴 노끈 끄트머리의 비스듬하게 잘린 자국은 시체의 목을 조인 끈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이것은 타살이든 자살이든 간에 이 집에 있던 끈이 사용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사망 사건에서 죽음의 도구를 찾아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목 반장은 일단 집 안에 있는 노끈이 사용된 것을 보고 이 사건은 자살일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자가 앉아 있는 모양이 아무래도 자살의 자세로서는 마땅하지 않다는 생각에 목 반장의 미간은 절로 찌푸려졌다. 실제의 자세도 자세지만 이런 모양으로 죽을 수 있다고 사전에 생각한 점도 너무 이상했다.
「배 형, 이 여자는 이 자세로 자살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했을까요? 자살이라면 숨이 넘어가는 그 순간까지 죽겠다는 의지를 관철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 자세로 그게 가능할까요?」
배 형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 마지막 순간 본능을 뿌리치고 자신의 의지만으로 자살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목 반장은 다시 앉아 목에 난 끈 자국을 세심히 살폈다.
뒷덜미는 손으로 눌린 자국도, 끈의 매듭 자국도 없이 깨끗했다. 끈은 턱밑 깊숙이 자국을 내고 목 옆으로는 얕은 흔적만을 남기다 목덜미 부근에선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배 형사는 끈 자국을 유심히 살피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앞에서 당기든 뒤에서 당기든 끈을 사용한 이상 타살이라면 목에 긁힌 흔적이 남아야 하잖아.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건 틀림없는 자살인데······.」
아닌 게 아니라 시신의 목은 마치 갓 목욕을 마치고 나온 것처럼 희고 깨끗해 죽음과는 너무 어울리지 않았다. 배 형사는 어느 정도 강직이 진행된 시체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리곤 준비한 확대경을 목에 댔다. 손톱자국도 멍도 없는 목은 빨간 비닐 끈 자국만 일직선으로 남겨져 있을 뿐 깨끗했다.
그는 다시 방바닥에 엎드려 확대경을 얼굴 가까이 댄 채 티끌 하나 놓치지 않고 바닥을 훑기도 하고 일어서서 거듭 책장의 높이와 줄의 길이를 재보기도 하는 등 여자의 죽음을 판정할 수 있는 단서를 최대한 찾아내려 했다. 하지만 배 형사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살과 타살의 판정을 내리기 힘들었다. 시체의 괴상한 자세와 깨끗한 목덜미는 그 모든 것을 미궁 속으로 몰아넣었다. 밖에서 사람이 침입한 흔적도 없고 저항한 흔적도 없는데다 주변이 아주 깨끗한 걸로 보아서는 분명 자살이지만, 사람이 이런 모양으로 목을 매고 죽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한참 동안이나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던 배 형사는 이윽고 머리를 세차게 흔들더니 결단을 내린 듯 굵은 목소리를 밀어냈다.
「다른 건 차차 생각해봐야 알겠지만 일단 스스로 목을 맨 건 틀림없습니다. 손이나 목이나 저항한 흔적이 전혀 없으니 말입니다. 남에게 목을 졸려 죽은 시체가 이렇게 깨끗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그런데······.」
목 반장은 고개를 저으며 일어나 거실로 나가 앉았다. 배 형사는 경험도 없는 반장이 자신의 의견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는지 입 모양을 잔뜩 비튼 채 반장을 따라 나가 소파에 걸터앉더니 다시 단호하게 내뱉었다.
「반장님, 이건 자살로 밀어야 합니다.」
다른 형사들 역시 자살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눈치였다.
목 반장은 질문을 던졌다.
「누군가의 가격에 의해 의식을 잃은 상태로 끈에 매달리게 된 경우도 있지 않을까요?」
「저도 그런 생각을 하고 철저히 살펴본 결과 여자가 가격당한 흔적은 전혀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아주 약한 자극도 시신에서는 바로 시반으로 나타납니다. 여자는 오로지 기도가 막혀 죽었는데 목덜미에는 매듭의 흔적이 없고 턱밑에만 끈에 팬 선명하고 단일한 흔적이 있습니다. 약간 특이한 경우이긴 하지만 타살은 절대 아닙니다. 절대로요.」
배 형사는 단호했다. 하지만 젊은 반장은 쉽사리 자살 판정을 내리진 않았다.
「일단 시체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아 부검을 합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자세는 의문의 여지가 있어. 부검 결과가 나오면 다시 생각해보자고. 그동안 강 형사와 김 형사는 주변을 탐문해봐요. 가족에게도 연락하고. 당분간 현장은 봉쇄해요.」
「네.」
형사들은 마뜩치 않았지만 상관의 말을 듣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부검의가 보내온 소견은 경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였다. 여자는 호흡단절이란 단 한 가지 이유로 숨을 거두었고 그 이외의 어떤 의심 가는 흔적도 없었다. 따라서 부검의는 분명하게 자살이란 견해를 부검서의 소견란에 적어 보내왔다. 형사과장은 현장에 나갔던 목 반장을 비롯해 각 반의 반장들을 불러 회의를 열었다.
최고참 반장이 보고를 겸한 결론을 내렸다.
「과장님, 부검 결과 시신의 내외부에는 목을 압박한 끈 외에는 어떤 흔적도 없습니다. 내부 출혈은 말할 것도 없고 울혈도 피멍도 긁힌 자국도 없습니다. 독극물 또한 검출되지 않았습니다. 대학교수라 부검에는 검사도 입회했다고 합니다. 틀림없는 자살입니다.」
「어때, 목 반장? 자살로 종결지어?」
과장은 부검소견서를 손에 들고 목 반장에게 물었다. 부검에 검사가 입회한 이상 목 반장은 물러서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다.
「알았어요.」
목 반장은 맥이 빠진 채 형사들로부터 보고도 받고 지시도 하는 등의 일상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 이상한 자세에서 오는 의혹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도대체 일어서기만 하면 살아날 수 있는 자세로 자살했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는 가슴이 답답해져오는 것을 느꼈다.
경찰대학 생도 때는 어떤 교묘한 살인이라도 자신의 손을 빠져나가지 못할 거라고 자신했었지만, 막상 현장에서 근무하다 보니 분명히 의문이 생기는 사건도 계급과 시간에 몰려 놓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았다.
오전 내내 우울해 하던 그는 오후가 되자 벌떡 일어나 혼자 자동차를 몰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향했다.
「목이 졸려 죽는 바로 그 순간의 데이터요? 그런 건 없습니다.」
「전문가가 없을까요? 그런 상황을 잘 아는 사람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시체나 가져오지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데려오지는 않잖아요?」
「대한민국 과학수사의 메카에서 그 정도도 아는 사람이 없다니 한심하군요.」
「아니, 여보시오. 당신이 연구소에 사람을 대줬어요, 돈을 대줬어요? 우린들 모르고 싶어서 몰라요?」
「답답해서 하는 얘깁니다.」
「글쎄, 그런 건 우리보다 검사나 구치소 직원들이 더 잘 알 거요. 그들은 사람을 목 졸라 죽이는 현장에 입회하니까요. 아니, 그들이 목 졸라 죽이는 거죠.」
말은 거칠었지만 맞기는 맞는 말이었다. 목 반장은 경찰서로 돌아와 전화를 서울구치소로 돌렸다. 서울구치소는 원래 미결수들만 수감하는 곳이지만 기결수라도 사형수는 서울구치소에 둔다. 사형장이 있기 때문이다. 전화는 몇 바퀴를 돌아 대답할 만한 위치에 있는 직원에게로 이어졌다.
「마지막 사형 집행을 한 지도 이제 10년이 넘었으니 뭐 잘 대답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런데 구체적으로 뭘 묻는 겁니까?」
「사람이 목 졸려 죽을 때의 모습은 어떤 거죠? 발버둥을 칩니까? 아니면 조용히 소리 없이 죽습니까?」
「목 졸려 죽는 모습? 그런데 왜 그런 걸 묻지요?」
십여 회 사형을 집행했다는 나이 든 교도관의 목소리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는 투였다.
「수사상 필요해서 그렇습니다. 자살인지 타살인지 분명히 하려고요.」
「그런데 바깥에서 죽는 사람들하고 여기하고는 달라요. 여기서는 바깥하고는 달리 사람이 저항하거나 움직이거나 하질 못해요.」
「결박을 당했다고 해도 몸의 반응은 있을 것 아닙니까? 몸을 격렬히 움직인다든지 목을 돌린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여기는 눈동자만 빼놓고는 사지를 의자에 완전히 결박한 후 죽이니까 몸을 움직이려야 움직일 수도 없어요.」
「목은요?」
「목뼈를 먼저 부러뜨리니까 목이 안 돌아가지요.」
「네? 목을 먼저 부러뜨려요? 누가요?」
「아니, 사람이 부러뜨린다는 게 아니고, 마루판이 쾅 하고 빠지는 순간 사람이 지하실로 떨어지며 목에 걸어둔 올가미에 체중이 실려요. 일부러 무거운 의자를 쓰는데 그러면 바로 목이 빠지면서 뼈가 부러져요. 사람 목뼈라는 게 빠진 다음에 보면 아주 가늘고 약해요. 뼈가 부러졌으니 그 다음은 생각해봐요. 줄이 뼈도 없는 기도를 꽉 죄니 빨리 죽지요. 인생은 사람을 서서히 잔인하게 죽이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빨리 죽여줘요.」
목 반장은 도대체 이 사람이 인간이란 사형당해 죽는 게 낫다고 말하는 건가 따져 묻고 싶었지만 꾹 참고 다시 물어보았다.
「목이 졸려 죽는 사람을 많이 본 경험으로 목뼈가 부러지지 않고 결박도 안 당했다면 사람이 죽는 바로 그 순간 손을 뻗어 줄을 풀려고 몸부림칠까요? 아니면 조용히 죽을 수 있을까요?」
「결박을 안 당했다면 목이 졸려오는데 조용히 죽을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타살이라면 100퍼센트 목에 손자국이 남는다는 얘긴가요?」
「그건 자살 타살의 문제가 아니에요. 자살이든 타살이든 완전히, 그야말로 완전히 결박하지 않으면 목에 손자국은 남아요. 장정 열 명이 여자 한 사람을 잡아도 목 졸라 죽이면 자국은 남는다는 말입니다.」
전문가라면 전문가일 수도 있는 사형집행인은 자살이든 타살이든 목 졸려 죽는 사람의 목에 자국이 안 남을 수는 없다고 확언했다. 목 반장은 전화를 끊고 생각에 잠겼다. 집행인 말대로 문제는 자살인지 타살인지가 아니었다. 어째서 죽은 여자는 목에 손톱자국 하나 남기지 않았을까.
목 반장은 형사과 사무실 내에서는 여교수 사건을 포기한 듯 행동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사건을 혼자 더욱 깊이 파고들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그는 타살의 흔적이 없다는 시각을 받아들이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자살로 결정짓는 건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자연히 수사의 정석대로 자살의 동기를 찾는 일에 집중하게 되었다.
수사에서 꼬리에 현혹되지 않고 몸통을 보는 방법은 바로 동기를 찾아내는 일이었다.
여자의 집안은 꽤 화려하고 다들 직업적 성취가 높았다. 금전이나 치정 등의 문제도 없었고 여자는 혼자서 조용히 공부와 과학기술 분야의 연구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목 반장은 이 여자에게는 그런 문제가 너무나 없는 게 문제일 거라고 생각하며 여자의 학교를 찾아갔다.
동료 교수들은 이미 김미진 교수의 죽음을 듣고 있었지만 그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고 있던 터라, 목 반장이 찾아오자 다들 모여들었다. 목 반장은 괜한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 김미진 교수의 사인을 자살이라고 설명했다.
「자살? 그분이 왜 자살해요?」
「지금 동기를 찾고 있는 중입니다.」
「그럴 리가 없어요. 너무나 안정돼 있는 분이에요. 자살이란 건 말이 되지 않아요.」
「혹시 학교에서 무슨 트러블이 있었다거나 머리 아픈 일이 있지는 않았을까요? 혹은 아주 수치스런 일이라거나······?」
교수들은 모두 고개를 저었다.
「너무나 거리가 먼 얘기입니다. 경찰이 판단을 제대로 하고 있기나 한 겁니까?」
「자살이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럼 타살의 동기는 있나요?」
「그것도 없어요. 약간의 강의를 하는 외에는 오로지 연구에 푹 빠져 계시던 분인데 무슨 타살의 동기가 있겠어요?」
「하지만 그분은 죽었습니다. 자살 아니면 타살인데, 둘 다 동기가 없다는 건 이상하지 않습니까?」
「글쎄, 우리는 그분이 돌아가셨다는 사실 자체를 믿지 못하겠어요.」
교수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어쩌면 김미진 교수의 독창적인 아이디어 같은 것이 범행의 동기가 되거나 하지는 않았을까요?」
「자살이라면서요?」
「만약 자살이 아니라고 한다면 말입니다.」
「김 교수가 최근 태양광 발전에 관한 기발한 연구를 하곤 있었지만 아이디어를 훔치기 위해 사람을 죽인다는 게 우리 현실에 있겠어요? 외국의 거대 회사라면 모를까.」
「외국 회사? 혹시 김 교수가 외국의 기업체 직원을 만나거나 하지는 않았나요?」
「아, 과학자들이야 거의 모두 외국의 연구소나 기업과 관계를 갖고 있지요. 최근 외국의 어느 태양광 연구소에서 한 젊은 사람이 찾아온 적이 있다는 것 같던데.」
「어느 연구소 누군지는 모르세요?」
「자세한 얘기는 안 했어요. 식사 자리에서 김미진 교수가 그냥 지나가는 말로 한 얘기였거든요. 그런데 반장님이 너무 예민한 거 아니에요? 아이디어를 노린 외국 연구소의 살인이라고 생각하는 건 어딘지 너무 영화적이에요.」
교수들은 모두 고개를 저었다. 목 반장은 교수들에게 고개를 숙인 다음 김미진 교수의 집으로 갔다.
김미진 교수의 집에는 연락을 받은 어머니와 언니가 와 있었다. 어머니는 딸이 자살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면서도 타살의 가능성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자살의 동기가 뭔지 알아보려는 겁니다.」
가족들도 그게 못내 궁금한 모양이었다.
「애를 혼자 두는 게 아니었는데······.」
어머니는 오열하면서 각종 서신과 서류, 수첩, 노트북 등을 있는 대로 내주었지만 기대를 머금고 경찰서로 가져와 풀어본 보따리와 컴퓨터에 특별한 건 없었다. 서신은 유학 시절 가족이나 친구와 교환한 것들이 대부분이라 범죄와 연결시킬 만한 것이 없었고, 수첩에는 주로 교수들과 학자들의 전화번호를 비롯하여 학교 일과 관련된 메모가 기록되어 있었다.
목 반장은 김미진 교수의 최근 스케줄 표를 살폈지만 역시 별반 기대할 게 없었다. 학교 말고 가는 곳이라고는 학회뿐이었다.
노트북에도 수식과 부호가 섞인 복잡하기 짝이 없는 갖가지 연구가 넘치고 있었지만 한결같이 목 반장이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학교 연구실에서 가져온 컴퓨터 역시 크게 다를 바 없는 내용이었다.
교수의 수첩이나 컴퓨터는 수사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일반 범죄인이나 피해자의 것과는 아예 성질이 달랐다.
목 반장은 일단 직원에게 컴퓨터와 노트북을 학교와 집으로 돌려 보내도록 지시한 후 수첩 등은 직접 가족에게 넘겨주기로 작정하고 장례식장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남동생이 전화를 받았다.
「경찰인데 유품을 돌려드리겠습니다.」
「장례를 치르는 중이니까 누님 집에 갖다두세요.」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지만 직접 드리고 확인을 받아야 합니다. 컴퓨터는 집과 학교에 원래대로 갖다 두었지만 수첩 같은 건 어머님께 넘겨받은 거니 직접 드려야 되거든요. 조문도 드릴 겸 병원으로 가겠습니다.」
목 반장은 구태여 영안실까지 갈 필요는 없었지만 수사관은 사건과 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경찰대학 시절의 가르침을 떠올리자 일부러라도 병원에 가보고 싶었다.
김미진 교수의 영정에 절을 하고 동생에게 명함을 내밀자 동생이 따라 나와 유품을 받았다.
「저는 과학은 잘 모르지만 김미진 교수님은 대단한 연구를 하던 분 같았는데 참 안됐습니다.」
동생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자살 동기가 있던가요?」
「찾지 못했습니다. 혹시 누나가 타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까?」
「남과 다투거나 원한을 살 분이 아니에요.」
동생은 별 반응 없이 영안실로 돌아갔다. 목 반장은 한동안 접객실 한구석에 앉아서 사람들이 찾아와 영정 앞에 고개를 숙이거나 꽃을 바치거나 향을 피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모든 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었다. 목 반장은 자신이 너무 예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이 정도 했으면 최선을 다했다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이제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마음속으로 사건을 종결시킨 목 반장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발걸음을 뗐다.
순간, 말쑥하게 생긴 삼십대 초반의 젊은이가 급한 걸음으로 스쳐 지나갔다.
영안실에서는 대부분의 조문객들이 영정 앞에 서기 전 아는 사람을 찾거나 만나게 되어 있는데, 이 젊은이는 두리번거리지도 아는 사람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고 바로 영안실로 들어갔다.
목 반장은 무심결에 고개를 돌려 젊은이의 행동거지를 지켜봤다. 젊은이는 옷매무새를 바로 하고 영정 앞에 서서 침착한 손길로 향을 사르고는 무릎을 꿇고 깊이 고개를 숙였다. 절을 마친 그는 한동안 꿇어앉은 채로 눈을 감고 애도를 표했다.
그는 가족들과 가볍게 목례만을 나누고는 방명록에 간단하게 이름을 남긴 후 바로 현관으로 걸어 나갔다.
하얀 와이셔츠에 검정 양복을 유달리 깔끔하게 차려입은 젊은이가 아는 사람 하나 없이 문상만 마치고 나가자 목 반장은 미심쩍은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뇌리에 김미진 교수의 동료가 말했던 외국 연구소의 젊은 직원이 떠올랐다.
목 반장은 젊은이를 천천히 뒤따라갔다. 그는 자신의 차가 있는 주차장에 이르자 윗도리를 벗어 뒷좌석에 놓고서는 운전석에 앉았다. 목 반장은 차가 출발하기 직전 다가가 손으로 발진을 막았다.
「실례합니다.」
상대방은 버튼을 눌러 유리창을 내렸다.
「왜 그러시죠?」
「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누구시죠?」
「저는 김미진 교수 자살 사건을 맡고 있는 담당 수사관입니다. 목진석 경위예요.」
상대방은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드는지 예민한 눈길로 목 반장의 얼굴을 훑었다. 목 반장은 그가 굉장히 날카롭다고 생각했다. 젊고 말쑥하게 생겼지만 두뇌 회전은 보통이 아닐 것 같았다.
「경찰에서는 김미진 교수가 살해당했다고 보는가요?」
목 반장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자에게는 분명히 남과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저는 방금 자살 사건이라고 말했는데, 왜 그렇게 생각하죠?」
「거기서 그런 기분을 갖게 만드는데요.」
「신분증을 좀 보여주세요.」
젊은이는 별로 기분 나빠 하는 기색 없이 닳아빠진 여권을 꺼내 내밀었다.
「해외여행을 많이 하시는 모양이군요. 혹시 외국에서 일합니까?」
「네.」
뭔가가 걸려들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목 반장의 조심스럽던 목소리에 저절로 힘이 실렸다.
「뭐하는 분이시죠?」
「에너지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목 반장은 뭔가 하나 둘씩 맞아 들어간다고 생각했다.
「무슨 에너지 연구를 합니까?」
「설명하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대략이라도 해보세요.」
「플라즈마 제어 방면이에요.」
「그게 태양광 발전과는 무슨 관계입니까?」
「태양광 발전? 원리는 같아요. 그런데 대단하군요.」
「뭐가 말입니까?」
「상당한 수준의 대학원생들도 바로 그렇게 연관짓는 게 쉽지 않은데 수사관이 그런 걸 바로 아니 말입니다.」
목 반장은 상대방이 태양광 발전과 연관이 있는 연구소의 직원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힘 있는 손길로 여권의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겼다.
「이정서라······ 어느 나라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어요?」
「본부는 프랑스 파리에 있어요.」
「한국에는 언제 들어왔어요?」
「한 달가량 됐습니다.」
「나흘 전 밤부터 다음날 오전까지 뭐했는지 설명할 수 있어요?」
「이거 참······ 나를 범인으로 보고 있나 본데 난 그런 사람 아닙니다.」
「묻는 말에만 대답해요.」
목 반장은 위압적으로 추궁하며 차 앞을 돌아 문을 열고 조수석에 앉았다. 정서는 옆자리에 털썩 앉는 목 반장을 보고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아직 조문의 슬픔이 그대로인 채였다.
「그저께 오전엔 국회의장을 예방했습니다.」
너무나 뜻밖의 소리에 목 반장은 주춤했다.
「국회의장이요?」
「그래요」
「무슨 일로요?」
「문자 그대로 예방이에요. 의장님이 초청하신 겁니다.」
목 반장은 잠시 슬픔에 잠겨 있는 이 젊은이를 쏘아봤다.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국회의장을 예방했다느니 하는 게 어딘지 건방져 보이면서 한편으로는 아니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전날 저녁에는 뭘 했어요?」
「청와대에서 대통령이 베푼 만찬에 참석했습니다.」
「뭐요? 당신, 일개 외국 연구소 직원이 대통령이다 국회의장이다 하는 분들을 그렇게 마구 주워섬겨도 되는 거요?」
「하여튼 사실이에요.」
목 반장은 침착한 상대의 모습을 지켜보는 사이 어쩌면 이 사람은 자신이 이제껏 봐오던 또래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통령께선 무슨 일로 초대를 하셨어요?」
「플라즈마 제어가 성공했기 때문에 격려차 부르신 겁니다.」
「플라즈마 제어요? 그게 뭐죠?」
「저는 ETER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TER라는 건 핵융합 원자로 제작 및 실험을 하고 있는 국제 단체입니다.」
「핵융합 원자로라는 것은 뭐죠?」
「미래 에너지를 연구하는 거죠. 이 핵융합 발전소 하나면 보통의 핵발전소 2천 개 정도에 해당하는 전기를 생산합니다. 그것도 우라늄 같은 방사능 물질을 쓰지 않고 소량의 물을 쓰기 때문에 오염도 없고 원료 걱정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 그런 어마어마한 발전소를 만드는 연구소가 있습니까?」
「한 연구소에서 만드는 게 아니고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유럽 3개국과 미국, 일본 그리고 중국, 우리나라 이렇게 정부끼리 모여서 공동으로 연구와 제작을 하고 있습니다.」
「아! 우리나라도 끼었어요? 그 세계 초강대국 사이에 말입니까?
「네.」
목 반장은 괜히 자신의 어깨가 으쓱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캐물었다.
「정말 자랑스럽고 훌륭한 일이군요. 그럼 우리나라는 거기서 어떤 역할을 합니까? 설마 잔심부름을 하는 건 아니겠죠?」
「핵융합 중에서도 가장 핵심 기술인 원자로의 설계와 제작을 우리나라가 맡고 있습니다.」
「원자로의 설계와 제작이라면 과연 가장 중심적인 역할 같군요. 그런데 우리나라가 그걸 해낼 수 있습니까?」
「이미 일차 실험은 성공했어요.」
「벌써 성공했다고요?」
「네.」
「그럼 박사님은 거기서 무슨 일을 하십니까?」
어느새 정서를 대하는 목 반장의 말투가 달라졌다.
「수백만 도의 뜨거운 열은 용기에 담아 가두거나 움직일 수 없습니다. 어떤 특수한 재료로 용기를 만들어도 녹아내리지 않을 수 없어요. 그런 열이나 에너지를 마음대로 조종하려면 자기장을 이용해야만 하는데, 저는 초강력 자기를 발생시켜 그 원자로 안에서 고온 플라즈마를 제어하는 분야를 맡고 있습니다.」
「친절하게 말씀해주셨지만 제가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군요. 하여튼 어마어마한 일을 하고 계시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정말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존경심이 우러나는군요. 그런데 그 실험이 성공했다는 얘기군요.」
「네, 원래 2015년까지 완성하면 되는데 우리는 초강력 유도자기를 발생시켜 융합로 안에서 100만분의 7초 동안 고온 플라즈마를 제어하는 데 성공한 겁니다. 여기까지 오는 데만 8천억 원을 들였어요. 앞으로의 과제는 그 시간을 늘리는 일입니다.」
「그래서 대통령께서 만찬을 베푼 거군요.」
정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 반장은 얼른 정서에게 여권을 돌려주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
「이제 보니 우리나라의 영웅께 제가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금메달 수백 개를 따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하신 분께 말입니다.」
「모든 분야가 다 중요하지요. 무얼 하든 그 크기는 다 같을 겁니다. 그런데 김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