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바울의 복음
지은이/ 마커스 보그 & 존 도미닉 크로산
옮긴이/ 김준우
펴낸이/ 홍인식
초판 1쇄 펴낸날/ 2010년 2월 20일
중쇄 3쇄 펴낸날/ 2019년 7월 30일
전자책 펴낸날/ 2020년 8월 20일
펴낸곳/ 한국기독교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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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irst Paul: Reclaiming the Radical Visionary Behind the Church's Conservative Icon
by Marcus J. Borg & John Dominic Crossan
Copyright ⓒ 2009 by Marcus J. Borg and John Dominic Crossan
All rights reserved. Korean Translation copyright ⓒ 2010 by Korean Institute of the Christian Studies. The Korean translation right arranged with the author c/o HarperOne through EYA (Eric Yang Agency). Printed in Seoul, Korea.
이 책의 한국어판 저작권은 EYA (Eric Yang Agency)를 통한 HaperOne사와의 독점계약으로 한국어 판권을 한국기독교연구소가 소유합니다. 저작권법에 따라 국내에서 보호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무단복제를 금합니다.
ISBN 978-89-97339-58-7 95230
값 10,000원
* 일러두기
바울은 기독교의 시작에서 예수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바울을 좋게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는 기독교인들 중에도 바울을 좋게 평가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을 매력적인 인물로 평가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너무 보수적인 인물로 본다. 또 어떤 사람들은 바울을 어떻게 평가할지 잘 모르겠다고 하며, 또 다른 사람들은 바울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뉴스위크』(Newsweek)는 2002년 5월 6일자 표지 기사로, “예수라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에는 바울에 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바울이 노예제도, 반(反) 유대주의, 여성혐오, 이성애(heterosexism)에 관해 말한 것으로 되어 있는 성경 구절들도 인용하고 있었다.
이런 성경 본문들은 바울이 자신의 편지들을 통해서 말한 것으로 되어 있는 말씀들로서, 많은 사람들은 그 말씀들이 은혜롭다기보다는 지나치게 보수적이라 오히려 역겹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의 중요성, 바울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이유들, 우리가 바울을 이해하는 방식의 근거들에 대해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우선 바울의 중요성은 신약성경 자체에서 명백하다. 즉 신약성경에는 27권의 책들이 있다. 비록 어떤 것들은 단지 한 페이지나 혹은 몇 페이지에 불과하기 때문에 “책”이라고 부르기에는 어색하지만 말이다. 그 27권 가운데 13개(권)의 편지들이 바울이 쓴 것으로 되어 있다. 물론 그 13개의 편지들 모두가 실제로 바울이 쓴 것들은 아니지만, 그 편지들 자체 안에는 바울이 쓴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문제는 잠시 뒤에 설명하겠다. 이런 사실에 덧붙여서, 사도행전의 전체 28장 가운데 열여섯 장에서 바울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신약성경의 절반은 바울에 관한 내용이다.
더군다나 신약성경에 따르면, 바울은 초기 예수운동을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비유대인들)에게까지 확장시키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했다. 그 결과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종교가 태어나게 되었다. 비록 바울은 (예수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으로서 자신이 유대교 안에서 선교활동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말이다. 예수나 바울 모두 자신의 활동으로 인해 새로운 종교를 일으키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이것은 기독교가 실수로 생겨난 종교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의 기초를 놓은 가장 중요한 두 사람은 모두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열심을 갖고 있던 유대인이었다는 뜻이다. 바울이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전도할 때, 그는 예수 안에 드러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헌신하도록 전도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신약성경의 다른 어느 인물보다도 기독교라는 새로운 종교가 등장하도록 하여, 비록 그 중에 유대인들이 포함되기는 했지만, 점차 유대교로부터 분리되는 데 책임이 있었던 인물이다.
바울의 중요성은 신약성경을 넘어 기독교 역사 속으로 확장된다.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신학자들과 종교개혁가들 가운데 상당수는 바울의 편지들의 영향을 결정적으로 받았기 때문이다. 성 어거스틴(St. Augustine, 354-430)은 바울의 성경구절에 의해 회심하고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가 회심하기 전에는 재주가 많고 총명했지만, 결혼하지 않은 여인에게서 아이를 낳을 정도로 문제가 많은 젊은이였다. 그는 영적으로 철학을 거쳐 마니교(Manicheanism)에 심취했었는데, 마니교는 인간의 육체는 악한 반면에 영혼은 선하다고 강조하는 종교였다.
그러던 어느 날 어거스틴은 어느 아이가 “그걸 손에 들고 읽어보세요”라고 노래하는 소리를 듣는다. 그는 신약성경을 손에 들었는데, 로마서 13:13-14을 보게 되었다.
어거스틴의 『고백록』(Confessions)은 흔히 세상에서 첫 번째 쓰여진 영적인 자서전으로 간주되는데, 그 책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바울을 통해 이런 체험을 한 후에, 어거스틴은 기독교 처음 천 년 동안의 역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신학자가 되었다.
어거스틴 때부터 16세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때까지의 천 년 이상 동안 바울은 계속해서 존경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그의 편지들이 기독교의 거룩한 경전의 한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개혁 기간 동안에 바울은 개신교 신자들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바울에 대한 강의를 준비하던 중에 자신의 삶이 변화되는 철저한 은총을 체험했다. 바울은 루터 신학의 기초가 되었는데, 특히 바울의 말씀에 기초한 은총(grace)과 율법(law), 신앙(faith)과 행위(works) 사이의 대조(contrast)가 루터 신학의 기초가 되었으며, 이 용어들은 그 이후 루터교 신자들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용어들이 되었다.
또 한 사람의 가장 중요한 프로테스탄트 개혁자인 요한 칼뱅(John Calvin, 1509-64) 역시 바울을 자신의 신학의 핵심으로 삼았다. 칼뱅의 신학적 후손들은 셀 수 없이 많은데, 청교도, 장로교, 침례교, 회중교회(오늘날 그리스도 연합교회)를 비롯해서 수많은 개신교 교단들이 있다.
그 후 200년이 지난 후에는, 바울이 감리교회의 출생에 중심적 역할을 했다. 즉 감리교회의 창시자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91) 목사는 바울의 로마서에 대한 루터의 주석을 읽는 것을 듣다가 회심하여 영국교회의 개혁에 매진하게 되었다. 그의 평생의 사역은 결국 새로운 교단을 낳았으며, 오늘날 미국에서 두 번째로 가장 큰 개신교 교단이 되었다. 전 세계의 수억 명의 개신교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간에, 바울을 자신들의 일차적인 신학적 조상으로 삼고 있다.
분명한 사실은 바울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바울이 왜 중요하며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은 기독교인들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 바울의 중요성, 메시지, 성격을 이해하는 방식은 매우 다양하다. 어느 정도까지는 이와 똑같은 말을 예수에 대해서도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예수 역시 매우 다양하게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기독교인들이 예수에 대해서는 감탄하며 매력을 느끼며 마음에 감동을 주는 분이라고 생각하지만, 바울에 대해서는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가톨릭의 바울과 개신교의 바울
가톨릭 신자들과 개신교 신자들은 바울의 중요성을 매우 다르게 이해한다. 개신교 신자들에게는 (현재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역사적으로는) 바울의 신학과 언어를 해석하는 것이 기독교를 이해하는 기초였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가톨릭 신자들도 바울을 성인으로 간주하며 그의 편지들을 거룩한 경전으로 받아들이지만, 가톨릭 신자들은 개신교 신자들처럼 바울을 중심적인 인물로 간주하지는 않았다. 이런 차이점은 종교개혁 이후 프로테스탄트 신학사와 가톨릭 신학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들 자신의 삶의 이야기로 풀어서 설명해보겠다.
마커스 보그: 내가 성장한 루터교에서는 바울이 예수보다 더 중요했다. 물론 어느 목사님이나 교회학교 선생님이 이런 말을 드러내놓고 한 적은 없다. 실제로 그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 당황해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루터교인으로서 성장하면서 체험한 것을 되돌아보면, 나는 예수, 하나님, 기독교 복음을 바울의 렌즈를 통해서, 그것도 루터가 중개한 바울의 렌즈를 통해서 보도록 교육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나는 물론 천만 다행스럽게도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예수와 하나님, 기독교를 보는 우리의 방식이 단지 하나의 방식이 아니라, 틀림없이 올바른 방식(the way)이라는 것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루터교 신자로서, 기독교의 기초가 되는 메시지는 “은총에 의해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justification by grace through faith)이라고 믿었는데, 이것은 바울과 루터의 표현으로서 흔히 줄임말로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 혹은 “이신득의”(以信得義)라고 부른다.1) 이 말이 나에게 뜻했던 것은 내가 “믿음으로”(by faith)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뜻이었으며, 여기서 믿음이란 바울과 루터가 이해한 바대로 예수와 하나님을 믿는 것이었다.
내가 20대 초반에 신학대학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바울과 복음을 이해하는 나의 방식이 얼마나 루터교적이었는지를 깨닫지 못했었다. 루터교의 관점이 단순히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루터교의 관점은 다른 교단의 관점보다 훨씬 훌륭하다.) 그러나 바울을 이해하는 다른 관점들이 있다는 사실과, 어떤 관점들은 바울 신학을 풍부하며 보다 온전히 이해하도록 도와준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그 후 또 다른 신학대학원에서 지내는 십여 년 동안에, 나는 가톨릭의 바울 이해와 개신교의 바울 이해 사이의 차이점을 직접 맞닥뜨리게 되었다. 세 개의 가톨릭 신학대학원이 포함된 연합신학대학원에서 방문교수로 가르치던 동안에, 많은 수의 가톨릭 신학생들이 내 강의에 들어왔다. 내가 ‘은총에 의해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에 대한 바울의 이해를 강의할 때, 몇몇 가톨릭 신학생들이 당황해하는 것을 알아차렸는데, 그 중 한 학생이 질문을 했다. “‘은총에 의해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왜 그것이 중요한가요?” 나는 이런 구절이 가톨릭 신학생들에게는 매우 낯선 표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이 당황했던 것은 신학적인 소박함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바울이 개신교 신자들과 가톨릭 신자들에게 그 중요성이 다른 것임을 반영한 것이었다.
존 도미닉 크로산: 나는 한편으로는 매우 다행스럽게도 바울에 대해 서로 상충되는 해석들이나, 심지어 종교개혁 당시 바울에 대한 격렬한 논쟁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한 채 성장했다. 가톨릭 신자로서 나는 바울을 무엇보다도, 6월 20일의 “성 베드로와 성 바울 축일”의 후반부로 알았으며, 내 기억으로는 1930년대와 1940년대 아일랜드에서는 그 날이 주일날처럼 거룩한 의무가 있는 성일(聖日)이었다. 1945년에 아일랜드의 고전어 기숙학교에서, 나는 “로물루스와 레무스”(Romulus et Remus)를 배우게 되었고, 이교도 로마의 이 쌍둥이 영웅이 “베드로와 바울”(Petrus et Paulus)이라는 기독교 로마의 쌍둥이 영웅으로 대체되어, R로 시작되는 이름들이 P로 시작되는 이름들로 매끄럽게 바뀌었고, 이 두 인물의 순서는 항상 그 주어진 순서를 따른다는 것이었다.
그 후 1959년에 내가 처음으로 로마의 성 베드로 광장에 섰을 때, 나는 성 베드로의 석상(곧 베드로 대성당의 일차적인 혹은 복음서들의 측면에 서 있다)과 성 바울의 석상(이차적인 혹은 서신들의 측면에 서 있다)을 보면서, 이 두 인물을 결합시켜주는 것은 함께 로마에서 순교한 사도들(apostles)이었다는 점을 깨달았다. 바울은 그곳에 성서 기자나 신학자로서가 아니라, 순교자로서 서 있었다. 그러나 물론 베드로가 손에 (천국의) 열쇠를 들고 있는 반면에, 바울은 손에 그의 편지들을 들고 있지 않았다.
당시 나는 신약성경 자체 안에, 이미 베드로와 바울 사이의 긴장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바울은 두 차례에 걸쳐 베드로를 “대면하여” 그의 “위선”을 책망하였다(갈 2:11-13). 그 후에, 베드로의 이름으로 편지를 쓴 저자는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5-16)고 지적했다. 따라서 성 베드로 대성당 앞에 서 있는 그 두 사람의 로마식 석상은 4세기에 시작된 그 둘 사이의 화해의 과정, 즉 베드로와 바울이 모두 새로운 기독교적인 로마(이에 버금가는 것은 콘스탄티노플이었다)의 기초를 놓은 순교자들로 강조되었던 화해의 과정을 눈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베드로와 바울 사이의 화해는 4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형상에도 나타나 있다. 그것은 로마 시내 캘리아 언덕에 있는 귀족 발레리 가문의 대저택에서 출토된 청동 램프로서 지금은 피렌체의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램프는 보트 모양을 하고 있는데, 베드로는 보트 뒤에 앉아 키를 잡고 있으며, 바울은 뱃머리에 서서 앞을 내다보고 있다. 베드로는 키를 잡고, 바울은 안내를 한다. 그리고 그 보트는 순풍에 돛단 듯 나아가는 모습이다.
교황 베네딕트 16세가 선포한 “바울의 해”(2008년 6월 29일부터 2009년 6월 29일까지)에 이 책을 우리 두 사람이 공동저자로 내기 위해 작업하면서, 우리의 공통적인 희망은 바울을 종교개혁의 세계로부터 구출하여 본래의 로마 세계 속에 자리매김 함으로써, 바울을 기독교와 유대교 사이에 대조되는 입장이나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에 대조되는 입장에서 볼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계약전통(covenant tradition)과 로마의 제국신학(imperial theology) 사이에 대조되는 입장으로 올바르게 파악하려는 것이다.
개신교 신자들은 비록 바울의 중요성에 관해서는 동의하지만, 그의 메시지는 매우 다르게 이해한다. 두 가지 관점에서 특히 서로 다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바울이 철저한 은총, 무조건적인 은총, 즉 조건 없는 은총의 매개자였다. 루터는 이런 입장이었다. 은총에 의해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바울의 메시지는 루터에게 환희에 넘치는 해방을 안겨주었다. 즉 루터는 바울의 메시지를 통해, 30대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고뇌에 잠기게 만들었던 두려운 과제, 곧 하나님의 요구사항들을 충족시킴으로써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려는 그의 불안한 노력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던 것이다. 루터에게 철저한 은총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신다는 것, 그리고 기독교인의 삶은 이런 은총을 더욱 완전하게 살아내는 것이지, 하나님의 요구사항들을 충족시키느라 기를 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뜻했다. 루터에게는 바울의 메시지가 요구사항들이 끝장난 것, 곧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는 그 기초가 요구사항들이라는 입장이 끝나도록 만들어준 것이었다.
그러나 루터의 많은 신학적 후손들을 포함해서 다른 개신교 신자들에게는 바울의 신학이 요구사항들의 폐기로 이해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요구로 이해되었다. 즉 바울의 신학을 믿는 것이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 루터적인 형태에서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강조에도 불구하고, “은총에 의해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된다”는 바울의 가르침은 “신앙의인”으로 받아들여져, “믿는다”는 “행위”가 필요하게 되어, 또 다른 두려운 형태의 “행위를 통한 의로움”(works righteousness)이 되었다. 여기서 신앙은 올바른 교리들(루터교 교리들)을 믿는 것을 뜻했으며, 이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었다. 루터가 불안으로부터 환희에 넘치는 해방으로 체험했던 것이, 또 다른 깊은 불안의 원천이 되어버린 셈이다. 신앙, 곧 믿는 것은 우리가 성취해야만 하는 새로운 요구사항이 되어버렸으며, 그 믿는 정도에 따라 우리가 평가될 것으로 둔갑한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 하나님, 성서에 관한 교리들을 믿음으로써 구원받게 된다는 확신은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많은 개신교 신자들 사이에 계속되고 있다. 특히 “올바른 교리들을 믿는 것”이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의 기초이며 구원의 조건이라고 강조하는 사람들 사이에 이런 확신이 팽배해 있다.
억압자 바울
이처럼 긍정적인 바울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에 덧붙여서, 바울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갖는 기독교인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 그 이유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바울의 편지들이 읽고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바울의 편지들은 복음서들, 즉 여러 이야기와 쉽게 기억되는 가르침들로 가득한 복음서들과는 매우 다르다. 바울의 편지들은 예수에 관해 이미 가르침을 받은 크리스천 공동체들에게 쓴 편지들로서, 예수의 메시지와 가르침에 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 편지들은 많은 독자들에게 부정적 의미에서 “신학적”이다. 즉 구체적이기보다는 추상적이며, 기억하기 쉬운 것이라기보다는 장황하다.
더군다나, 바울의 편지들은 그 공동체들의 지역적 문제들과 그들의 질문과 갈등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지역 상황에 대해 상당히 자세히 알기 전에는 그 편지들이 무슨 뜻인지 알기가 쉽지 않다. 우리가 바울을 읽을 때는 마치 다른 사람의 편지를 읽는 것과 같아서, 그 편지를 쓰게 된 경위를 잘 알지 못한다면, 그 말뜻을 분명하게 알아차릴 수 없다.
세 번째 이유는 이 장의 시작 부분에서 언급한 것처럼, 바울이 쓴 것으로 되어 있는 성경구절들이 노예제도를 뒷받침하고, 여성들을 종속시키며, 동성애 행위를 단죄하기 때문이다. 그런 성경구절들은 기독교 역사의 상당 기간 동안, 억압의 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되어졌다. 150년 전만 해도 어떤 기독교인들은 바울의 말씀에 입각해서 노예제도를 옹호했다. 20세기의 유명한 흑인 목사이며 신학자였던 하워드 써만(Howard Thurman)은 자신의 어머니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지만, 노예제도에 관한 구절들 때문에 바울을 읽으려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교회와 사회 안에서 여성을 종속시켜왔던 것은 노예제도보다 훨씬 더 오래 지속되었다. 개신교 대부분의 주류(mainline) 교단들이 여성들에게 성직자 안수를 주기 시작한 것은 고작해야 40년밖에 되지 않았다. 아직도 가톨릭 교회는 여성에게 사제 서품을 허락하지 않고 있으며, 대부분의 보수적인 개신교회들도 여성 안수를 거부하고 있다. 또한 많은 목사들은 여전히 아내가 남편에게 종속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런 보수적인 입장의 일차적인 근거는 바울의 편지들에 나오는 구절들이다. 또한 동성애를 단죄하는 입장은 많은 교회들에서 계속된다. 심지어 동성애에 대한 태도가 변하고 있는 교회들 안에서도, 그런 변화 때문에 충돌이 벌어지곤 한다.
이처럼 바울은, 인류의 절반 이상이 되는 사람들에게 문화적으로 억압적인 인습들의 체계를 뒷받침하는 데 사용되어 왔다. 그러므로 노예들, 여성들, 동성애자들, 그리고 이들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흔히 바울을 역겹게 생각하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이에 덧붙여서, 『뉴스위크』 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억압의 체제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종합적인 방식으로 이용되었던 바울의 말씀이 있다. 전체 본문은 로마서 13:1-7이지만, 잘 알려진 그 첫 부분만 인용해보자.
오랜 세월 동안 기독교인 지배자들은 이 성경 말씀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지배를 합법화했으며, 자신들의 지배에 복종하도록 요구했다. 평범한 기독교인들은 이 말씀이 정치적인 침묵을 요구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우리는 4장에서 이 본문을 다시 고찰하겠다. 여기서는 2차 세계대전 중에 수많은 독일 기독교인들이 이 말씀에 근거해서 히틀러의 제3 제국에 대한 복종을 정당화했다는 사실만 지적하고 넘어가겠다. 또한 미국에서는 민권운동 기간 동안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말씀에 입각해서 시민불복종 운동에 반대했다. 보다 최근에는 유명한 복음주의 설교자들이 이 말씀을 이용해서,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한 지지를 정당화했다. 즉 기독교인들은 정부가 무슨 일을 하든지 복종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입장은 점차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설득력을 잃고 있다.
이런 본문들만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특정한 본문에서 특정한 문제들에 관해서만 잘못된 것이 아니라, 예수의 메시지를 매우 왜곡시킨 “원흉”이었다고 본다. 학자들을 포함해서 여러 사람들이 쓴 책들은 바울이 예수의(of) 가르침과 메시지를, 예수에 관한(about) 추상적인 교리들로 둔갑시켜, 예수의 종교(the religion of Jesus)를 예수에 관한 종교(a religion about Jesus)로 바꾸었다고 주장한다. 바울이 단지 몇몇 구절에서만 잘못된 것이 아니라 포괄적으로 잘못된 것을 가르쳤다고 보는 것이다. 예수는 좋지만 바울은 나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우리는 비록 바울이 어떤 점들에서는 잘못되었다고 기꺼이 말할 용의가 있지만, 바울에 대한 이런 부정적 입장을 갖고 있지 않다. 바울을 긍정적으로 본다는 것이 바울이 쓴 모든 것을 지지한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두 사람은 바울을 찬양하는 사람들에 속한다. 우리는 바울이 예수의 매력적인 사도라고 보며, 바울이 즐겨 사용한 “그리스도 안에” (in Christ) 사는 삶에 대한 비전은 예수 자신의 메시지와 비전에 매우 충실한 것이라고 본다. 우리가 예수와 바울이 활동한 상황이 서로 달랐다는 점을 고려하면, 즉 예수는 유대인들의 고향 땅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말했던 반면에, 바울은 유대인들의 고향 땅을 넘어 로마제국의 여러 도시들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말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바울은 자신의 주님이 된 급진적 예수의 충실한 사도로서 살았던 것으로 드러나게 된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바울을 만나는 것이 생전 처음으로 바울을 다시 새롭게 만나는 것과 같을 것이다.
바울 새로 만나기
우리는 바울을 당시의 시대와 장소 속에 자리매김 하는 일부터 시작하겠다. 3장에서 우리는 바울의 생애를 자세하게 다룰 것이다. 여기서는 몇몇 이정표들만 설정하려는데 예수부터 시작할 것이다.
예수는 기원전 4년경에 태어났는데, 그보다 한두 해 일찍 태어났을 가능성도 있다. 기원후 20년대 후반에, 예수는 대중적인 활동을 시작하였고, 곧 로마제국의 당국에 의해 처형되었는데, 그때가 30년이었을 가능성이 제일 크다.
바울이 언제 태어났는지는 모르지만, 십중팔구 1세기의 첫 번째 십 년(1〜10년)에 태어났을 것이다. 이렇게 짐작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바울은 기원후 60년대까지 건강하게 살았다. 따라서 그의 나이가 70대나 80대였을 것으로는 보기 어렵다. 그러므로 바울은 예수보다 좀 젊었지만, 동시대를 살았다고 말할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유대인이었지만, 성장 환경은 매우 달랐다. 예수는 갈릴리의 작은 마을에서 자라났지만, 바울은 오늘날 터키에 속하는 소아시아 남부의 매우 중요한 도시 다소(Tarsus)에서 자라났다. 예수는 평생 동안 유대인들의 고향 땅에서 살았지만, 바울은 유대인 “디아스포라” (Diaspora), 곧 고향을 떠나 해외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의 공동체의 산물이었다.
우리가 바울에 관해 처음 듣게 되는 것은 예수가 처형된 후 몇 년 지난 다음에 사도행전을 통해서다. 사도행전 7장에 예루살렘에서, 흔히 기독교인 최초의 순교자로 일컬어지는 스데반(Stephen)이라는 예수의 추종자가 돌에 맞아 죽는 현장에 바울(사울)이 있었다. 스데반의 순교 이야기는 8장1절에서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는 간단한 해설로 끝난다. 바울이 회심하기 이전의 이름인 사울은 당시 아마도 20대의 나이였을 것이며, 30대 중반이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 사도행전 9장에서 사울은 스스로 예수의 추종자들을 박해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예수가 처형된 지 3〜5년이 지난 후, 사울은 시리아의 다마스쿠스(Damascus) 근처에서 혹은 그 도시 안에서, 부활한 그리스도를 만나 인생이 바뀌는 체험을 했다. 이 체험을 통해 예수를 박해하던 사울은 이방인들에게 예수를 전하는 사도 바울로 바뀌었다. 그 후 약 25년 동안, 바울은 걸어서 혹은 배를 타고, 주로 소아시아와 그리스 등 로마제국의 동부 지역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했는데, 결국 로마에서 일생을 마쳤다. 기독교 전승에 따르면, 바울은 로마에서 처형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기원후 60년대 초반이었을 것이다.
바울 생전에는 기록된 복음서들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첫 번째 복음서인 마가복음은 70년경에 기록되었으며, 신약성경의 다른 세 복음서들인 마태, 누가, 요한복음은 1세기 말에 기록되었다. 바울의 진정한 편지들은 대부분 혹은 전부가 50년대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신약성경에서 최초의 문서들인 셈이다.
이런 연대기를 염두에 두고, 우리는 이제 이 책에서 우리가 바울을 이해하는 방식의 기초를 설명하고자 한다. 그 기초들은 우리 두 사람만 독특하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주류(mainline) 신약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지지하는 것이다. 주류 신약학자들이란 주류 교단들의 신학대학들만이 아니라 어느 종파에도 속하지 않은 대학들에서 가르치는 학자들을 말한다.
주류 신학자들이 근본주의 학자들 및 많은 보수적 학자들과 차이나는 점은, 성경이 다른 책들과 달리 틀림이 없고 오류가 없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증한다는 식의 전제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주류 신학자들은 성경을 역사의 산물로 보아, 다른 역사적 문서들과 마찬가지로 연구할 수 있으며, 특정한 기독교의 신학적 확신이 성경 연구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경에 대한 이런 접근방식은 가톨릭 신학자 존 마이어(John Meir)의 입장인데, 그는 역사적 예수에 관한 여러 권으로 된 연구서 서론에서, 기독교의 기원에 관한 전문가 네 사람, 곧 가톨릭 신학자, 개신교 신학자, 유대인 신학자, 그리고 무신론자 등 네 명의 학자가 예수에 관한 합의에 도달할 때까지 도서관에 감금된 상태에서 토론할 것을 상상하도록 요청한다. 그들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이 합의할 수 있는 것은 물론 그들의 특정한 종교적 믿음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는 문제들일 것이다. 그 합의 내용은 많지 않을 것이지만, 그것이야말로 기초가 되는 것이리라.
이런 접근방식에서는 다음 세 가지 기본적 선언이, 우리가 바울을 이해하는 기초가 될 것이다. 첫째로, 바울이 쓴 것으로 되어 있는 모든 편지들이 바울에 의해 쓰여진 것은 아니다. 즉 신약성경 안에는 한 사람 이상의 바울(more than one Paul)이 있다는 말이다. 둘째로, 바울의 편지들을 그 역사적 맥락(historical context) 속에 자리매김 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셋째로, 그의 메시지, 곧 그의 가르침과 복음은 그의 인생을 바꾸고 계속 체험된, 부활한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에 근거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을 유대인 그리스도 신비주의자(a Jewish Christ mystic)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이해라는 점을 주장할 것이다.
세 사람의 바울
지난 200년 넘게 발전해온 주류 신약학은 바울이 쓴 것으로 되어 있는 13개의 편지들을 세 그룹, 즉 (1) 바울이 쓴 편지들, (2) 바울이 쓰지 않은 편지들, 그리고 (3) 그 저자가 불확실한 편지들로 나눌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1) 대부분의 학자들이 합의한 바에 따르면, 적어도 7개의 편지들은 “진정하다”(genuine). 즉 바울 자신이 쓴 편지들이다. 이 7개의 편지들은 3개의 긴 편지들(로마서, 고린도전서와 후서)과 4개의 짧은 편지들(데살로니가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빌레몬서)이다. 1세기의 50년대에(한두 해 차이가 날 수 있다) 기록된 이 편지들은 신약성경의 최초의 문서들로서 복음서들보다 먼저 기록되었다(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은 70년경에 기록되었다). 이처럼 바울의 진정한 편지들은 기독교로 발전할 것에 대한 가장 오래된 증언이다.
(2) 학자들이 거의 똑같이 강하게 합의를 이루고 있는 것에 따르면, 3개의 편지들, 즉 흔히 “목회서신”(pastoral letters)이라 부르는 디모데전서와 후서, 디도서는 바울이 쓴 편지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학자들은 이 편지들이 기원후 100년경, 혹은 그보다 10년이나 20년 후에 기록된 것으로 추측한다. 이 편지들은 보다 후대의 역사적 상황과 바울의 진정한 편지 7개와는 매우 다른 문체(style)를 보여주기 때문에, 바울이 쓰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디모데와 디도에게 보낸 편지들은 바울이 죽은 후 몇 십 년이 지나 바울의 이름으로 쓰여진 것이다. 이처럼 남의 이름으로 문서를 기록하는 것이 부정직하거나 사기행위라고 생각할 독자들도 있을 테지만, 고대세계에서는 이런 일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당시에는 유대교 안에서도 이런 일이 문학적인 관행이었다는 말이다.
(3) 학자들 사이에 합의를 이루지 못하는 세 번째 그룹의 편지들에 대해, 대다수 학자들은 바울이 쓰지 않은 것으로 간주한다. 흔히 “논쟁적인” 편지들로 불리는 이 편지들에는 에베소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후서가 포함된다. 우리 두 사람은 이 편지들이 “바울 이후”(post-Paul)의 편지들, 즉 바울이 죽은 후 한 세대 정도 지나서, 그의 진정한 편지들과 후대의 목회서신들 사이의 중간에 기록된 편지들로 간주한다.
이처럼 바울이 쓴 것으로 되어 있는 편지들 속에는 세 사람의 “바울”이 있는 셈이다. 이 세 사람의 “바울”에게 이름을 붙이기 위해, 우리는 7개의 진정한 편지를 쓴 바울을 급진적인 바울(radical Paul)이라 부른다. 3개의 목회서신의 바울을 반동적인 바울(reactionary Paul)이라 부르는데, 그 이유는 이 편지들의 저자가 바울의 메시지를 단순히 발전시킨 것이 아니라 중요한 점들에서 바울의 메시지에 반대되는 것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우리가 2장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이 편지들의 저자는 바울의 사상을 당시의 관습들에 강력하게 조화시키고 있다. 급진적 바울과 비교해서, 논쟁적인 편지들의 바울을 우리는 보수적인 바울(conservative Paul)이라 부른다.
우리의 목적은 “급진적,” “반동적,” 그리고 “보수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논란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바울이 죽은 다음에(post-Pauline) 그의 이름으로 기록된 가짜 바울의(pseudo- Pauline) 편지들은 바울 신학의 중요한 측면과 관련하여 반(反) 바울적인(anti-Pauline) 편지들이라는 사실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편지들은, 다음 장에서 우리가 논증하겠지만, 바울을 길들인 편지들로서, 바울의 열정을 순화시켜 바울과 그의 추종자들이 살고 있었던 로마제국의 전형적인 세계에 순응하도록 만든 편지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네 번째 바울(fourth Paul)을 도입하여 문제를 너무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지만, 우리가 갖고 있는 자료들의 성격상 네 번째 바울을 따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사도행전의 절반 이상이 바울에 관한 것이다. 누가복음을 기록한 바로 그 저자에 의해 기록된 사도행전은 십중팔구 1세기 말엽에 기록되었을 것인데, 이것은 바울이 죽은 후 30년 정도가 지난 때였다.
사도행전의 문학적 형태는 편지들과 매우 다르다. 왜냐하면 사도행전은 이야기(a narrative)로서, 신약성경 안에서 우리가 바울에 관해 갖고 있는 유일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은 바울의 메시지보다는 바울의 활동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사도행전에는 바울이 회심하여 예수의 추종자가 된 이야기가 세 차례나 반복되며, 그의 세 번에 걸친 전도여행,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투옥되고, 여러 관리들 앞에 출두한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그리고 바울은 황제에게 호소하기 위해 죄수로서 로마로 호송된다. 사도행전은 바울이 제국의 수도 로마에서 가택연금 상태에서 여전히 복음을 설교하는 것으로 끝난다.
사도행전에는 바울의 죽음이 보고되지 않기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바울이 여전히 살아 있던 동안에 사도행전이 기록되었음이 틀림없다고 주장해왔다. 그렇다면 사도행전의 기록연대는 아무리 늦어도 60년대 초반이었다는 말이 된다. 이 주장이 가정하는 것은 사도행전의 목적이 “바울의 생애”를 전하는 것이었으며, 바울의 죽음에 대한 언급이 빠져 있는 것은 바울이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목적과 계획은 복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로마로 전파되는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것이다(예컨대 행 1:8). 따라서 바울이 로마제국의 수도에서 복음을 설교하는 것으로 사도행전이 끝나는 것은 매우 적절한 것이다. 만일에 사도행전 저자가 “그리고 로마가 그를 처형했다”라는 말로 끝마감을 했다면, 아무리 줄잡아 말하더라도, 매우 이상한 클라이맥스가 되었을 것이다.
사도행전을 바울을 위한 하나의 자료로 사용하는 것과 관련된 문제로 되돌아가서, 사도행전 속의 바울에 대한 묘사가 바울의 진정한 편지들 속의 급진적인 바울의 모습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가, 아니면 판이한가에 대해 학자들 사이에는 상당한 의견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것은 바울의 편지들과 사도행전의 문학적인 장르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놀라운 일도 아니며 특별히 의미심장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사도행전과 바울의 편지들 사이에 그 내용이 겹쳐지는 부분들에서, 때로는 사도행전이 편지들과 일치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일치하지 않고 있어서, 그 내용이 겹쳐지지 않는 부분들에서는 사도행전의 역사적 정확성을 평가하기 어렵게 만든다.
어떤 학자들은 사도행전과 바울의 편지들이 매우 말끔하게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그 사이에 중요한 차이점들이 있다고 주장한다. 학자들 사이에 이처럼 의견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사도행전을 바울을 위한 일차 자료로 사용하지 않고, 중요한 이차 자료로 사용할 것이다. 우리의 일차 자료는 7개의 진정한 편지들이며, 적절할 때는 사도행전을 보충자료로 사용할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나중에 3장에서 자세하게 설명하겠다.
역사적 맥락
우리의 두 번째 기초가 되는 개념 역시 주류 신약학자들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고대 문서들을 역사적으로 연구하는 기초로서, 본문을 그 역사적 맥락(historical context) 속에 자리매김 하는 것의 중요성을 말한다. 즉 당시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가? 그 저자가 다루고 있는 상황들은 무엇이었는가? 그 저자의 말과 암시는 고대의 역사적 상황과 문학적 상황 속에서 무엇을 뜻했는가 하는 물음에 답해야 하는 것이다. 맥락을 검토하지 않는다면, 독자들은 어느 특정 본문에 대해 무슨 뜻이든지 상상할 수 있다는 말이다.
바울의 편지들의 맥락은 몇 개의 동심원(同心圓)을 그리고 있다. (1) 가장 중심에 있는 원은 바울이 편지를 보낸 공동체들의 맥락이다. (2) 이 중심원의 맥락은 초기 예수운동 안에 있으며 또한 예수운동에 둘러싸여 있으며, (3) 이 초기 예수운동의 맥락은 유대교의 맥락 속에 있으며, (4) 이것은 로마제국의 맥락 속에 자리잡고 있다.
비록 우리는 바울의 편지 대부분을, 그가 편지를 보낸 도시들의 이름으로 알고 있지만, 바울은 도시들에 편지를 보낸 것이 아니라, 그리스의 데살로니가, 고린도, 빌립보와 소아시아의 갈라디아, 그리고 로마 자체 등, 그 도시들 안에 있는 초기 예수 추종자들의 작은 공동체들에 보낸 것들이다. 바울이 직접 빌레몬이라는 개인에게 보낸 편지 역시 보다 큰 집단을 위해 보낸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편지는 그 공동체에게 읽혀지도록 하기 위해 보낸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크리스천 공동체들에게 쓴 편지들 속에서, 바울의 목적은 예수의 메시지 전체를 선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편지들의 수신인들은 이미 예수의 메시지에 관해 가르침을 받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로마를 제외하고는, 바울이 그런 공동체들 안에서 적극적으로 전도활동을 벌여왔었다. 바울의 편지들은 그가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쓴 것이며, 그 대부분은 그가 없는 동안에 그 공동체들 안에서 생겨난 문제들과 질문들에 대해 가르침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의 편지들은, 오늘날 바울 학자 칼빈 뢰츨(Calvin Roetzel)의 표현대로 “맥락 속의 대화”로서, 이 공동체들과 바울의 관계라는 맥락 속에서 이루어진 대화들이다. 따라서 그의 편지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편지들을 그 대화의 맥락 속에 자리매김할 필요가 있다.
두 번째 동심원의 맥락은 초기 예수운동으로서, 초기 예수운동이란 예수가 죽은 후 처음 몇 십 년 동안의 예수의 추종자들을 부르기 위해 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용어이다. 초기 예수운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그들을 “기독교인”(Christians)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치 유대교와는 구분되는 새로운 종교의 멤버가 된 것처럼 시대착오적인 호칭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9장 2절에 따르면, 그들은 “그 도(道)를 따르는 사람들,” 즉 예수의 길(the Way of Jesus)을 추종하는 사람들로 불려졌다. 그러나 시대착오의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때때로 그들을 “기독교인들” 혹은 “크리스천 유대인들”(Christian Jews) 혹은 “크리스천 이방인들”(Christian Gentiles)이라 부를 것이다.
바울이 부활한 그리스도를 극적으로 체험한 후에는 그 자신도 이 운동에 가담했다. 비록 바울은 다마스쿠스 체험 이전부터, 예수의 추종자들에 대한 박해자가 되기 위해 예수에 관해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그가 예수의 사도(an apostle of Jesus)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예수운동에 참가한 사람들로부터 예수에 관해 더욱 많이 배울 필요가 있었다. 이런 배움의 과정은 우리가 당연히 예상하게 되는 것이며, 사도행전도 실제로 이 과정을 보도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바울은 크리스천 공동체들과 적극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지켜나갔다. 피터 버거(Peter Berger)가 지적한 것처럼, 사울이 바울이 된 것은 종교적 황홀경(ecstasy)의 순간이었지만, 바울이 계속해서 바울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크리스천 공동체라는 맥락 속에서만 가능했던 것이다. 사도로서의 그의 삶을 통해, 바울은 보다 큰 지중해 세계 속에서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예수운동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밝히려고 애를 썼다.
세 번째 동심원은 1세기 유대교이다. 예수와 마찬가지로 바울 역시 열렬한 유대인이었다. 유대인 성경(기독교인들에게는 구약성경)과 유대인들의 관습이 그의 인생과 사상을 형성했는데, 이것은 그가 예수의 추종자가 되기 이전에도 그랬으며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바울은 일생을 마칠 때까지도 자신을 유대인으로 생각했었지, 새로운 종교로 개종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바울의 유대교적인 맥락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 편지들의 상당부분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네 번째 동심원은 로마제국이다. 비록 이 맥락이 다른 맥락들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이 맥락은 가장 크며 가장 포괄적인 맥락이다. 바울과 그의 모든 공동체들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이 맥락은 단순히 바울의 시대와 장소에 관한 정보로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맥락이 중요한 것은 로마의 지배가 제국의 신학(an imperial theology), 즉 황제가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이며 주님(Lord)이며 구세주(Savior of the World)로서 지상에 평화를 가져다 준 분이라고 선포한 제국의 신학을 통해 합법화되었기 때문에 중요하다. 제국의 신학은 또한, 우리가 4장에서 살펴볼 것이지만, 평화와 정의는 군사적 승리와 제국의 질서를 통해 실현되었다고 선포했다.
여기서는 단지 바울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주님, 구세주라고 선포한 것은 로마의 제국신학을 직접적으로 맞받아친 것이라는 점만 지적하겠다. 예수의 추종자인 바울로서는, 예수 안에서 알려진 하나님이 주님이지, 황제가 주님이 아니었다. 이런 제국신학의 맥락에서 볼 때, 바울이 예수에 대해 가장 간결하게 증언한 것, 즉 “예수가 주님이다”라는 증언은 명백한 반역죄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바울이 예수처럼 결국 로마에서 처형당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런 네 개의 맥락 속에서 볼 때, 바울의 편지들 속에 나타난 많은 내용들이 빛을 내게 된다. 비록 어떤 구절들의 내용은 여전히 불확실한 채로 남아 있으며, 그 이유는 우리가 그 상황에 관해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바울이 때때로 애매하게 썼기 때문이거나 할 것이지만, 그의 진정한 편지들은 바울과 그의 메시지가 예수의 메시지와 뚜렷하게 일치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도록 해 준다. 바울의 메시지는 당시나 지금이나, 지상에서의 삶이 어떻게 새로워질 수 있으며 또한 새로워져야만 하는가에 대한 대안적인 비전(alternative vision)을 통해, 문명이 정상적인 것으로 여기는 현실(the normalcy of civilization)에 도전했다. 우리 두 사람이 확신하는 것은 급진적인 바울은 급진적인 예수(radical Jesus)의 신실한 추종자였다는 사실이다.
유대인 그리스도 신비주의자
이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 우리는 바울의 생애와 편지들, 그의 사명과 신학을 논의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바울에 관해 가장 중요한 기초적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즉 바울은 유대인 그리스도 신비주의자(a Jewish Christ mystic)였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신비주의자”라는 용어와 더불어 “신비적인” “신비주의”라는 용어에서부터 시작하겠다. 오늘날의 문화 속에서 이 용어들이 다양하고 애매한 함의를 갖고 있기 때문에 설명할 필요가 있겠다. 대중적인 용법에서 이 용어들의 가장 일반적인 함의는 간단히 무시해버릴 것을 가리킨다. 즉 어떤 것이 “신비적인 것처럼 들린다” 혹은 “신비주의처럼 들린다”라고 말하는 것은 당신이 그것을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막연하고, 희미하며, 근거가 없는 것, 아마도 저 세상적인 것이거나, 별로 상관이 없는 것을 가리킨다는 말이다.
그러나 학문의 세계에서는 이 용어를 무시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모호한 것을 가리킨다. 어떤 학자들은 이 용어를 매우 좁고 엄밀한 의미로 사용하지만, 또 다른 학자들은 매우 폭넓은 의미로 사용한다. 매우 좁은 의미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이 용어를 매우 드물며 매우 구체적인 종교 현상으로 이해한다. 그들은 유대교와 기독교 안의 신비주의를 성서 이후 시대에 발전된 것으로 이해하여, 성서 시대처럼 초기에 유래된 것에 대해서는 “신비적” 혹은 “신비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려 한다.
우리 두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