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VOLUTION OF MAN: RETHINKING WHAT IT MEANS TO BE A MAN
Copyright ⓒ 2019 by Phil Bar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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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루와 제이드, 클레멘타인에게.
여자들은 더 좋은 남자들이 있는 세상에서 살 자격이 있으므로.
이 책을 쓸 기회를 얻은 것은 큰 축복이었다. 책을 쓰면서 새로운 깨달음과 기쁨을 경험했다.
나는 여러 해 동안 <페어팩스 미디어>에 오늘날처럼 이상하고 끔찍한 시대를 살아가는 남자의 삶에 대해 ‘화성의 삶Life on Mars’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써오고 있다. 자살과 가정폭력, 음란물과 성차별, 남자들의 우정, 여성과의 관계에 대한 칼럼을 쓰면서 ‘남자다움’의 의미를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되었다.
나는 우리가 눈을 뜬 순간부터 마지막 숨을 헐떡일 때까지 남자로 살아가기 위해 ‘실천’하는 방식이 자신과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해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 눈물과 피,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있다.
이야기와 과학이 들어 있는 이 책에서 내가 어떻게 언뜻 듣기에는 매우 극단적으로 여겨지는 견해를 갖게 되었는지를 독자에게 설명할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다루는 어려운 주제에, 물론 웃을 일은 아니지만, 가벼운 터치를 추가함으로써 균형을 잡기로 마음먹었다. 언론,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 보낸 오랜 세월은 가장 진실한 이야기가 언제나 최고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그래서 개인적인 일화를 포함하기로 했다. 이제, 놀랍고 또 두렵게도, 어떻게 하면 더 나은 남자가 될 것인지에 관한 주장과 논의에 기묘한 형태의 회고록이 얽혀들게 되었음을 본다.
당혹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부모님, 그리고 딸과의 대화가 필요했다. 지난날에 대하여, 또 지금의 우리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큰 기쁨을 얻었다.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은 결코 잊지 못할 경이롭고 풍부한 대화로 이어졌다.
한 가지 경고해두려 한다. 이 책에는 끔찍하게 신성모독적인 표현이 나오므로, 독자가 신앙인이라면 유의하기 바란다. 비판적 사고에 활기를 불어넣어 격려하려는 것 말고 다른 의도는 없었다. 그리고 유머란 주관적인 것이므로 독자가 동굴인이나 예수와의 대화를 즐기지 않는다면 사과드린다.
나는 과학, 철학, 자동차, 음식, 음악, 책, 대중문화······ 그리고 사랑 등 개인적 열정이 이야기를 끌고 나가도록 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아는 것을 써야 한다는 사람들의 말은 옳다. 때로 주제에서 멀리 벗어나 매혹적으로 보이는 대상을 탐구하기도 했다. 독자도 나와 함께 이런 흥미로운 이야기를 즐길 수 있기를 조심스럽게 소망한다.
남자는
울지
않는다?
어린 소년들에게는 남자가 되는 길로 가는 첫발을 내딛기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메아리치는 말이 있다. 짧은 한마디이지만 거기에 담긴 설득력 강한 메시지는 사회 구석구석까지 울려 퍼져서 남성, 여성, 아동을 불문하고 그 폐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가정폭력, 자살, 소외, 고립, 우울증, 분노, 약물과 알코올 남용, 인간관계의 붕괴와 견딜 수 없는 외로움 등 모든 것이 이 말로 표현되어 심각한 피해를 유발하는 이상ideal의 직접적인 결과다.
‘남자다워라be a man.’
약점을 보이지 마라. 분노를 제외한 어떤 감정도 드러내면 안 된다. 울지 마라. 연약하면 안 된다. 계집애처럼 굴지 마라. 감상적인 사람이 되지 마라. 동성애는 안 된다. ‘여성적인’ 남자가 되지 마라. 도움을 청하지 마라. 모든 관계를 주도하라. 소방관, 조종사, 운동선수, 업계의 리더, 보스, 극기하고 베푸는 사람이 되어라.
이런 것들이 ‘남자다움’이라는 말의 의미인 듯하다.
우리는 학교에 가기 전부터, 축구팀에 들어가기 전부터, 형제와 사촌, 교사, 코치와 보스들이 속삭여주는 지혜를 접하기 전부터, 손위 아이들의 자랑스러운 ‘남자다움’을 보기 전부터 이러한 말을 듣기 시작한다. 이미 그보다 훨씬 전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이런 일은 아기가 부모와 눈을 맞추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아기의 성별을 모르는 어른은 성 차이에 관한 자신의 편견을 적용하여 어린 ‘사내아이’와 ‘여자아이’를 다르게 취급한다는 사실을 수많은 연구 결과가 보여준다. 실제로는 여자아이라는 것을 모르는 상태에서 어른들은 ‘사내아이’가 더 성을 잘 내고 다루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여자아이’는 더 명랑하고 타인과 잘 어울린다고 믿었다.
한 연구 결과는 아들을 둔 어머니가 어린 아들이 기어 내려올 수 있는 경사로의 각도를 1도 이내의 오차로 맞출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1 반면에 어린 딸을 키우는 어머니의 예측은 9도나 빗나갔다. 사내아이는 기어 내려올 수 있지만 여자아이는 그럴 수 없다–하지만 11개월 된 사내아이와 여자아이가 운동능력에서 차이가 없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사내아이는 여자아이보다 어른이 안아주는 빈도가 낮으며 보챌 때 달래주는 시간이 짧다. 문제나 퍼즐을 해결하는 데도 도움을 적게 받는다.
어린 소년의 삶에는 중요한 순간이 온다. 그때까지는 넘어져 무릎이 까질 때마다 어른이 일으켜주고, 키스와 함께 소동이 끝날 때까지 달래주었다. 이제 다시 무릎에서 피를 흘리는 소년은 울면서 부모를 바라본다. 그러나 이번은 다르다. 포옹도 키스도 없다. 힘주어 어깨를 잡은 두 손과, 눈을 들여다보는 응시뿐이다.
“괜찮아. 부러진 데는 없어. 씩씩한 아이가 되어야지. 씩씩한 아이는 울지 않아.”
소년이 눈물과 콧물을 억제하고, 지금까지는 언제나 고통과 눈물이 사라질 때까지 안아주었던 사람이 자신을 배신했다는 놀라움을 극복해내면 칭찬이라는 보상이 주어진다.
“그래야 씩씩한 아이지! 그만 울고. 이제 가서 이 트럭 가지고 놀아······.”
소년의 삶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인 부모로부터의, 어린 남자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 얼마나 강력한 메시지인가.
“넌 여섯 살이야. 훌쩍거릴 때는 지났지, 친구.”
이런 이야기는 심리학 입문 과정의 주제가 될 만하다. 심리학 학위과정을 밟고 있는 딸에게 부모가 아이들과 어떻게 어울려야 하느냐고 묻자 딸은 눈을 치켜뜨며 이렇게 말했다.
“작년에 그 주제를 공부했어요. 음, 누구나 아는 얘기죠.”
나중에 딸은 코넬 대학의 존John과 산드라 콘드리Sandra Condry 부부가 수행한 「성 차이 : 보는 사람의 생각에 관한 연구Sex Differences: A Study of the Eye of the Beholder」라는 연구논문을 이메일로 보내주었다. 1976년에 수행되었음에도 여전히 주목할 만한 연구다.
논문의 저자들은 ‘우리가 흔히 보리라고 기대하는 것만 보게 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으며 진부한 이야기로 받아들여진다’고 말했다.
‘우리는 보통 자신이 본다고 생각하는 것에 기초하여 행동한다. (중략) 우리의 행동이 아이들을 향할 때는 양상이 더욱 복잡하다. 아이들은 흔히 어른이 자신에게 하는 행동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관한 답을 찾으려 한다. 따라서 아이들에 대한 어른의 행동에는 현실 정의reality-defining라는 특성이 부여된다.’2
딸이 쥐를 무서워할 것으로 생각하는 어머니는 쥐를 보고 깜짝 놀라는 딸의 반응을 두려움으로 해석하고 그에 따라 행동할 것이다. ‘따라서 아이의 감정과 그에 따른 적절한 행동을 정의하게 된다. 아이가 이러한 정의에 호응하고 어른의 지지를 얻게 되면, 이렇게 상호작용을 통해서 전파된 특성이 일상적인 행동 목록의 일부가 될 수 있다.’
40년 이상 지난 논문에서 콘드리 부부는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어른들이 단지 그런 방식으로만 성 차이를 부추길 수 있었을까?’
그들은 204명의 남녀 참여자에게 한 유아의 서로 다른 네 가지 자극에 대한 정서적 반응을 평가하도록 했다. 참여자들 중 절반은 관찰 대상 유아를 사내아이로, 나머지 절반은 여자아이로 알도록 했다. 콘드리 부부의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유아에게 부여된 성별, 평가자의 성별, 그리고 어린 아동에 대한 평가자의 경험 정도에 따라 특정한 상황에 처한 유아가 느끼는 감정과 정서적 흥분상태가 매우 다르게 판단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평가 대상 아동의 성별을 알고 있는 관찰자들에게서 얻어진 성 차이에 관한 연구 결과를 해석하는 데 적절한 주의가 요구된다는 점을 시사한다.’
따라서 우리가 아이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그들을 의사전달자로 생각하는지, 신체적으로 튼튼하다고 생각하는지, ‘강인’하다고 생각하는지 아닌지–가 아이들과의 모든 상호작용을 결정하며 그들을 위하여 만들어내는 경험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모든 경험은 아이들의 말랑말랑하고 어린 뇌에 자국을 남기고 그들이 어떤 성인으로 자라나게 될지를 결정한다.
불과 4개월만 되어도 남아와 여아는 부모와 눈을 맞추는 빈도, 언어적ㆍ정서적 표현능력(이는 모두 부모와의 상호작용에 직접 의존한다)에서 정량화할 수 있는 차이가 나타난다.
신경과학자 리즈 엘리엇Lise Eliot은 『분홍색 뇌와 파란색 뇌Pink Brain, Blue Brain』라는 책에서 아이들이 한 살만 되어도 이미 자신의 성별을 인식하고 강한 정체성을 느끼며, 손위 소년소녀들이 대부분인 주변인의 행동 방식을 보면서 빠르게 순응한다고 말한다.
‘취학 전 아동은 이미 또래에게 무엇이 용인되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를 안다.’3
‘파랑’과 ‘분홍’이라는 아이디어는 소년소녀들에게, 잠재적 가능성을 실현할 기회를 박탈하고 원래의 가능성보다 작고 불완전한 사람이 되도록 강요하는, 자기 충족적 예언의 순환 고리를 만들어낸다. 엘리엇은 ‘아이들은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비상하기도 하고 추락하기도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아들은 다소 말이 서툴고 정서적으로 소외되게 마련이라는 믿음은 사실이 되고, 소년을 말이 서툴고 정서적으로 소외된 청년으로 만들어간다.
파랑은 소년에게, 분홍은 소녀에게 맞는 색깔이라는 생각조차도 부활절 토끼나 산타클로스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유전자에 숨어 있는 선천적 선호의 결과라기보다 현대의 대중 시장이 만들어낸 것이다. Y염색체가 페니스가 자라도록 하는 원인은 될 수 있지만, 아직까지 과학자들은 소년이 분홍색 드레스보다 파란색 반바지를 선호하도록 결정하는 유전적 표지를 찾아내지 못했다.
분홍색과 관련하여 오스트레일리아의 위대한 권투선수 토니 매디건Tony Madigan과 뉴사우스웨일스 주의 전설적인 공갈범이자 해결사였던 팀 브리스토우Tim Bristow가 등장하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매디건은 올림픽에 세 차례 출전했고, 럭비선수로도 뛰었으며, 런던에서 잠시 모델로도 일했다. 코먼웰스 게임(4년마다 개최되는 영연방 국가들 간의 종합 스포츠 대회-옮긴이)에서 두 개의 메달을 땄으며, 무하마드 알리와 한 번 이상 링에서 대결한 열 명의 권투선수 중 한 명이었다. 그는 2017년에 8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브리스토우 역시 보기 드문 인물이다. 그는 크리스마스 햄처럼 크고 화강암처럼 단단한 주먹과 로저 램젯Roger Ramjet(1965년부터 미국에서 방영된 TV 만화영화 시리즈의 주인공-옮긴이) 같은 턱을 가진 거한이었다. 구글에서 사진을 검색해보면, 브리스토우보다 더 무시무시한 악당으로 보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가 현관에 나타났다면 당신에게 아주 큰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이야기는 시드니의 뉴포트 암스 호텔에 있는 펍pub에서 브리스토우가 매디건의 친구를 때린 사건에서 시작된다. 빠르게 소식을 접한 매디건은 즉시 그 펍으로 가서, 그때까지 만난 적이 없었던 브리스토우가 자신에게 덤벼들기를 기다렸다.
매디건은 어떻게 브리스토우의 주의를 끌었을까? 분홍색 옷을 입고 갔다. 브리스토우는 분홍색 옷을 걸친 남자의 모습에 격분한 나머지 매디건을 모욕하고 공격했다. 그러자 매디건은 브리스토우를 손쉽게 ‘때려눕혔다’고 전해진다. 브리스토우가 유일하게 제대로 두들겨 맞은 사건의 주인공은 분홍색 옷을 입은 남자였다.
색깔이 무엇인지 이해하기도 전에–심지어 제대로 보지도 못할 때부터–우리는 말 그대로 미래의 성 정체성을 알려주는 포대기에 싸여 지낸다.
<언쇼스 인팬츠 디파트먼트Earnshaw’s Infants’ Department>(미국의 어린이 패션 잡지-옮긴이)의 1918년 6월호는 이 문제에 관한 견해를 명확히 밝혔다.
‘남아는 분홍색, 여아는 파란색이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용인되는 원칙이다. 더 확실하고 강렬한 색인 분홍은 남아에게 적합하며, 섬세하고 얌전한 색인 파랑은 여아에게 적절하기 때문이다.’
아동 의류는 여러 세기 동안 성 중립적이었다. 여섯 살 무렵이 될 때까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예쁜 흰색 겉옷을 입었다. 사내아이는 파란색, 여자아이는 분홍색이라는 생각이 대세를 이룬 것은 미국에서 1940년대가 되어서였다.
태어날 아이의 성별을 부모가 미리 알도록 해주면서 과학계도 거들기 시작했다. 아동 의류업계의 마케팅 부서는 엄마 아빠들이 아기의 방을 사전에 정확하게 준비할 수 있도록 시장을 분홍팀과 파랑팀으로 나누었다.
사내아이는 트럭과 트랙터, 총과 칼, 조립식 장난감을 좋아하고 여자아이는 인형의 집을 가지고 놀거나 굽이 높은 플라스틱 구두를 신고 그에 어울리는 핸드백을 든 채로 힘겹게 걷는 흉내를 내는 것 같은 ‘사회적’ 놀이를 선호한다는 관념 또한 잘못된 생각이다. 당신은 심지어 어린 딸에게 냄비, 프라이팬, 앞치마, 그리고 고무로 만든 베이컨과 달걀까지 갖춘, 작은 부엌 장난감 세트를 사줄 수도 있다. 여섯 살까지의 여아에게 적합하다고 광고되는 이런 것을 지금 당장 장난감 가게에서 구할 수 있다.
아동용 제품의 시장을 성별에 따라 꾸준히 분리해온 마케팅의 홍수에 직면한 부모들은 무력하다. 한 세대 전체가 소년소녀들에게 무엇이 ‘적절’한지에 관하여 마케팅 담당자에게서 훌륭한 교육을 받아온 셈이다. 이런 생각이 우리의 집단적 의식에 너무나 깊이 스며든 나머지 과학적 근거가 없는 성 차이에 관한 믿음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에 관한 확고한 ‘지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친구 집의 바비큐 파티에 갔다고 상상해보자. 한 부부가 귀여운 다섯 살배기 아들 브라이언을 데리고 왔다. 브라이언은 오늘의 나들이를 위해서 분홍색 드레스와 거기에 어울리는 신발을 선택했다. 긴 금발머리는, 켄(바비 인형 장난감 세트에서 바비의 파트너-옮긴이)과 함께 캠핑카를 타고 해변으로 가도록 할 때 말고는 한시도 손에서 놓지 않으려 하는 그의 바비 인형을 꼭 닮은 스타일이다. 이제 다른 손님들이 주방이나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속삭이는 대화를 상상해보자.
“세상에, 그 불쌍한 아이를 봤어?”
“왜 계집애 같은 옷을 입혔을까?”
“걔가 설마, 벌써 게이 같은 건 아니겠지?”
“걔는 인생을 망치게 될 거야.”
설사 불쌍한 어린 브라이언이 어른들의 비웃음과 당혹감을 눈치채지 못한 채 하루를 보냈더라도 또래들의 생각을 알아채지 못할 수는 없다. 아이들에게 자신의 드레스와 인형을 설명한 지 5분도 지나지 않아서, 틀림없이 어린 사내아이에게 가해질 수 있는 최악의 모욕적 언사를 듣게 될 것이다. ‘너는 계집애야!’ 다음에는 반바지와 티셔츠를 입게, 친구. 남자가 되라고.
‘잘못된’ 옷을 입고 ‘잘못된’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아이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대단히 충격적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임의적인 성별 규범–사실상 불과 수십 년밖에 안 되었고 시장의 힘으로 강요된–을 무시하려는 아이가 충격적이어야 한다는 사실 자체일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이 우리의 집단의식에 미치는 영향은 너무나 강력해서, 선동가들은 이를 불순한 의도를 품은 캠페인에 이용하려는 유혹을 떨치지 못한다. 2017년 전국적인 우편투표 계획이 공표된 후에 동성결혼에 관한 논쟁이 불붙었을 때 결혼수호연대Coalition for Marriage는 동성결혼을 ‘반대’하는 TV 광고를 시작했다.
아들을 둔 엄마인 셀라 화이트Cella White는 깊은 우려를 나타내는 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면서 끔찍한 소식을 전한다. ‘학교에서 우리 아들에게 내년에는 원한다면 드레스를 입을 수 있다고 했다.’ 그녀는 마치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소구경 총기를 지급하고 MDMA(‘엑스터시’로 더 잘 알려진 환각제-옮긴이) 사용에 관한 규제를 완화하기라도 한 것처럼 무서운 표정으로 말한다. 문제의 학교인 프랭크스턴 고등학교는 그런 발표를 한 사실이 전혀 없다고 밝혔다. 화이트 부인은 그런 생각이 자기 자식들의 ‘사고방식’을 ‘왜곡’한다4고 공식적으로 말했다.
동성결혼을 반대하는 광고는 뿌리 깊은 동성애혐오증을 내포한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동성결혼이 허용되면 남학생이 학교에서 드레스를 입어도 되는 일이 뒤따를 것이 분명하고, 머지않아 모두 게이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면 어떤 세상이 오겠는가?’
결과적으로 남학생이 학교에서 드레스를 입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모두 게이가 되지도 않았다. 그리고 거의 3,000쌍에 이르는 사람들이 수십 년간 거부된 인간적 권리를 되찾아, 진정으로 사랑하는 상대와 결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토록 열렬히 동성결혼에 반대했던 사람들은 이제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다! 그들은 자신이 예언했던 공포가 실현되지 않은 데 대한 기쁨이라도 표현해야 하지 않을까?
TV와 공중광고를 통한 동성결혼 ‘반대’ 광고는 성별에 관한 고정관념을 강화하려고 두려움을 이용하는 수많은 시도 중 하나다. 광고를 본 젊은이들은 일상적으로 두뇌에 주입되는 근거 없는 신화와 오해에 광고의 메시지를 추가했다. ‘남자는 드레스를 입지 않는다’와 ‘게이는 나쁘다’라는 관념이 단 30초짜리 광고에 깔끔하게 담겨서, 가장 영향력 강한 로비 집단인 교외에 거주하는 엄마들의 우려 섞인 말로 표현된다.
2017년 <청소년 건강 저널>에서 발표한 연구보고서는 성별에 따라 구분된 역할과 고정관념이 성인기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인 피해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5
5개 대륙의 다양한 문화권에 속한 아동 450명을 대상으로 수행된 연구에서 학습되고 격려되고 강요된 성적 역할이 궁극적으로 임금격차, 가정폭력, 정신건강 문제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연구자들은 모든 문화권에서 청소년에게 ‘성별 구속복gender straitjacket’을 입히고 있으며, 이는 평생에 걸쳐 건강에의 위협이 증가함과 연결되는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연구팀을 이끈 메릴랜드 주 존스홉킨스 대학의 로버트 블럼Robert Blum은 ‘우리는 전 세계적으로 10세 아동들에게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사내아이는 강하고 자신 있는 리더인 반면에 여자아이는 약하고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조용히 순종해야 한다는 근거 없는 신화의 보편성에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뉴욕에 있는 거트마커 연구소Guttmacher Institute의 세라 키오Sarah Keogh는 ‘우리는 흔히 청소년들이 상당히 성숙한 시기에 성적 규범을 제시하여 그들의 건강에 부정적 영향을 미쳐왔다. 이 연구는 성별의 사회화가 그보다 훨씬 더 일찍 시작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블럼에 따르면 고정관념을 바꿀 수는 있다. 그는 유럽과 북미에서 성차별에 맞서 싸우고 있는 변화된 태도와 법률을 언급했다. 그러나 이런 싸움을 위해서는 근거 없는 성차별적 신화가 언제 어떻게 뿌리내렸는지를 알아야 한다. 블럼은 성적 고정관념에 노출되는 일이 유아기부터 시작된다고 말하면서, ‘하지만 청소년기 초기가 개입하기에 이상적인 시기일 수도 있다’고 덧붙인다.
소년들은 학교생활을 시작하면서 이미 ‘남자다움’이 무슨 뜻인지에 대한 매우 분명한 생각을 갖게 된다. 우리 앞에는 모든 행동을 주의 깊게 지켜보며 성별 규범을 조금이라도 위반하면 처벌에 나서는 또래들, 이기는 자만이 진정한 남자이므로 어떻게 해서든 이겨야 한다고 가르치는 리더와 멘토, 돈ㆍ자동차ㆍ여자친구를 갖고서 남자가 되는 방법을 확실히 알고 있는 어른들이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속삭여지는 충고와 무언의 본보기를 통해서 매일같이 성차별적 규범을 보고 듣는다. 누구든지 남자다움에 관한 나름의 견해를 갖고 있다.
소셜 미디어와 광고도 한몫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인스타그램에서 영향력 있는 남성을 찾아보거나 남성 독자를 겨냥한 웹사이트를 살펴보면, 남자다워지는 데 필요한 것들의 목록에 다음 항목을 추가할 수 있다. 남자는 키가 커야 하고, 탄탄한 복근을 가져야 하고, 스포츠카를 몰아야 하고, 방금 섹스를 했거나 막 시작하려는 것처럼 보이는 수영복 모델의 어깨에 큼직한 손목시계를 찬 팔을 두른 모습으로 비싼 호텔에 묵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비싼 여행용 가방과 양복, 멋진 헤어스타일이 필요하다. 풍성하고 잘 손질된 턱수염이 없는 남자는 남자라고 말할 수도 없다.
남자다움이라는 개념은 나 자신의 삶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나는 뉴질랜드의 시골 농장에서 자랐는데, 주변에 남자다움이 넘쳐흘러서 헤쳐 나가려면 특별한 부츠를 신어야 하는 곳이었다.
내가 아홉 살쯤 되고 동생 앤드루가 다섯 살이 되어가던 무렵의 일이 기억난다. 우리는 농장에서 키우는 양의 털을 깎는 흥미진진한 연례 작업이 진행되는 헛간에서 놀고 있었다. 나는, 몸에서 지난밤에 마신 맥주 냄새가 풍기고, 땀을 철철 흘리면서 허리를 굽힌 자세로 여덟 시간 동안 300마리에 달하는 양의 털을 깎는 ‘전문가’들이 일하는 모습을 놀라움에 찬 눈길로 지켜보곤 했다. 이들에 따르면 토할 때까지 술을 마시고, 8기통 엔진이 달린 차를 몰고, 되는 대로 많은 영계를 올라타는 것이 남자다워지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의 목록에서 빠질 수 없었다. 그리고 강인해야 했다. 대단히 강인해야 했다. 고통을 호소하고 징징거리는 것은 게이 놈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나는 올라타는 것이나 게이 놈들이 뭔지는 몰랐지만, 하나는 좋고 하나는 나쁘다는 것은 확실히 짐작할 수 있었다.
동생은, 우리가 ‘서키Sucky’라고 부른, 담요를 잘라 만든 천조각을 어디든지 갖고 다니는 버릇이 있었다. 서키를 씌운 엄지손가락을 빠는 일이 동생의 위안거리였다. 어머니가 빨래하려고 동생의 작은 손가락에서 조심스럽게 서키를 빼내면, 서키가 탈수기에서 나올 때까지 앤드루의 눈에서 비탄과 고통의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나는 머지않아 동생이 나와 같은 학교에 입학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내 생각에, 앤드루가 서키를 가지고 학교에 나타나는 것은 결단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동생이 나의 남자다움을 깎아내릴 거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일이 똑똑히 기억난다. 진정한 남자는 서키 같은 것을 빨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헛간에서는 ‘잡역부’들이 깎아놓은 양털을 뭉치로 포장했다. 유압장치가 양털 무더기를 포장재 속으로 내리누르면 잡역부들이 재빨리 탱탱한 양털 뭉치의 윗부분을 손으로 꿰매어 붙였다.
나는 계획적으로, 마지막 양털 무더기가 포장재 속으로 들어가고 유압장치가 내려오기 전에 동생의 서키를 빼앗아 양털 속으로 던져버렸다. 앤드루의 울부짖음은 개, 양, 작업자들의 고함, 양털 깎기 기계의 소음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동생이 히스테리에 빠져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려고 꽉 붙잡고 있었던 것까지 기억난다. 잡역부가 윗부분을 꿰매고 유압장치가 올라간 후에 양털 뭉치에는 목적지로 보내기 위한 표지가 찍혔다.
마침내 휴식 시간이 되어 작업을 멈추자 앤드루의 울부짖음이 아버지의 주의를 끌었다. 나는 동생이 서키를 빨고 다닐 나이는 지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기쁘고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죄를 고백했다. 옳은 행동이었다고 확신했다. 강인한 사랑–동생도 이제는 강인해져야 할 때가 되었다. 완성된 양털 뭉치를 다시 해체하여 서키를 꺼내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일은 그렇게 끝났다. 모두가–앤드루만 빼고–같은 생각이었다. 약간의 트라우마를 초래할 수는 있었겠지만, 결국에는 동생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오래전에 있었던 작은 사건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동생과 나는 그날의 모든 순간을 기억한다. 감정은 기억을 만들어낸다.
물론 동생은 당시의 시련을 극복했으며 창조적이고 뛰어난 교육자이자 열린 마음으로 사랑을 베푸는 아버지와 남편이 되었다. ‘서키 이야기’는 집안의 전설이 되었다. 그런데 이 사건의 이면에는 언제가 되었건 당신 주변의 누군가로부터 남자답게 행동하기 시작하라는 요구가 어떻게 주어지는지에 대한 훌륭한 본보기가 있다. 청년들은 매일같이 남자다움에 대하여 조금씩 배워나간다. 어떤 행동이 적절하고 어떤 행동이 그렇지 못한지를 배우는 것이다.
몇 년 뒤에 나는 남성성의 궁극적 용광로라 할 수 있는 운동 경기장에서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남자다움의 단련을 받게 되었다. 뉴질랜드 럭비협회의 일원이 된 것이다.
남자다움의 핵심 요소 중 하나는 타인보다 신체적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다. 더 강인하고 덩치가 크고 근육질일수록 타인에게 물리적으로 자신의 의지를 강요하고 더욱 남자답게 보일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열여섯 살이었던 나는 어린 나이로 성인 팀의 일원이 되었다는 달콤한 자기만족을 느꼈다. 가장 남자다운 스포츠에서 어른들을 상대하는 소년이었다. 남자다움을 증명하고 있다는 만족감이 너무나 강렬했던 나머지 향후 몇 년 동안에도 이런 방식으로 자신을 정의하고 싶었다. 나는 남자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싸웠고 결단코 포기하지 않으려 했다.
힘없는 겨울 해가 매서운 바람과 지면을 때리는 차가운 빗줄기에 맞서기를 포기한 어느 주말 저녁이었다. 럭비 연습을 끝낸 후에 팀 동료 돈과 함께 벤치에 앉아 있었다. 돈은 키가 크고 체격이 탄탄한, 강하고 공격적인 선수였다. 달아올랐던 몸이 식어가는 동안 우리는 그날의 연습에 관해 얘기를 나누었다. 돈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말을 멈추고 한참 동안 먼 곳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린 그의 얼굴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돈이 말했다.
“난 럭비가 싫어. 럭비는 고통스러워. 그리고 언제나 지독하게 춥지. 다른 사람들을 다치게 하는 것도 정말 싫고. 거지 같은 운동이야. 다시는 럭비를 하고 싶지 않아.”
나는 충격에 빠졌다. 도대체 어떻게 스포츠 능력이라는 남자다움의 성배에 손을 얹은 사람이 그것을 던져버리고 싶을 수가 있을까?
그리고 눈물은? 돈은 연약함이라는 신성모독을 인정한 것뿐만 아니라 사내답지 못하다는 면에서도 유죄였다. 창피한 광경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을까 두려워서 주위를 둘러본 기억이 난다. 친구였으며, 똑똑하고 감성적인 좋은 녀석이었지만, 나는 최대한 빠르게 돈의 곁을 떠났다. ‘여성적 나약함’이 나에게 전염될까 두려웠거나, 더 나쁘게는, 그의 행동이 게이 성향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돈의 아버지 노먼은 지역 정계에서 잘 알려진 투사형 정치인이었다. 그는 뉴질랜드에서 16세 이상 남성 간의 합의된 성관계를 합법화한 1986년의 ‘동성애 관련법 개정’에 격렬히 반대한 것으로 명성을 얻었다. ‘남부의 입’이라는 별명을 얻은 그는 “돌아서서 그들을 보시오. 시선을 고정하고. 당신은 지옥을 보고 있습니다. 너무 오래 쳐다보지는 마시오. 에이즈가 옮을 수도 있습니다”6라고 말했다.
따라서 돈이 자라난 환경에서는 자신이 참여하는 스포츠의 미래에 관하여 열린 마음으로 공감하면서 애정 어린 대화를 통해 품위 있게 그 스포츠를 포기한다는 결정을 내리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의 앞에는 남자다운 영광으로 가는 길이 펼쳐져 있었으며,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 나는 그렇게 마음을 터놓기까지 돈이 겪었을 고통의 깊이를 이해한다. 그리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도 깨달았지만, 당시에는 그러지 않았다.
돈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그의 말을 경청하고, 공감을 나타내고, 이해한다고 말해주었어야 했다. 어쩌면 나 또한 비슷한 생각이라고 고백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추위, 탈진 상태, 육체적 고통, 부상,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겨야 하는 물리적 다툼의 철저한 야만성······ 그 모두가 실제로 끔찍했다.
마음 한구석으로 이런 진실을 인정하면서도 나는 그의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당시에는 스포츠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생각과 그로 대표되는 모든 것이 그저 낯설었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이었다.
돈은 혼자만의 지옥 속에서 남은 시즌을 힘겹게 견뎌냈다. 대학교와 남성성의 흥미진진한 다음 단계가 우리를 유혹하듯 열리면서 돈과의 연락은 끊겼지만, 그가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낸 순간은 지금까지도 기억난다. 남자들이 취약하고 감정적이며, 흔히 스스로 만들어낸 정적 속에서 고통받는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언뜻 보게 된 경험이었다.
<시드니 모닝 헤럴드>에 ‘플라토닉 터치로부터 고립된 것이 현대 남성성의 비극이다’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글에서, 어린 아들을 둔 페미니스트 작가 클레멘타인 포드Clementine Ford는 변한 것이 별로 없다고 주장했다.
‘나는 남자들이 서로 남성성의 표현을 압박하는 방식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남자들–특히 젊은 남자들–이 남자다움의 진위가 의심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서로 간에 신체적으로 표현되는 정신적 사랑의 기쁨을 포용하지 못하도록 길들어 있다는 사실이 특히 슬프게 느껴진다.’
이는 바로 예로부터의 ‘동성애는 안 된다’는 규범이다. 아무리 사랑하더라도 친구를 만지면 안 된다. 남자는 엄격한 이성애의 평판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좋은 남자 프로젝트The Good Men Project’ 등의 웹사이트에 정기적으로 남성 문제에 관한 글을 올리는 미국 작가 마크 그린Mark Greene은 남자답게 행동하려는 열망이 신체적ㆍ정서적 고립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한다. 그는 ‘터치의 결핍이 어떻게 남자들을 파괴하는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성은 훨씬 더 자유롭게 서로 간에 신체적 접촉을 나누는 데 반해, 남성은 타인과의 신체적 접촉에 의구심을 갖는다.7 우리 문화에서 유일하게 남성의 장기적인 신체 접촉이 허용되는 공간은 아버지와 어린 자녀 간의 공간이다.
그런 상황에서 남자들은 어떻게 되는가? 신체적ㆍ정서적으로 고립된다. 스트레스를 줄여주고 자긍심을 북돋우며 공동체의식을 함양하는 것이 입증된, 지극히 인간적인 신체 접촉에서 차단되는 것이다. 그 대신에 단절의 사막과도 같은 도시의 거대한 군중 속을 홀로 걷는다. 신체적 접촉에 굶주린 채로. 우리는 터치를 갈망한다. 하지만 터치에서 차단되었다. 그 결과는 터치가 없는 고립이다.
편안하게 타인과 연결될 수 있는 능력의 부재로 인하여 남자들은 우울증과 알코올중독, 자살의 유혹에 취약하고, 좌절감과 분노를 느끼는 무능력한 가정폭력범이 되기 쉽다.
실제로 이것은 신체적 접촉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측면에서의 성공적인 소통에 관한 문제다. 극기하고 자립심을 가져야 한다는 엄격한 요구 때문에 우리의 정서적 지형은 오직 자신만이 경험할 수 있다. 이는 물샐틈없는 벽으로 이루어진 상자 안에 갇혀서 살아가는 것과 같다. 그 상자의 벽은 다른 남자, 여자, 부모, 친구, 파트너,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이 제어하는 남자다움이라는 가식의 댄스로 쌓아올려져 있다.
‘맨박스Man Box’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삶에서 남성성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보여주기 위해, 전 세계적으로 소년과 성인들의 집단 활동에서 사용해온 개념이다. ‘화이트 리본 오스트레일리아White Ribbon Australia’ 캠페인은 ‘남성성의 재정의’를 목표로 하는 집단 교육에 맨박스라는 도구를 이용한다. 내가 알기로, 이 개념의 기원은 폴 키벨Paul Kivel이 1998년에 출간한 책 『남자의 일Men’s Work』8에서 찾아볼 수 있다.
키벨은 캘리포니아에서 30년 넘도록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을 방지하는 교육과 활동을 벌여온 단체 ‘오클랜드 남성 프로젝트Oakland Men’s Project’도 이끌어왔다. 키벨과 동료들은 이런 활동을 통해 맨박스의 개념을 개발하고 다듬었다.
미국의 성교육자이자 워크숍 강사인 작가 찰리 글릭먼Charlie Glickman은 15년간 남성을 대상으로 한 교육에 맨박스를 사용해왔다. 그는 맨박스를 ‘남자같이 연기하라Act Like a Man’ 상자로 부르기를 선호한다. 항상 남자다움을 가장하는 일은 평생 지속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글릭먼은 서구에서 출생한 남자들의 반응이 연령, 주변 환경의 성별 혼합, 성적 취향, 인종적 구성과 상관없이 놀라울 정도로 한결같다고 주장한다.
글릭먼의 피교육 그룹이 완성한 전형적 맨박스를 소개한다. 그룹의 구성원이 어디에 살고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청년들이 맨박스에 집어넣으려고 선택한 항목들은 놀라울 정도로 한결같았다.
진정한 남자는 ‘키가 크고 강하고 근육질이고 나이는 25~45세’이며(나는 이제 진정한 남자가 되기엔 너무 늙었다는 뜻이다!), ‘몸이 튼튼하고 이성애자이며 경쟁심이 강하고 지배적이다’. 그는 ‘경찰관, 소방관, 정비사, 변호사, 사업가 또는 CEO’다. 그는 ‘유능한 관리자이며 리더’다. 그는 ‘술을 마실 줄 알고, 스포츠에 참여하거나 관전하는 것을 좋아하며, 친구들과 어울려 시간을 보낸다’. 늘 그렇듯이 그는 ‘분노와 흥분’ 외에는 어떠한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극기적이고 폭력적’이다. 우리의 영웅은 ‘항상 섹스를 원하고, 많은 섹스 상대가 있으며, 섹스란 운동경기에서 점수를 올리는 것처럼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그는 ‘원할 때면 언제나 단단한 발기 상태를 유지하는 큼직한 페니스를 갖고 있다’. 또한 ‘항상 상대가 오르가슴 또는 다중 오르가슴을 느끼게 해줄 수 있고 자신이 원할 때 사정한다’. 그의 성생활은 ‘성교, 구강 섹스를 받는 것, 가능한 경우에는 항문 섹스(주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주는 것’이라는 말에 쳐놓은 괄호를 주목하라. 당신은 그 방에서 벌어지는 장면을 상상할 수 있다. 진짜 남자라면 줄 수는 있어도 받을 수는 절대로 없다. 항문 섹스를 열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동성애자나 할 짓이며, 맨박스에서 멀리 떨어진 어딘가의 향기로운 초원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교육에 참여한 사람들은 ‘진정한 남자’에게 필요한 특질의 목록을 완성한 후 상자 안에 있는 항목에 속하지 않는 남자를 묘사하는 단어를 말해보라는 요청을 받는다. 상자 밖에 있는 사람을 묘사하는 말은 다음과 같다.
‘게이, 동성애자, 계집애 같은 사내, 겁쟁이, 암캐, 루저.’
맨박스의 특징은 반드시 상자 안에 있거나, 아니면 밖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입구에 한 발만 걸칠 수는 없다. 맨박스는 완벽한 실천과 함께 누군가가 손가락질하면서 계집애 같은 남자라고 하지 않도록 끊임없는 경계를 요구한다.
상황은 갈수록 악화된다. 상자 안에는 모두를 위한 공간이 충분치 않다. 계층이 존재한다. 바닥에 있는 사람은 쫓겨날 수도 있다. 남자다운 행동을 하면서 서로 경쟁해야 한다. 각자가 점점 더 남자다운 방식을 보여줌에 따라 주변에 있는 사람도 더욱더 공격적인 모습을 보여야 한다.
맨박스 안에 남으려는 투쟁은 벽을 통과하는 데 성공한 사람들에게도 심각한 피해를 초래한다. 소통, 공감, 우정, 열린 마음,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능력 같은 것은 모두 상자 밖에 있다. 상자 안에서 허용되는 표현은 분노와 약간의 성적 공격성이 전부다.
상자 밖에는 크고, 강하고, 쿨하고, 잘생기고, 똑똑하고, 부유하고, 섹시하고, 잘나가고, 카리스마 있는 ‘진짜’ 남자의 이상에 부응하면서 살 수 없는 남자들이 있다.
맨박스는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분명하고 일관되게 ‘남성성’을 정의하는 행동과 특질의 목록을 보여주는 훌륭한 수단이다.
나는 끝이 없고 불가능한 남성성의 실천과, 그것이 어떻게 스스로 만들어낸 감옥에 우리를 가두는지를 설명하는 놀랍도록 간단한 수단으로 맨박스를 이용해왔다.
맨박스의 기묘한 점은 우리가 그 상자 안에서 겪는 고통과 외로움, 절망에도 불구하고 필사적으로 그 상자 안으로 들어가거나 그 안에 남아 있으려 한다는 것이다. 남성성의 실천이라는 거창한 의상을 걸치지 않으면 남자다운 남자가 아니므로 그 상자 밖에 있게 되고, 거기는 훨씬 더 나쁜 곳이라는 단순한 이유로.
이 책에서 맨박스의 슬프고 캄캄한 내부를 되풀이하여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관심을 가지고 보기 시작하면 어디에나 맨박스가 있다.
뉴욕의 영향력 있고 편집진의 입김이 강한–우아한 정신을 소유한 여성을 위한–웹사이트 ‘더 컷The Cut’은 2018년에 ‘사내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라는 제목의 시리즈 기사를 올렸다. 그들은 이것이 트럼프 대통령과 미투#MeToo의 시대에 고려해야 할 긴급한 문제라고 주장했다.
‘더 컷’은 시리즈의 일부로 미시간 주의 소도시에 거주하는 10대 형제–형 카를로스는 열여섯 살, 동생 리암은 열네 살–의 인터뷰를 소개했다. 데이트와 섹스, 기술, 부모와 또래들 등 광범위한 주제에 걸친 이들 형제의 지나칠 정도로 솔직한 대화는 남성성이 그들의 삶에 해로운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다음은 그들이 자살에 관해 대화하는 부분이다.9
카를로스 : 우리 학년에도 세 명이 있어. 내가 3학년이니까 한 해에 한 명씩 자살한 셈이지. 그런데 우리 동네는 너무 보수적이라서 그런 이야기를 꺼리지.
리암 : 100퍼센트 맞는 말이야.
카를로스 : 그런 일이 생기면 ‘집단 괴롭힘을 멈춰야 한다’ 같은 이야기를 들먹이지. 하지만 단지 집단 괴롭힘만의 문제가 아니야. ‘약자’에 대한 문화적 인식이 더 문제지. 우울해하면 약자로 보여. 불안해 보여도 마찬가지고. 특히 남자는 더해. 여자애들은 불안해 보이거나 우울해하거나 체중에 신경을 쓰는 일이 정상으로 보이는 것 같아. 하지만 남자애가 자신이 너무 말랐다거나 너무 뚱뚱하다고 생각한다면 계집애 같은 녀석이 되는 거지.
리암 : 남자애가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못생겼어, 나 자신이 싫어’ 같은 소리를 하면 엿되는 거야. 계집애가 되고 마는 거지.
카를로스 : 그래, 남자답게 굴라는 거지.
리암 : 맞아, 정말 싫어. 이런 남자다움이라는 생각들.
카를로스 : 남자답다는 말이 정말 싫어. 진저리가 나. 그저 페니스가 달렸다는 이유로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고 살아가기를 강요하는 해로운 사고방식이야. 그러다 보면 인생을 망칠 수도 있지. 항상 남자다움을 생각하면서. 단지 사회가 요구한다는 이유로.
리암 : 부분적으로는 미국 자체의 문제야. 이 국수주의적인, ‘엉클 샘은 당신을 원한다, 가서 조국을 위해 싸워라, 제기랄, 총을 쏴라······’. 쌍소리는 그만해야지. ‘총을 쏘고, 섹스하고, 또······.’
카를로스 : 맥주를 마시고, 젖통을 쳐다보고.
리암 : 그러고는 아침에 교회에 가는 거지. 우리가 겁이 나거나 불안해서 뭔가를 하고 싶지 않을 때 부모들은 말하지. ‘계집애 같은 소리 그만하고~ 가서 해봐.’
카를로스 : 사람들이 남자다움의 해악에 관하여 하는 말은 옳은 말이야. 그런 생각은 우리의 행동 방식을 바꾸지. 남자답게 굴고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려고 애쓰다가는 바보 멍청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까지 깨닫지도 못해.
최근에 나는 <페어팩스 미디어>에 럭비선수 조엘 톰슨Joel Thompson을 인터뷰한 글을 썼다. 2열 플레이어인 그는 레이더스, 드래곤스, 뉴사우스웨일스 컨트리, 원주민 올스타팀을 거쳐 맨리에서 뛰고 있다. 조엘은 「스테이트 오브 마인드State of Mind」라는 오스트레일리아 럭비리그NRL의 정신건강 프로그램의 홍보대사로 활동하는 일에 삶의 열정을 쏟는다.
인터뷰는 ‘복원력을 얻는 길’이라는 긍정적 정신 캠페인의 시작에 맞춰서 이루어졌다. NRL은 관계자, 선수, 팬 등 공동체의 구성원에게 21일 동안 기록할 수 있는 일기장을 내려받아 기록을 마친 뒤 자신의 정신건강에 관한 설문에 답하도록 권장했다. 조엘의 이야기는 구원, 그리고 유연성으로 가는 길이다. NRL은 정신건강 캠페인을 통해서 진짜로 생명을 구하고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거칠고 남성적인 스포츠에 그토록 따뜻하게 뛰는 심장이 있다는 것은 경이롭고도 역설적인 일이다.
“나는 지금도 괴로운 순간이 떠오르곤 하는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학교에 들어가서도 잘 적응하지 못했지요. 주변에서는 온갖 잡음이 들려왔고 술도 많이 마셨습니다. 더 살고 싶지도 않았어요.”
지금은 아내이며 두 딸의 엄마가 된 여자친구 에이미가 도움을 받도록 조엘을 설득했다.
“그녀가 내 생명을 구했습니다. 아무에게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지요. 마음을 열고 이야기하면서 아기처럼 울었고, 그 후에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새 생명을 얻은 느낌이었지요. 와우! 전에는 다른 사람을 도와본 적이 없었지만, 이제는 사람들을 도우면서 나 자신의 치유도 돕고 있습니다.”
맨박스를 이용한 훈련에 관하여 들어본 적이 없는데도 조엘은 젊은 남자들이 겪는 독특하고 위험한 압력을 분명하게 표현했다.
“겁쟁이가 되지 말고 강인해지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젊은 남자들은 도움을 받지 않고 자신을 입증하고 싶어 합니다.”
이제 그는 청년들이 도움을 청하는 손을 내밀고 자신이 잘해나가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 용기 있는 행동임을 깨닫기를 원한다. 비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조엘은 동료들에게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서 정신질환의 징후를 포착하는 방법을 말해주고 극복하기 위한 전략을 논의한다.
2018년에 작가이자 음악가인 브랜든 잭Brandon Jack–시드니 스완스 축구클럽에서 선수로 뛰었고, 올드팬에게는 전설적인 럭비선수 개리 잭Garry Jack의 아들이기도 한–은 <시드니 모닝 헤럴드>에 열정적인 글을 기고했다.
강간 문화가 실재한다는 말은 사실이다. 이 말을 듣고 눈을 치켜뜨면서 과민한 페미니스트들의 과잉 반응이라고 일축한다면 당신도 이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는 이 문제–남성 우위를 무너뜨리려고 만들어낸 환상적 허구가 아닌–에서 더는 숨을 수 없다. 그러니 부디 당신의 유독한 남성성을 위한 눈물은 흘리지 마라.10
‘가부장적 사회가 여성에게 미치는 영향에 관하여 별로 생각해보지 않은’ 청년으로서 잭은 강간의 피해자가 된 가까운 여성 친구의 반대신문에 참고인으로 출석했을 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여성들이 지원을 받고 힘을 얻는다고 진정으로 느낄 수 있는 세상에서 얼마나 멀리 있는지’를 직접 목격했다고 말했다.
나는 매일같이 청소년들이 여성에 관하여 대화하는 말을 듣는다. 그중에는 ‘그 여자는 10점 만점에 5점이야’ 같은 외견상으로 별로 해로워 보이지 않는 말부터 ‘그 여자는 강간당할 만큼 섹시하지도 않아, 말도 안 되는 소리지’와 같이 노골적이고 충격적인 말도 있다.
젊은 남성의 집단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식으로 여성에 관한 이야기를 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더는 용인하지 말아야 한다.
미투 운동은 대화의 문을 열어놓았다. 남자답다는 것은 무엇인가? 남성은 여성에 대하여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무엇이 허용되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가?
변화를 만들고 싶은 사람은 기회가 있을 때 이런 대화에 참여하여 주변의 청년들에게 남자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본보기를 제공함으로써 도움을 줄 수 있다. 성차별주의자인 친구가 있다면 그의 입을 막고 생각을 바꿀 수 있도록 노력하라. 여성에게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지구상에서 평온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존중하라.
맨박스는 부서지기 쉽다. 우리가 조금씩 깎아낸다면 결국 무너지고 말 것이다. 남자라면 누구든지 (자신에게 정직하다면) 살아가면서 적어도 한 번은 ‘남자다움을 연기’하려는 단순한 이유로, 상처를 주고 폭력적이거나 그보다 더 나쁠 수도 있음을 자신도 알고 있는 방식으로 타인을 대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한 번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앞의 불쾌하고 짤막한 문장에서 ‘연기’라는 단어가 얼마나 의미심장한가? 남자다움의 모든 법칙을 따르는 일은 가장 확실한 연기이기 때문이다.
연기는 현실이 아니다. 그런 연기를 잘해낼 수는 절대로 없다. 항상 누군가가 우리에게 더 남자다워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우리보다 더 남자다운 사람들, 우리처럼 남자답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항상 있을 것이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우리 중 그 누구도 행복하지 않다.
이는 위험한 일이다. 우리를 분노에 빠뜨린다. 너무나 맹렬한 분노. 누군가는 다치게 될 것이다.
포르노에는
사랑이
없다
우리의 할아버지들은 기묘한 모자를 쓰고 긴 의자에 앉아 수줍음을 가장하면서 스타킹의 윗부분을 보여주는 여인의 흐릿한 이미지(당시에는 포르노나 마찬가지였던)를 본 적이 있었을 것이다. 할아버지들의 마음속에는 우리 할머니들의 스냅사진 몇 장과, 특별히 운이 좋았다면, 다양한 상태로 옷을 벗었거나 성적 황홀감에 빠진 여인 한두 명의 이미지가 남아 있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평생에 걸쳐 경험했을 에로틱한 이미지는 그 정도가 전부다.
열 살 먹은 사내아이–오늘날 남자들이 포르노를 처음으로 접하게 되는 나이–의 노트북 컴퓨터나 태블릿, 또는 스마트폰에서는 사랑하는 할아버지가 꿈도 꿀 수 없었던 다양한 성적 이미지를 클릭 몇 번으로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당신의 할아버지가 인기 있는 포르노 사이트 몇 군데를 둘러본다고 상상해보자. 아마도, 별다른 이유도 없이 기꺼이 옷을 벗는 것처럼 보이는, 세계 각지에서 온 젊은 여성들의 노고에는 고마움을 느끼겠지만 그녀들의 목을 조르고, 침을 뱉고, 항문을 벌리고, 때리는 모습을 보고는 무척 당황할 것이다.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무슨 짓들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하지만 네 할머니라면 그런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참지 않았으리라는 건 장담할 수 있다.”
청년층에서 발기부전 증상이 급속히 퍼져나가는 원인이 온라인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포르노물이라는 것은 꽤 역설적이다. 지나치게 가지고 놀아도 괜찮을 것 같지만 작동을 멈출 수도 있음이 분명하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왼손으로 자위하는 방법을 배운 최초의 세대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또한 모든 지침서 중 최악인 『포르노가 가르쳐주는 섹스How to Do Sex According to Porn』로 무장하고 성인의 성관계에 나서는 최초의 세대다.
포르노는 진정한 섹스를 보여주지 않는다. 진정한 여성을 보여주지 않는다. 진정한 남자와 그들의 몸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진정한 섹스의 황홀감과 욕구를 보여주지 않는다. 여성은 포르노를 원하지 않는다. 포르노는 남자들을 위하여 남자들이 만든 것이다.
경험이 전혀 없다는 단순한 이유로 게이 청년들의 관점에서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들 역시 너무 일찍부터 너무 많은 것을 본 결과로 ‘정상적’인 형제들과 같은 고통을 겪는다. 게이 포르노 역시 인간을 막대기와 구멍뿐인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나는 단지 아는 것이 그뿐이라는 단순한 이유로 ‘정상적’인 관점에서 포르노에 관한 논의를 진행한다. 혹시 독자들 중에 게이 청년이 있다면, 당신을 배제하려는 의도가 없음을 알아주기 바란다. 나의 외침은 당신에게도 해당된다. 그것에서 손을 떼고 노트북 컴퓨터를 닫아라.
포르노는 청년들을 성적인 측면과 대인 관계에서 실패자로 만든다. 그들에게 여성은 인간이 아니라 섹스의 대상일 뿐이라고 가르친다. 섹스의 진정한 기쁨–즐거움, 공유감, 친밀감–에서 시선을 돌려 삽입이라는 행위 자체만 바라보도록 한다.
따라서 포르노는 신체적 문제뿐 아니라 정신적ㆍ정서적 문제도 유발한다. 전 세계의 청년들은 특정한 방식으로 보고 행동해야 하며, 만나는 여성은 섹시하고, 음모를 면도하고, 정액으로 범벅이 되어야 한다고 배운다. 이는 우리 모두에게 재앙이다.
아마도 섹스의 디지털화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는 파티장이나 자동차 뒷좌석에서의 절실하고도 어설픈 경험에 관한 이야깃거리가 있을 것이다. 모험, 웃음, 그리고 실패의 재미까지 공유하는 느낌이 있었다. 우리는 현실 세계에서 이성에 관하여 천천히 배워나갔다. 창고에서 찾아낸 <플레이보이> 두 권이 유일한 포르노 경험이었다면, 처음부터 세 사람이 함께하는 항문 섹스보다는 여성의 속옷을 더 선호할 것이다.
물론 예전의 포르노 책자도 여자들에게 기묘한 속옷을 입히고 부드러운 초점을 사용하여 대상화했지만, 그 수준이 매우 낮고 평범해서 오늘날 맹공을 퍼붓는 디지털 포르노에 들어 있는 펀치가 거의 없었다.
섹스 역시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 우리의 원시적 뇌는 아직도 지방과 설탕을 먹는 행동에 보상을 주고 폭식을 부추긴다. 이는 에너지를 비축하려는, 생존에 관한 문제다. 그리고 성적인 이미지를 보면 도파민이 분출한다. 우리가 이성에 끌리는 것은 종을 지속시키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손에게 유전자를 전달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우리가 드라이브스루 식당에서 고칼로리 패스트푸드를 사 먹게 될 줄을 전혀 몰랐던 것과 마찬가지로, 생생한 이미지가 성적 즐거움을 제공하는 유방과 성행위의 클릭 축제click-fest로 불쌍한 뇌를 이끌게 된 것은 전혀 의도하지 않은 일이었다. 우리의 뇌는 보이는 모든 이미지를 유전적 기회로 해석한다. 수렵채집인의 뇌에 우리의 온라인 포르노 하렘은 들어본 적도 없는 유방의 노다지다.
도파민이 분출할 때마다 생성되는 물질인 델타포스비는 우리의 뇌를 변화시킨다. 시간이 가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데 점점 더 강한 충격과 놀라움, 새로움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