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URERU OPPAI, FUKURAMU OPPAI-CHIBUSA NO ZUZO TO KIOKU
ed. by Masaya Takeda
Copyright © 2018 by Masaya Takeda
Compliation Copyright © 2018 by Masaya Takeda and Iwanami Shoten, Publishers
First published 2018 by Iwanami Shoten, Publishers, Tokyo.
This Korean print form edition published 2019 by Book21 Publishing Group., Paju-si
by arrangement with Iwanami Shoten, Publishers, Tokyo
through Eric Yang Agency, Seoul.
이 책의 한국어판 저작권은 에릭양을 통해 이와나미쇼텐과 계약한 ㈜북이십일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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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1. 본문의 각주는 옮긴이 주이며, 미주는 원서에 삽입된 출처 주이다.
2. 외래어 표기는 국립국어원 표기 원칙을 기준으로 했다.
3. 중국ㆍ일본 한자어 표기는 고유어의 경우 현지 발음, 보편적 용어ㆍ개념어의 경우 한국어 음독을 기준으로 했다. 단, 이해를 고려하여 유연하게 적용했다.
4. 중국 인명 표기는 신해혁명을 기점으로 이전 생존자는 한국어 음독, 이후 생존자는 중국어 음독을 기준으로 했다.
5. 책명은 『 』, 잡지ㆍ신문 제호는 《 》, 논문ㆍ기사ㆍ노래 제목은 「 」, 미술품ㆍ영화ㆍ연극ㆍ뮤지컬ㆍ전시 제목은 < >, 강연ㆍ세미나 제목은 “ ”, 시리즈 제목은 ‘ ’로 표시했다.
다케다 마사야
젖가슴, 유방, 젖, 가슴, 젖퉁이, 젖무덤······. 여러분이 손에 든 이 책은 때에 따라 다르게 부르는 인체의 특정 부위에 관한 에세이를 엮은 것이다.
나는 최근 몇 년 동안 대학에서 “중국 유방 문화지文化誌”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해 왔는데, 수강생은 대부분 스무 살가량의 젊은 세대다. 수백 명이 듣는 수업이라 설문지를 돌려 이렇게 물었다. “유방을 부르는 말은 여럿이지만 여러분은 어떤 상황에 어떤 어휘를 사용합니까? 또한 각 어휘를 듣고 어떤 이미지를 떠올립니까?”
설문 결과의 통계를 내어 설득력 있게 결론을 도출하기란 상당히 어려웠다. 여학생 대다수는 여자 친구들끼리 수다를 떨거나 브래지어를 살 때 보통 ‘가슴’으로 부른다고 했다. 어떤 학생은 뭐니 뭐니 해도 ‘젖가슴’이라는 말이 매우 좋다고 했고, 어떤 학생은 ‘젖가슴’이라는 말은 부끄러워 입 밖에 내지 못한다고 했다. 또 남성의 입에서 ‘젖가슴’이라는 말이 나오면 꺼림칙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남학생의 경우 ‘젖가슴’이라는 말을 좋아한다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래도 사람마다 달랐고, 머릿속에 떠올릴 때라면 몰라도 실제로 입 밖으로 꺼내기에 부끄럽다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한편 한자로 ‘유방乳房’이라고 쓰면 딱딱한 학술적ㆍ의학적 뉘앙스를 풍긴다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한자로 표현하면 에로틱한 느낌이 백배 천배 더 부풀어 오른다고 열변을 토하는 사람도 있었다.
유방을 가리키는 말의 사용 습관을 보면, 그 어휘가 집집마다 다를 뿐 아니라 개인마다 다른 방언을 이루는 듯했다. 여학생이 부모와 대화할 때는 어떤 말을 사용할까? 아버지와 대화할 때, 어머니와 대화할 때 서로 어떻게 다를까? 형제자매의 경우는 어떨까? 남자 친구와 얘기할 때는? 연인끼리 얘기할 때는? 이처럼 유방에 관한 어휘를 발화하는 상황은 실로 복잡다단하다. 정확한 통계학적 방법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면 더 신뢰할 만한 결론을 얻을지도 모르겠다.
2008년 봄, ‘유방문화연구회’라는 곳에서 연락이 왔다. 10월 정례 모임에서 중국의 유방관乳房觀이나 크로스드레싱cross-dressing에 대해 강연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런 연구회가 있는 줄도 몰랐지만, 실로 그 이름에 걸맞은 역사를 갖춘 곳이었다.
나에게 강연을 의뢰한 이유는 전년도에 간행한 졸저 『양귀비가 되고 싶었던 남자들: ‘의복의 요괴’ 문화지楊貴妃になりたかった男たち: <衣服の妖怪>の文化誌』 (メチエ, 講談社選書, 2007) 때문인 듯했다. 중국 문화로 밥을 먹고사는 것도 사실이고 유방에도 관심이 없진 않았지만, ‘중국의 유방’이라는 주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후 여름방학 동안 여러 방면으로 조사해 보니 중국에도 상당히 재미있는 얘깃거리가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2008년 10월 18일 유방문화연구회의 정례 모임에 참석해 “남자의 유방이 부풀어 오를 때: 중국 유방 문화 노트”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당시 모임의 주제는 “여자 옷을 입은 남자들”, 한마디로 크로스드레싱이었다.
그 뒤로 3년이 지난 2011년 홋카이도대학 총합박물관에서 <국경을 넘는 이미지: 매스컴에 비친 중국>이라는 전시를 기획했다. 나는 중국의 프로파간다 포스터와 연환화 連環畵 컬렉션을 들고 와서 스태프와 어울려 즐겁게 준비해 나갔다. 이 전시 기간에 맞춰 2011년 12월 17일 “중국 프로파간다 포스터의 세계”라는 제목으로 시민을 위한 관련 세미나도 기획했다. 나도 발표를 맡아 “중국 포스터에 그려진 유방”이라는 화제를 담아냈다. 나중에 스태프가 알려 주기를, 내가 발표를 시작한 지 5분 만에 꾸벅꾸벅 졸던 할아버지 청중이 유방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퍼뜩 눈을 떴다고 한다. 강연에 유방 이야기를 넣으면 졸음을 내쫓는 데 효과적인 것 같다.
세미나가 끝나고 뒤풀이 자리에서, 늘 어울리던 젊은 중국 문학 연구자들과 잡담을 나누던 가운데 ‘유방’을 주제로 공동 연구를 진행해 볼까 하는 얘기가 나왔다. 그때 앞장선 이가 다무라 요코田村容子, 가베 유이치로加部勇一郞였다. 이 책에는 내 이름이 엮은이로 올라가지만 사실상 두 분이 편집에 주로 힘을 보탰다.
이듬해 7월 홋카이도대학 슬라브연구센터의 고시노 고越野剛(러시아 문학)가 주최하여 “전쟁의 메모리스케이프”라는 제목으로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이 자리에 모인 하마다 마야濱田麻矢(중국 현대문학), 고고 에리코向後恵里子(일본 미술사), 고시노 고에게도 유방을 연구해 보자고 제안했다. 다들 찬성하면서 몇 차례 술잔을 들었다. 술자리에서는 뭔가 중요한 일을 결정하더라도 다음 날이면 깨끗하게 잊는 법이다. 그러나 그날은 다무라 요코가 꼼꼼하게 발언을 기록해 준 덕분에 실제로 활동을 개시하고 학술 연구비를 신청해 보기로 했다.
그리하여 내가 연구 대표자가 되고, 소속 연구자로는 다무라 요코, 가베 유이치로, 하마다 마야(이상은 중국 담당), 고시노 고(러시아 담당), 고고 에리코(일본 담당), 연구 협력자로는 후지이 도쿠히로藤井得弘(중국 근대문학), 그리고 홋카이도대학 대학원생이 참여하는 형태로 학술 재단에 연구비를 신청했다. 다행스럽게도 연구비를 받아 3년간 정식으로 연구 활동을 벌였다(“‘유방’의 도상과 기억: 중국ㆍ러시아ㆍ일본의 표상 비교 연구”). 연구회 구성원들은 발표와 토의를 거듭했는데, 그때 제출한 발표문이 이 책에 수록한 글의 몸체가 되었다.
다무라 요코는 중국 근현대문학, 특히 경극京劇 등 연극을 중심으로 폭넓게 연구하며, 젠더를 형상화하는 무대에서 유방을 어떻게 표현해 왔는지를 밝혔다.
가베 유이치로는 청대淸代 소설부터 현대 아동문학까지 아우르는 연구자인데, 이번에는 중국의 남성 젖가슴에 대해 논했다.
하마다 마야는 중국 현대문학에 나타난 유방 표상에 대해 다루었다. 이 책의 편집 작업이 한창일 무렵, 때마침 출판사 이와나미쇼텐에서 해당 분야의 작가인 장아이링張愛玲 단편집을 출간했다. 유방의 표상과 관련 깊은 작품이므로 나란히 읽으면 좋겠다.
고시노 고는 유모ㆍ우유를 키워드 삼아 애니메이션 등을 통해 러시아의 유방 표상을 논했다. 고고 에리코는 인어의 유방과 이를 가리는 조개껍데기 모양 브래지어에 대한 독특한 관점을 보여 줬다. 후지이 도쿠히로는 근대 중국의 건강미라는 관점에서 유방을 논했다.
우리는 더욱 광범위한 지역과 분야를 아우르고자 다른 연구자를 초빙해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다나카 다카코田中貴子는 일본 고전문학에 나타난 유방관을 이야기했다. 『성애의 일본 중세性愛の日本中世』(1997) 등 여러 저서가 있으며, 내게는 ‘요괴’를 연구하는 든든한 동료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는 권두에 어울리는 일본 편 총론을 집필했다.
기무라 사에코木村朗子는 『유방은 누구의 것인가: 일본 중세 모노가타리로 보는 성과 권력乳房はだれのものか: 日本中世物語にみる性と權力』(2009)을 출간한 시점이었기에 고대 일본의 유방에 대한 논의를 맡아 주었다.
프리랜서 작가이자 번역가인 지쓰카와 모토코實川元子는 체험을 바탕으로 현대 일본의 유방을 둘러싼 이야기를 기술했다. 그는 유방문화연구회의 운영위원이기도 한데, 교토에서 연구회 활동이 시작된 이래 줄곧 도움을 주었다. 수전 셀릭슨Susan Seligson의 『거유는 부러운가?: H컵 기자가 본 현대 젖가슴 사정巨乳はうらやましいか?: Hカップ記者が見た現代おっぱい事情』(2007) 등 번역서도 다수 있다.
묘키 시노부妙木忍는 홋카이도대학 문학연구과에 몸담은 와중에 훌륭한 저서 『비보관이라는 문화 장치秘寶館という文化裝置』(2014)로 일약 독서계를 평정한 연구자다. 그에게는 비보관의 조형造形 가운데 유방 표상에 대한 글을 의뢰했다.
세키무라 사키에関村咲江는 홋카이도대학 대학원의 연구자로서 중화민국 시대의 《부녀 잡지婦女雜誌》를 통해 유방을 중심으로 한 신체 담론을 다룬 석사논문을 제출했다. 이 논문은 내용이 알차고 문체도 유려해서 이 책에 싣도록 권유했다.
마쓰에 다카시松江崇는 제자인 네기시 사토미根岸美聰, 양안나楊安娜와 공동으로 중국 언어학의 입장에서 유방을 둘러싼 어휘를 논했다.
연구회는 대체로 여름철에 열었기 때문에 시원한 바람이 부는 삿포로에서 가장 많이 진행됐다. 그러나 오키나와현립예술대학의 몇몇 분에게 발표를 부탁해 오키나와에도 날아간 바 있다.
서양 미술사를 전공한 오가와 기와코尾形希和子는 내가 믿고 의지하는 친구이자 ‘괴물’ 연구의 동료인데, 『교회의 괴물들: 로마네스크의 도상학教會の怪物たち: ロマネスクの圖像學』(2013)이라는 저서를 냈다. 그에게는 메릴린 옐롬Marilyn Yalom의 『유방론A History of The Breast』(Alfred A. Knopf, 1997)이 나오기 전까지 유방의 관념에 관한 논의를 부탁했다.
오가와 기와코의 제자인 가토 시호加藤志帆는 마욜리카Maiolica라는 흥미로운 소재를 가지고 유방 이미지를 논했고, 오시로 사유리大城さゆり는 남양군도에서 활동한 일본 화가들이 유방을 어떻게 그렸는지를 연구한 성과를 밝혔다. 두 사람 다 도판을 풍부하게 활용했다.
홋카이도대학 총합박물관 전시회 때 만난 다케우치 미호竹內美帆는 당시 세이카대학에서 만화 문화를 연구하며 교토 국제만화박물관 운영에도 참여했다. 이후 그는 이 박물관에서 연환화 전시와 심포지엄을 개최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런 인연으로 유방에도 매력을 느끼고 일본 만화에 나타난 ‘젖가슴’에 대한 글을 실었다.
연구회에 제출한 글은 아니지만 이 책을 만들 때 원고를 보내 준 이도 있다. 『민족의 환영: 중국 민족 관광의 행방民族の幻影: 中國民族觀光の行方』(2007)의 저자이기도 하고 문화인류학을 전공한 다카야마 요코高山陽子는 세계 각지의 조각상에 새겨진 유방을 논의했다.
중국 예능 프로그램이나 드라마를 연구하는 히노스키 다다히로日野杉匡大는 중국의 브래지어박물관에 잠입해 리포트를 썼다.
나카네 겐이치中根研一는 홋카이도대학 문학연구과에서 중국의 ‘야인野人’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아마도 세계에서 유일한 ‘야인 박사’일 텐데, 『중국 ‘야인’ 소동기中國「野人」騒動記』(2002)라는 괴이쩍은 저서도 있다. 글의 주제가 야인의 유방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연구회를 여는 일 외에 함께 러시아나 중국으로 취재 여행을 하기도 했다. 상세한 활동 상황은 모임의 운영ㆍ진행을 맡은 다무라 요코가 “모루샹摸乳巷”이라는 제목으로 연구회 보고 리포트(웹)를 수시로 정리해 왔다. 이 책의 ‘후기’도 그에게 부탁했다. 연구회 활동에 관해서는 ‘후기’를 읽어 주기 바란다.
이 책은 위와 같은 경로로 기획ㆍ집필한 성과를 한 권으로 엮어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내용이 한 방면에 치우쳐 있다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중국 문학을 전공한 연구자들이 주축이 되어 시작한 작업이다 보니 중국 관련 글이 주가 되었다.
일본 출판계에는 메릴린 옐롬의 명저를 비롯해 서구 문화의 신체론을 다룬 서적은 비교적 여럿 있고, 일본 문화에 대한 비슷한 저작도 적지 않다. 그러나 중국은 공백 상태에 가깝다. 물론 이슬람 문화권을 비롯해 다른 공백도 숱하게 있을 것이다. 각 분야의 전공자가 언젠가 공백을 메울 만한 성과를 내리라 믿는다.
이 책에서는 서양과 관련해서도 기존에 잘 다루지 않던 중세 미술이나 러시아에 관한 글을 모았다. 취재를 통해 내용을 더 충실히 하여 ‘걸어서 세계 유방 여행’ 같은 식의 두툼한 책으로 당당히 발전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연구회에 돛을 단 다케다 마사야, 다무라 요코, 가베 유이치로가 이와나미쇼텐의 와타나베 도모카渡部朝香와 함께 원고를 읽고, 대중 독자를 위한 책으로 완성해 낸 결과다. 취합한 원고에 대해서는 저마다 의문과 견해를 제시했다. 번거로운 과정이었음에도 필자가 모두 성의 있게 답해 주었다. 분량의 제한으로 글을 깎고 다듬어야 했기에 쓰고 싶은 것을 온전히 다 쓴 필자는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나는 필자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강한 확신이 들었다. 글자 수를 엄격히 제한했는데도 어느 글이든 연구자의 순수한 열정이 담겨 있었으며, 이 주제들을 한 권의 책으로 엮을 수 있다고 믿었다. 어쩌면 가까운 장래에 한 사람 한 사람이 써낸 ‘유방 책’이 나오지 않을까? 여기에 실린 글이 스무 권의 책으로 발전해 유방 연구서를 집대성할 유쾌한 꿈을 품어 본다.
최근 서점 진열대에서 유방을 주제로 한 책이 새삼 눈에 띈다. 유방 연구로 학술 연구비를 받은 일도, 이런 책을 세상에 선보인 일도, ‘젖가슴의 신’이 내린 거룩한 뜻일지 모른다. 앞으로 다양한 문화 영역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로부터 여러 유방론이 나올 것이다. 이 책이 마중물이 된다면 필자 모두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이다.
2018년 3월 삿포로에서
어떻게 이야기해
왔는가 다나카 다카코
커다란가 펑퍼짐한가
여성이 유방에 대해 말할 때 개인사적 감회가 깊어지곤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지 모른다. 자기 몸의 일부로서 존재할 뿐 아니라 시선을 조금 아래로 돌리면 늘 실체와 마주하기 때문이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해부학적으로는 유방을 갖고 있지만, 여성에게 유방은 ‘수유’나 ‘성애’처럼 타자와 접촉해 의미를 부여받는다는 점에서 남다르다. ‘커다란 유방’이나 ‘거유’, 또는 ‘빈약한 젖’이나 ‘절벽 가슴’ 따위로 불리며 남성이라는 타자에게 가치를 부여받는 한편,1 유아라는 타자로부터 ‘어머니의 젖가슴’이라고 규정받는다. 이때 두 경우에 다 사용하는 이름이 ‘젖가슴’이다. 이런 이중성의 상징이라 할 ‘젖가슴’을 이 책의 제목으로 선정한 의미는 가볍게 여길 수 없다.
이 책의 원제는 “흔들리는 젖가슴, 팽창하는 젖가슴: 유방의 도상과 기억ゆれるおっぱい,ふくらむおっぱい: 乳房の圖像と記憶”이다.
나는 ‘젖가슴’이라는 말에 꽤나 거부감을 느낀다. 원래 유방, 유즙을 가리키는 유아어였는데, 현대사회에서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 여성의 신체 부위를 성적 상징으로 일컬을 때 이 말을 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물론 젖 먹이는 유방을 신성시하거나, 중세 유럽에서처럼 ‘악마의 은둔처’라며 지탄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유방을 ‘젖가슴’이라 부르는 순간, 유방을 둘러싼 성과 권력의 문제가 은폐되어 버리는 듯하다.
부드러운 울림을 지닌 이 말을 사용하면 지금까지 왕성하게 논의해 온 페미니즘 유방론을 탈구시키는 효과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젖가슴’이라는 말로 다 뭉뚱그린다면 기본적으로 흔들리지도 부풀지도 않는 남성의 유방 문화 등을 과연 논의할 수 있을까? ‘거유’를 좋아하는 남성을 ‘젖가슴 외계인’이라고 야유하듯 유방은 이미 여성의 육체를 떠나 사물화되어 있다. ‘젖가슴’이라 하면 여성, 또는 암컷 동물을 곧장 연상시킬 우려가 있다. 남성의 유방에 대한 언급도 등한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남성의 유방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먼저 근대 이전 일본에서 유방을 어떻게 표현해 왔는지 살펴보자. 예전에 어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작은 유방’을 이르는 말을 다룰 예정이니, 유방에 대한 일본의 오랜 자료를 알려 달라는 전화를 걸어왔다(하필이면 납작한 가슴이 자랑인 내게!). 일본에서 처음으로 여성의 흉부 사이즈를 언급한 것은 『만엽집萬葉集』 권제9, 1738번으로 알려져 있다.
아와安房에 이어져 있는, 스에末에 사는 다마나는 가슴이 펑퍼짐한 내 누이, 허리가 가느다란 귀여운 처녀의 그 모습, 반짝이는 것이 꽃과 같구나, 웃으면서 일어서면. (중략)
오늘날 일본 지바현 남부에 해당하는 옛 지명.
이것은 다카하시노 무시마로高橋虫麻呂가 아와국安房國의 매력적인 여자를 노래한 자레우타戯れ歌다. 아와국에 인접한 ‘스에’(‘周淮’로 표기하기도 한다)에 사는 ‘다마나’라는 유녀遊女가 ‘가슴’이 ‘펑퍼짐하고’ 허리가 잘록 들어간 ‘스가루 벌’처럼 스타일이 좋아, 그런 모습으로 생긋 웃으며 일어서면 남자들의 가슴이 설렌다는 뜻이다.
일상을 소재로 해학ㆍ익살ㆍ풍자를 담은 와카和歌, 일본 고유의 시.
문제는 ‘펑퍼짐한 가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다. 이에 담당 프로듀서는 “사람들이 옛날부터 큰 가슴을 좋아했군요” 하고 스스럼없이 말했지만, 사실 이 대목의 해석은 아직 명확하지 않다. 대표적인 고전문학 주석서에서는 ‘가슴이 풍만함’,2 ‘풍만한 여성의 가슴’,3 ‘풍만한 유방이 불룩 나와 있는 모습’4 등 가슴(유방)의 풍만함으로 해석했고, 가나이 세이이치金井淸一의 『만엽집 전주全注』 권제9에서는 “유방을 의식한 말”로, 이토 하쿠伊藤博의 『만엽집 석주釋注』에서는 “좌우 유방의 원이 넓고 가슴이 극히 풍만한 모습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하며 ‘가슴’이 ‘유방’이라고 거듭 확인했다.
그러나 같은 시대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가슴의 펑퍼짐함’(원문은 ‘흉별지광胸別之廣’이라는 한자 표기)이 ‘유방의 풍만함, 크기’를 의미한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그 때문인지 ‘가슴의 넓이’5나 ‘흉폭胸幅’6같이 직역에 가까운 것도 볼 수 있다. 분명 『고사기古事記』에서 이와토岩戶에 숨어 있는 아마테라스를 다시 불러들이려고 골계적인 춤을 춘 아메노우즈메가 ‘젖乳을 짜냈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가슴’이 단순한 흉부가 아니라 유방일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고사기』에는 ‘젖’이라는 글자가 들어 있는 반면, 『만엽집』에는 그 글자가 없다는 점은 주의해야 한다.
‘가슴의 펑퍼짐함’과 대구를 이뤄 ‘허리가 가느다란 귀여운 처녀’라는 대목이 이어진다는 데 주목하면, ‘흉부와 복부 사이가 좁은 스가루 벌처럼 동여맨 스타일, 가슴은 풍만하고 허리가 가늘게 꽉 조여 있는 멋진 스타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또한 이 경우 펑퍼짐한 가슴이 반드시 유방 크기가 아니라 가슴 넓이를 가리킬 가능성도 있다. 풍요를 상징하던 조몬繩文시대(기원전 1만 4000~기원전 300) 여자 토우土偶그림1라든지 고훈古墳시대(250~538경) 여자 하니와埴輸를 떠올리면서, 유방이 불룩 솟은 것보다 엉덩이 크기가 중요했다는 사실에 비춰 생각해야 할 것이다.7
옛날 무덤의 주위에 묻어 두던 찰흙으로 만든 인형이나 동물 따위의 상. 토용土俑.
그림1조몬시대 토우(이른바 ‘조몬의 비너스’)
그러면 ‘가슴’과 ‘젖’이라는 말은 각각 구체적으로 무엇을 나타냈을까? 고전 작품에 보이는 유방에 대해서는 기무라 사에코의 『유방은 누구의 것인가: 일본 중세 모노가타리로 보는 성과 권력』8을 비롯한 선행 연구에 자세히 나와 있으므로 용례를 어느 정도 추출할 수 있는 헤이안平安시대(794~1185)의 모노가타리를 중심으로 서술하기로 하겠다.
‘가슴’인가 ‘젖’인가
‘가슴’은 늑골로 감싸인 흉부 전체, ‘젖’은 흉부에서도 유선이 발달해 피부가 불룩 솟은 곳을 가리킨다는 정의가 있다.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겐지 모노가타리源氏物語』의 「피리橫笛」 권에 나온다. 유기리가 아내 구모이노카리와 자고 있을 때 아이가 밤에 깨어 울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구모이노카리는 유방을 물려 아이를 달랬다. 다만 이때 구모이노카리는 수유 기간이 벌써 끝나 유즙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갓난아기에게 장난감을 대신해 젖꼭지를 물려 준 것이다.
일본 고유의 산문체 문학. ‘줄거리를 갖춘 이야기’로 ‘소설小說’과 유사하다.
[구모이노카리는] 풍만하게 출렁이는 가슴을 열어 젖을 입에 물려 준다. (···) 젖은 말라붙었지만[유즙은 말라 있었지만] 마음을 다해 얼러 준다.
젖먹이에게 물려 주었다고 했으니까, 엄밀히 말하면 여기서 ‘젖’은 유방이 아니라 젖꼭지일 것이다. 수유나 임신과 직접 연관되는 것은 유방이 아니라 젖꼭지라는 예는 『사고로모 모노가타리狹衣物語』 권2에도 나온다. 온나노미야의 임신을 그 어머니가 알아챈 계기는 젖꼭지 색깔의 변화였다.
홑옷의 품이 살짝 끼는 것과 젖꼭지 색깔이 평소보다 검은 것을 보고, 가슴이 요동치는 와중에 주의 깊게 살펴보았더니(중략)
에도江戶시대(1603~1867)의 춘화는 달리 생각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성애의 대상이라는 측면이 두드러지는 ‘젖’이라는 말은 근대 이전의 문학에서 오로지 수유 기관을 의미했고, 특히 뜻하지 않은 임신을 당사자 이외의 인물이 알아채는 장면에 등장할 때가 많았다. 이토 유코伊東祐子는, 『밤에 잠이 깨다夜の寢覺』라든지 중세의 왕조 이야기 『띠에 맺힌 이슬あさぢが露』 등에도 임신으로 말미암은 ‘젖꼭지의 검은빛’이 묘사되었고, “어느 것이나 정식 부부관계를 맺지 않은 여성의 임신”을 나타낸다는 흥미로운 지적을 했다.9 임신의 징조를 나타내는 기호로서 ‘젖’을 의미상 명확히 ‘가슴’과 구별한 것이다.
후지와라노 미치나가가 황후가 된 누이의 밀통과 임신을 알아챈 『대경大鏡』의 한 대목도 ‘가슴’과 ‘젖’을 구분하고 있다.
[누이의] 가슴을 열어 젖을 비틀어 보고는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얼굴에 들이덤볐다.
미치나가는 누이가 밀통密通했다는 소문을 듣고, 누이의 기모노를 벗겨 가슴을 열어 보고 진위를 가리려 했다. 이때 유즙이 솟아올라 임신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임신 중에는 유즙이 나오지 않으니, 여기서 ‘젖’이 임신으로 검은빛이 짙어진 젖꼭지와 부풀어 오른 유방을 나타낸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렇듯 모노가타리에 나오는 ‘젖’이란 거의 예외 없이 수유 기관으로 등장할 뿐, 섹슈얼한 의미는 주류가 아니다.
오히려 유방을 포함한 가슴 부위를 남의 눈에 내보이는 것은 상스러운 행위로 여겨진 것 같다. 『겐지 모노가타리』의 「우쓰세미空蝉」 권에는 하룻밤 묵는 여행을 떠난 히카루 겐지가 여관에서 바둑을 두는 두 여성을 엿보는 유명한 장면이 나온다. 히카루 겐지가 일찍이 딱 한 번 관계를 맺은 우쓰세미(이요노스케의 후처)와 그의 의붓자식인 노키바노오기의 모습이다.
원어는 方違え. 나들이나 여행을 할 때 목적지의 방위가 나쁘면 일단 방위가 좋은 곳에서 하룻밤 머물고 다음 날 목적지로 가는 일이라는 뜻.
하얀 비단으로 지은 겉옷單襲, 불그스름한 남색의 고치기小袿를 단정치 못하게 입고, 붉은색으로 허리를 묶는 곳까지 가슴을 드러내고 품위 없이 맞이했다.
원어는 二藍. 염색의 이름으로 잇꽃과 쪽으로 물들인 색.
헤이안시대에 상류 계급 여성이 입던 약식 예복.
연상의 여성답게 고상한 ‘우쓰세미’에 비해, 젊고 통통한 노키바노오기는 얇은 기모노를 야무지지 못하게 걸쳤을 뿐 아니라 하카마袴를 입은 허리께까지 풀어 놓고 있다. 당시 하카마는 오늘날의 속옷에 해당한다. 상반신이 배꼽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모습이다. ‘품위 없다’는 말은 ‘예의에 벗어난다’, ‘천박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문맥에서는 유방을 드러낸 여성을 반드시 에로틱하게 느낀 것은 아니라는 뜻이 된다.
겉에 입는 주름 잡힌 하의.
또 하나, 『대경』의 예를 살펴보자. 소치노미야의 아내가 된 후지와라노 미치타카의 딸에게 기벽이 있었다는 대목이다.
손님이 주변에 있을 때 [아내가] 주렴을 조금 높이 걷어 올리고 가슴을 풀어헤치고 서 있으면, 남편은 수치심에 얼굴이 붉어져 어쩔 줄 몰라 한다.
보통은 지위가 높은 여성이라면 발을 내린 채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이 글의 여성은 입은 옷의 ‘품’을 풀어헤치고 손님 앞에 선 모습을 보여 주었다고 한다. ‘품’은 입은 옷과 가슴의 사이를 말하는데, 그것을 풀어헤쳤다는 말은 유방을 포함한 흉부의 노출 상태를 의미한다. 고귀한 여성은 ‘서 있는’ 모습조차 다른 사람 눈에 띄게 해서는 안 되는데, 더구나 흉부까지 보여 준다는 것은 기행이라고밖에 할 수 없으니 남편이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는 것도 당연하다.
유방을 노출하는 여성은 『마쓰자키텐진 연기 에마키松崎天神緣起繪巻』(가마쿠라鎌倉시대[1185~1333] 말기)에서 신들린 무녀가 상반신을 벗고 광란하는 모습과 비슷하고,그림2 비정상적인 상태의 형상으로 여겨졌다. 앞서 언급한 『고사기』의 아메노우즈메가 추는 춤과 다를 바 없다. 중세 에마키에 보이는 유방 표상을 고찰한 나이토 히사요시內藤久義는 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에마키모노繪卷物라고도 불린다. 가로로 긴 종이나 비단에 소설과 삽화처럼 글과 그림을 연속적으로 배치한 작품 형태를 가리킨다.
그림2『마쓰자키텐진 연기 에마키』
에마키에 유방을 내놓은 상태로 그려진 여성은 신분 계층에 따라 장면ㆍ상태에 차이가 난다. 귀족 여성, 궁녀, 장자의 딸 등 고위층이 유방을 내놓은 장면은 사체 또는 빈사瀕死, 광란의 상태일 따름이며, 어디까지나 비정상적인(비일상적인) 상태일 때 유방을 드러내는 것으로 묘사한다. 반면 서민이나 변두리 여성 등 하위층인 경우, 수유ㆍ세탁 등 일상적인 장면에서도 유방을 묘사한다.10
무례하고 비정상적인 유방 노출이 전혀 에로틱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이케다 시노부池田忍는 그런 장면에도 은밀하게 즐기려는 목적이 있었다고 본다. 그는 가마쿠라시대 중기 작품인 『헤이지 모노가타리 에마키平治物語繪巻』의 <삼조전 야간 습격 권三条殿夜討巻>에 그려진, 부상당하고 살해당한 궁녀들의 나체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이처럼 풍만한 유방을 통해 ‘성적’ 특징을 각인하는 형태로 여성의 몸을 표현한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더구나 전투에서 유린당한 희생자로서 드러누운 여성은 상처를 입어 더 이상 저항할 수 없다. 이렇게 강조된 여성의 몸은 감상자인 남성 귀족에게는 성적 쾌락을 안겨 주는 일종의 포르노그래피로 주어졌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11
확실히 <삼조전 야간 습격 권>에는 유방이나 넓적다리를 드러낸 궁녀가 약간 과장되게 그려졌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감상자의 일방적인 시각적 쾌락을 위한 것이다. 에도시대 춘화처럼 그림 속에서 성적 행위가 이뤄지고 감상자가 대리만족을 느끼는 구성은 아니다. 이를테면 이쓰키노미야斎宮와 경호원인 류코 지역 무사의 성행위를 그렸다고 하는 헤이안시대 말기의 에마키 『고시바가키소시小柴垣草子』라면, 감상자가 그림 속 남녀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시바가키소시』에서도 성애의 대상으로 강조된 대상은 여성의 성기일 뿐, 유방의 접촉이 그려지지는 않은 점에 유의해야 한다.그림3
헤이안시대에 천황을 대신하여 이세 신궁伊勢神宮을 봉양하던 인물.
그림3『고시바가키소시』
이쯤에서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져야겠다. 과연 유방의 성적 기관이라는 측면은 방치돼 왔을까? 이때 유방의 자극이 여성의 성적 쾌락이었는지 아닌지 하는 실태의 측면과 회화적 표현이 성적인 유방 접촉(문지르고 빠는 애무 행위 등)을 그리지 않았다는 측면을 나누어 생각하면 좋을 듯하다. 실태는 표면에 드러나므로 잠시 제쳐두고, 여기서는 남성의 욕망을 반영하는 측면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유방 vs 성기
근대 이전의 일본에서는 유방을 성적 대상으로 여긴 적이 없다는 것은 지금까지 숱하게 논의해 왔다. 춘화에서도 성기 부분은 과장스럽게 묘사하지만, 벌거벗은 앞가슴에 엿보이는 유방에는 관심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타이먼 스크리치Timon Screech는 일찍이 이렇게 지적했다.
이런 경향은 춘화에서도 전형적이었다. 남자와 여자의 신체를 생식기 이외에는 같게 취급하곤 했다. 여성의 유방도 가볍게 다뤘고, 하물며 페티시fetish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12
하시모토 오사무橋本治도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근세까지 일본인이 유방에 별로 관심이 없던 까닭은 애초부터 의복의 구조에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목욕옷이라면 몰라도, 속옷襦袢을 입고 그 위에 옷을 겹쳐 입고 또 그 위에 띠를 매고 있어요. 게다가 옷깃 언저리도 딱딱하게 굳어 있어 손 넣을 틈이 없습니다. 그보다는 옷자락을 걷어 올리는 편이 훨씬 빠릅니다.13
하시모토 오사무는 이 가설을 어떻게 ‘발견’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요변 겐지 모노가타리窯変源氏物語』를 집필할 당시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헤이안시대 이래 하카마의 아래 띠를 풀어 앞쪽을 풀어헤치는 구조는 변하지 않는데, 히카루 겐지가 다마가즈라玉鬘를 성희롱하는 장면을 쓰려고 할 때 문득 깨달았습니다. 뒤로 돌아가 옷깃으로 손을 넣으려고 해도 넣을 수 없어요(웃음).
헤이안시대의 장속이라면 우치기袿의 겉옷을 보이기 위해 소매 밑을 꿰매 여미지 않았기 때문에 옷깃이 아니라 소맷부리를 통해서라면 가슴을 만질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하시모토 오사무는 일본 전통극인 가부키歌舞伎에서 십팔번으로 쓰이는 <나루카미鳴神>와 같이 뒤에서 가슴으로 손을 집어넣는 동작을 가장 먼저 상정한 것 같다. 다만 옷자락을 걷어 올리려고 하든, 아래 띠를 풀려고 하든, 길이가 있는 하카마의 구조를 고려하면 별로 손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하시모토 오사무의 가설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를 찾기는 어렵다.
헤이안시대 귀부인이 당의唐衣에 받쳐 입던 옷으로 몇 겹으로 끼어 입기도 했다. 또는 남자들이 직의直衣나 당의에 받쳐 입던 평상복을 일컫는다.
‘일본인은 성적 기관으로서 유방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주장은 뿌리 깊다. 요컨대 일본인은 근대에 들어 서구 문화의 영향을 받고서야 비로소 유방을 ‘발견’했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누드를 앞세운 서양 회화가 유방에 대해 ‘서양의 충격Western impact’을 던져 주었다는 것도 거의 정설로 굳어진 듯하다.
그러나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헤이안시대부터 가마쿠라시대의 이야기에도 유방을 성적 행위의 대상으로 삼았을 가능성을 보여 주는 흥미로운 사례가 있다. 헤이안시대 말기에 성립한 서사 『바꾸고 싶구나 모노가타리とりかべばや物語』는 배다른 형과 누이가 각각 크로스드레싱을 하고 벼슬길에 나아간다는 이야기다. 여성으로 태어났으면서도 남성으로 위장한 중납언이 색을 밝히는 재상중장에게 여자임을 간파당하는 장면을 자세히 살펴보자. 더운 계절 한낮에 중납언이 하카마에 얇은 옷을 걸친 모습으로 편하게 쉬고 있는데, 중납언의 이름뿐인 아내 시노키미를 연모하여 애를 끓이던 재상중장이 찾아와 자기도 느긋하게 쉬는 모습으로 이야기를 나눈다.
낮에 저택으로 찾아와 선선한 곳에서 부채질하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중납언은 붉은 생사로 짠 비단 하카마에 하얀 명주로 지은 얇은 옷을 입고 있었다. 마음이 녹아내리는 용모는 더위에 한층 요염한 빛이 더하니, 평소보다 화려하게 귀여움을 내뿜기 시작했다. 손짓, 몸짓, 하카마의 허리띠로 선명하게 드러난 허릿매, 하얀 피부는 눈을 굴린 것처럼 희게 눈부신 모습이다. 어디에도 비할 바 없는 아름다움이여, 아아 참으로 훌륭하구나. 이런 여자가 있다면 어찌 정성을 다해 유혹해 보지 않으랴. 이렇게 바라보고 있을수록 심히 마음이 흔들리고 정신이 아뜩해져 정신없이 다가가 곁에 누웠다.
서늘한 곳에서 곁에 있는 사람에게 부채질을 받으며 이야기하는 동안, 얇은 옷을 입고 유유자적하는 중납언의 얼굴이 더위 탓에 상기되어 평소보다 생기 있고 아름다워 보인다. 그뿐 아니라 하카마의 허리띠를 질끈 동여매어 잘록하게 들어간 허리의 윤곽과 하얀 피부색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하여 재상중장은 중납언을 남성이라 믿으면서도 갈등을 느낀다.
헤이안시대에는 이성애가 표준이 아니라 남색도 거의 동등한 성애로 여겨졌다. 따라서 재상중장이 ‘남성인 중납언’에 남색으로서 관심을 둔다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재상중장의 섹슈얼한 시선은 오로지 중납언의 허릿매에 쏠리고, ‘이런 훌륭한 여성이라면 얼마나 마음이 흔들릴까?’ 하며 중납언을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떠올리기에 이른다. 당시에는 성적인 미의 기준에 남녀 구별이 없었다고 보이므로, 이는 자연스러운 반응일 것이다. 그러나 재상중장은 ‘그’에게 새롱거리며 몸을 직접 만져 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가 ‘그녀’라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서 겉으로 유방이 솟아올랐느냐 아니냐는 중납언을 여성으로 판별하는 근거가 아니다. 직접적으로 유방을 만져 본 것이 명확한 근거임에 유의해야 한다. 재상중장은 우선 중납언의 유방을 확인하고, 그다음 하카마의 아래 띠를 풀어 성기를 확인하는 두 단계를 밟는다. 이 경우 유방이 수유만 하는 기관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성을 상징하는 기관이라는 것은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유방이 모성을 떠나 여성성의 상징이 됨으로써 ‘성애를 위한 유방’이라는 개념이 생겨나는 것 아닐까? 여성도 유방을 남성의 성적 시선이 미치는 대상으로 의식했음을 읽어 낼 수 있는 예가 『오치쿠보 모노가타리落窪物語』 권2에 나온다. 바로 의붓자식인 오치쿠보노키미가 유폐당해 병을 호소하자, 계모가 간계를 내어 색을 밝히는 덴야쿠노스케를 들여보내는 장면이다. 숨도 끊일락 말락 하며 “가슴이 아파요” 하는 오치쿠보노키미에게 계모는 이렇게 대꾸한다. “어머나, 가엾어라. 명치의 통증일지도 몰라. 덴야쿠노스케는 의사 선생님이니까 촉진해 달라고 하자꾸나.” 강조한 어구의 원문은 “손으로 더듬어 만지게 하자”로 ‘가슴께를 만지작거림’이라는 뉘앙스에 가깝다. 이 대목을 더 살펴보자.
“여기 가슴을 좀 보세요. 체한 것이 아닌지요. 손으로 만져 보고 약이라도 주세요.”[계모] 참견하고는 이윽고 일어섰다. “의사입니다. 병이 낫게 해 드릴게요. 오늘밤부터는 전적으로 날 믿으세요.”[덴야쿠노스케] 이렇게 말하고 가슴을 만지려고 손을 대었는데 여자[오치쿠보노키미]가 두려움에 떨면서 울기 시작했다.
덴야쿠노스케가 오치쿠보노키미의 가슴에 손을 넣어 만지작거리는 행위는 오치쿠보노키미의 격렬한 거부 반응을 볼 때 확실히 ‘진찰’의 수준을 벗어난다. 오치쿠보노키미는 이미 비밀리에 소장과 부부의 인연을 약속했기 때문에 이성을 모르는 소녀의 동요라기보다는 덴야쿠노스케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오늘밤부터는 전적으로 날 믿으세요”라는 덴야쿠노스케의 말은 자신이 오치쿠보노키미와 관계를 맺고 보살펴 주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유방이라고 명기하지는 않았지만, 유방을 포함한 흉부를 여성의 내밀한 부분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오치쿠보노키미에게 이토록 혐오감을 일으켰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근대 이전에는 유방이 비밀스러워야 할 성애의 기관이라는 인식이 전혀 없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지나친 단견이 아닐까 한다. 성애의 대상으로서 애무하는 유방이 표면으로 떠오르기까지는 이로부터 그리 머지않은 듯하다. 다음으로는 유방이 가장 흔하게 묘사된 춘화를 살펴보자.
젖•꼭•지
야스다 리오安田理央는 『거유의 탄생巨乳の誕生』에서 춘화에는 유방이 그려지지 않았다고 썼다.
대개 춘화에서는 옷을 입은 채 하반신에 걸친 옷자락만 들치고 섹스에 임하기 때문에 유방이 그려지지 않는다. 가끔 전라全裸로 나타나거나 가슴께에 유방이 엿보이긴 하지만, 매우 담백하게 묘사할 따름이다. 봉긋함은 간소한 곡선만으로 표현하고, 젖꼭지조차 그리지 않은 일도 드물지 않다.
그리고 유방을 애무하는 모습을 그린 춘화는 거의 없다. 적어도 춘화의 세계는 여성의 유방을 성의 대상으로 다루지 않는다.14
하시모토 오사무도 『성의 금기가 없는 일본性のタブーのない日本』에서 기타가와 우타마로喜多川歌麿가 그린 춘화의 유방을 이렇게 평가한다.
당연히 기타가와 우타마로도 춘화를 그렸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성인 남성이 젖가슴을 입으로 애무하지는 않습니다. 젖가슴을 빠는 것은 어린애의 행동이기 때문에 성인 남성은 입을 대거나 만지작거리지 않아요.15
그 밖에도 비슷한 주장은 많다. 그런데 야스다 리오가 말하듯 유방에 대한 성적 접촉이 춘화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정확하지 않다. 유방이 아니라 젖꼭지라면 관련 사례를 제법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젖꼭지에 관해서도 하시모토 오사무가 ‘입으로 애무하지 않는다’라고 말한 것도 잘못이다. 이것은 구체적인 그림을 제시하면 뚜렷해질 것이다. 『사랑하는 춘화恋する春畵』, 그리고 최근 도쿄와 교토에서 개최해 호평을 받은 <춘화전> 도록을 들추어 보기만 해도 젖꼭지를 주무르거나 입으로 빠는 남성을 그린 춘화를 여러 장 볼 수 있다. 실제로 어떠했는지 시대의 추이를 따라 살펴보자.
<그림4>는 우키요에浮世繪를 성립했다고 알려진 스즈키 하루노부鈴木春信의 <면화 따는 여자綿摘女>(1768년경)라는 작품이다. 남녀의 겉모습이 거의 구별되지 않는 것은 화가의 독자적인 화풍이다. 그런데 여자는 자신의 유방을 쥔 채 젊은이에게 젖꼭지를 물리고 있다. 또 도쿠가와德川 가문의 어용 화가인 가노 아키노부狩野彰信가 그린 <천계화람天癸畵濫>(1814)에서는 몸을 뒤로 젖힌 여자의 돌출한 젖꼭지에 남자가 입을 대고 있다.그림5 시대가 약간 내려간 1862년에는 우타가와 구니요시歌川國芳가 그린 <에도금江戶錦 오처문고吾妻文庫>에도 비슷한 구도가 나온다. 젖꼭지를 만지작거리는 모습으로는 구도가 특이한 작자 미상의 춘화 <탐닉도 단간耽溺圖断簡>에는 호색인 듯한 눈매로 성숙한 여인의 젖꼭지에 손가락을 대려고 하는 남자가 그려졌다.그림6 어느 것이나 성행위가 이루어지는 동안이기 때문에 젖꼭지를 빠는 행위가 쾌락과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다. 개중에도 <그림5>의 망아忘我 상태에 빠진 여자의 모습에서 보건대 ‘젖꼭지를 빠는 것’이 성적 테크닉의 하나였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춘화에서는 어디까지나 젖꼭지를 만지거나 입에 대는 행위가 주류이고, 유방이 솟은 것 자체를 문대고 주무르는 행위는 찾아볼 수 없다.
무로마치시대부터 에도시대 말기에 사회풍속이나 인간 묘사 등을 주제로 삼은 목판화.
원어는 若衆. 특히, 에도시대에 관례冠禮를 치르기 전의 남자.
생장 발육과 생식 기능을 촉진하는 인체 안의 물질. 또는 여자의 월경.
원어는 年增. ‘처녀다운’ 때를 지난 여자. 에도시대에는 20세 전후를 가리켰다.
그림4스즈키 하루노부, <면화 따는 여자>, 1768년경
그림5가노 아키노부, <천계화람>, 1814년
그림6작자 미상, <탐닉도 단간>, 1781~1801년
과연 춘화에서는 유방에 대한 성적 접촉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다만 젖꼭지에 주안점을 두지 않았다고 바꿔 말해야 한다. 기모노와 두꺼운 허리띠로 납작하게 눌려 있으며, 브래지어 같은 것으로 보호한 적도 없는 에도시대 여성의 유방에서는 서구 미술 속 나체와 같이 눈에 띄게 솟아오른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따라서 유방보다 뚜렷이 존재감을 드러내는 젖꼭지에 대한 접촉이 가시화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실제 성적 행동은 일단 논외로 하고, 젖꼭지를 빨거나 만지는 행위는 어떻게 춘화를 통해 ‘발견’된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기타가와 우타마로가 ‘야만바와 긴타로’를 주요 소재로 삼아 그린 일련의 모자母子 형상을 참고할 수 있다. 보통 야만바는 노파로 그려지지만, 여기 제시한 그림에서는 긴타로를 기르는 젊은 어머니로 표현된다. <야만바와 긴타로(젖먹이)>에는 머리카락이 흐트러진 야만바의 풍만한 오른쪽 유방을 한쪽 손으로 꼭 부여잡고, 또 다른 손으로는 왼쪽 젖꼭지를 만지작거리는 긴타로가 화면 가득 그려졌다.그림7 헤이안시대 모노가타리에서 유방을 수유 기관으로 규정하던 것과 같은 가치관인 듯하지만, 우에노 지즈코上野千鶴子는 이렇게 말한다.
일본 각지의 산에 산다고 알려진 요괴의 일종. 보통 인간 노파의 모습으로 아주 초라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데, 어떤 때는 나무껍질을 몸에 두르고 있다.
그림7기타가와 우타마로, <야만바와 긴타로(젖먹이)>, 1801~1803년
여기서 묘사한 ‘느끼는 유방’에 관해 누가 느끼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 쾌락은 여성의 쾌락이라 하겠습니다. 그것을 보고 남성도 동시에 발정을 일으키는 문화적 장치가 성립해 있다 할 것입니다.16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에로틱한 의도를 읽어 낼 수 있다. 춘화에 보이는 ‘젖꼭지를 빠는 남자’는 ‘젖을 먹는 갓난아기의 흉내’이고, 유방을 둘러싼 남성 페티시즘의 단적인 표현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것은 회화적 표현의 문제이고, 젖을 빠는 성적 기교가 에도시대에 생겨났다는 말은 아니다. 헤이안시대에 단바 야스노리丹波康賴가 편찬한 의학서인 『의심방醫心方』에는 중국의 방중술房中術 책을 인용해 여성의 성적 흥분을 드러내는 징후로서 ‘유견乳堅(젖꼭지가 서는 것)’을 적어 놓았기 때문에(권28 「방내房內」, 「오징五徵」) 어떤 식으로 젖꼭지를 자극해 왔는지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음양 사상을 바탕으로 규방에서 남녀(음양)가 성을 영위하는 방법 또는 기술.
남자 젖꼭지의 ‘발견’
마지막으로 남성의 유방과 젖꼭지에 대한 문화 연구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을 덧붙이고 싶다. 기노시타 나오유키木下直之는 『사타구니 젊은이: 남자의 벌거벗음은 예술일까股間若衆: 男の裸は蕓術か』와 『세기의 대문제: 신사타구니 젊은이せいきの大問題: 新股間若衆』에서 남성 나체상 사타구니 표현에 관해 흥미로운 문제를 제기했다.17 그가 다룬 나체상을 눈여겨보면 내 머릿속에서 젖꼭지의 유무라는 다른 의문이 떠오른다. 수영복을 입을 때와 마찬가지로 상반신을 벌거벗은 남성은 새삼스레 젖꼭지를 감출 필요가 없다고 여겨 왔다. 이는 남성 젖꼭지에서 에로틱한 요소를 추구한 적이 없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러나 현대 일본에 한정하면, 남성의 젖꼭지를 드러내는 게 부끄럽다는 인식이 종종 화제에 오른다. 맨살에 와이셔츠를 입는 서구 남성과 달리, 일본에서는 와이셔츠 안에 속옷을 입는 습관이 있다. 이는 땀을 흡수하려는 의도뿐 아니라 젖꼭지를 감추라는 기대에 부응하는 것으로 보인다. ‘(남자 주제에) 젖꼭지가 서 있다’고 조롱하는 성희롱 담론도 들은 바 있다. 또 BLboy’s love(남자들의 사랑) 만화를 보면 남성의 젖꼭지가 성애의 대상으로 비난받는 장면이 당연한 듯 받아들여진다.18
여성의 젖꼭지가 애무의 대상으로 여겨진다는 점과 춘화에서 가시화된 경위를 감안하면, 남성의 젖꼭지가 일반적으로 널리 ‘발견’의 대상이 될 날은 그리 멀지 않았다. 그때 남자들은 부끄러워하면서도 젖꼭지를 감출까? 아니면 빳빳하게 튀어나온 젖꼭지를 자랑스럽게 내보일까? 기대를 보내며 이쯤에서 논의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