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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 40분 한산한 역사. 지하철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검은 마스크로 입을 가리고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는 노란 고무줄로 묶었다. 왼쪽 가슴 포켓에 손바닥 크기의 스프링 노트를 꽂고 한 손엔 유리 테이프가 붙은 전단지를 들고 있다. 배낭을 껴안고 잔뜩 몸을 웅크린 청년과 코끝에 안경을 걸친 채 십자 낱말 퀴즈를 하는 노인. 노파의 품에 안겨 으르렁거리는 몰티즈. 노란 옷을 입은 살찐 소년과 커다란 비닐봉지 두 개를 바닥에 놓고 큰 목소리로 전화 통화를 하는 아주머니. 그들은 곁눈으로 흘낏 남자를 쳐다보곤 빠르게 고개를 돌린다. 의심쩍다. 불편하다. 불쾌하잖아. 위험해. 기분 나빠. 더러워. 무심해 보이는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남자는 승객들 사이를 통과하며 유리 테이프가 붙은 전단지를 벽에 붙인다. 무정한 얼굴은 어떤 말, 어떤 시선에도 개의치 않을 것처럼 뻔뻔해 보인다. 벽처럼 딱딱한 사람들 사이를 통과할 때, 문이 열린 짧은 시간에 다이빙하듯 빠져나갈 때, 계단을 오를 때, 사방의 뾰족한 시선이 목과 팔과 다리를 찔러 올 때, 남자는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나는 나무다. 나는 돌멩이다. 나는 상처받지 않는다.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부끄러움을 모르고 분노를 느낄 줄 모른다. 옷깃을 여미고 눈을 가늘게 뜬 채 앞으로 걷고 또 걷는 그의 모습은 메마른 겨울 숲을 걷는 벌목꾼처럼 보인다. 위험하고 어쩌면 서글픈…….
그러나 한 여자를 발견한 순간 남자는 멈춰 서고 말았다. 철컥, 발목을 무는 덫처럼 느닷없고 예측 불가한 멈춤이었다. 짧게 커트한 탈색 머리. 두 치수쯤 큰 야상 점퍼와 발목까지 내려온 고동색 치마. 한쪽 어깨에 무늬 없는 아이보리 천 가방을 메고 발소리도 없이 달팽이처럼 미끄러져 지나가는 작은 여자. 지하철 문이 열렸고 여자는 발을 끌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 바둑돌처럼 메마른 그의 눈동자에 순간 물빛이 돌았다. 갑자기 숨이 차고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모르는 마비된 동물처럼 팔다리가 부르르 떨렸다. 우물쭈물하는 사이 한 학생의 가방에 종이 상자가 걸려 찢어져 전단지가 쏟아지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노골적인 혐오가 담긴 사나운 눈빛들.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열린 문과 조금씩 작아지는 여자의 뒷모습과 바닥의 전단지를 불안한 눈으로 번갈아 쳐다보다 문이 닫히기 직전 열차를 빠져나왔다.
그녀는 5번 출구로 빠져나가 오후의 거리를 걸었다. 어깨를 안쪽으로 숙이고 시선을 바닥을 향해 걷는 걸음이 너무 느려 행인들은 계속 그녀를 추월해 지나갔다. 뒤따라 걷는 그의 걸음이 자꾸 뒤엉킨다. 장애물도 없는데 발목이 꺾이고 내리막도 없는데 앞으로 넘어질 뻔한다. 얼어붙은 호수든 뜨거운 사막이든 흔들림 없이 잘만 걸었던 날렵한 두발이 물속에 잠긴 듯 무겁기만 했다. 여자는 관공서 앞 허름하게 서 있는 천막으로 들어갔다. 의자에 앉아 졸고 있는 간사에게 인사하고 바닥에 모로 누워 잠든 이에게 얇은 이불을 덮어 주었다. 바닥을 뒹구는 종이컵과 비닐봉지를 주워 주변을 정리했고 가방에서 텀블러를 꺼내 마른 꽃이 든 티백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바람이 불었다. 천막과 깃발은 펄럭였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 구름 낀 하늘을 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는 플라타너스 나무 뒤에 서서 그녀를 봤고 자신도 모르게 같은 속도로 숨을 내쉬었다.
남자는 여자 앞에 섰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손가락 마디를 만지고 있었다. 오리온자리를 닮은 왼쪽 목덜미의 네 개의 작은 점과 왼쪽 엄지와 검지 사이의 둥근 흉터. 그는 기침이 나오려 하는 걸 간신히 참고 그녀와 눈이 마주치길 기다렸다. 그녀는 서서히 눈을 들었다. 둘의 눈은 마주쳤다. 떨리는 그의 눈동자와 달리 그녀의 눈동자는 차분하다. 그 순간 그는 마스크를 벗고 그녀의 이름을 외칠 뻔했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그 이름을 꺼내는 순간 치즈가 눈을 뜰 것이다. 할퀴고 물어뜯을 것이며 그 이름을 찢어 놓을 것이다. 그는 목구멍 깊숙한 곳에 이름을 머금고 있다가 그냥 삼켰다.
그녀는 아, 하며 서명지를 내밀었다. 〈폭력 없는 세상을 만들어 주세요.〉 그는 잠시 망설이다 서명란에 이름을 써 넣었다. 그녀는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자신의 이름을 보고도 그녀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는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낡은 파우치를 꺼냈다. 그녀는 경계하는 눈으로 한 걸음 떨어져 그의 행동을 말없이 지켜봤다. 그는 파우치의 지퍼를 열고 뭔가를 꺼냈다. 까맣게 손때가 타 까만 석탄처럼 보이는 주먹 크기의 나무 팽이였다. 그는 팽이의 심에 청록색 줄을 걸고 손목을 일정한 패턴으로 돌려 가며 꼼꼼하게 줄을 감았다. 그리고 팽이를 던졌다. 허공을 향해 날아가는 팽이와 그것을 회전시키며 바닥에 부드럽게 안착시키는 줄 사이에 근사한 뭔가가 있었다. 그녀는 약간 놀란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팽이는 제자리에서 빠르고 고요하게 돌았다. 회전하는 소리만 미세하게 윙윙 울렸는데 그녀는 그 모습을 뭔가에 홀린 듯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고개를 들고 그를 봤다. 서명지의 이름을 읽고 다시 팽이를 봤다. 그리고 천천히 시선을 돌려 그의 눈을 깊숙하게 바라봤다.
둘로 나뉜 공기. 남자와 여자 사이에 이중창 같은 투명한 벽이 가로막고 있었고 그 사이에 팽이는 돌고 있었다. 그것은 정지 비행하는 작은 맹금류처럼 불안한 긴장을 뿜고 있었다. 그녀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하나씩 뜯어봤다. 정체불명의 이 남자를. 하나로 묶은 긴 머리카락. 끝은 갈라졌고 결은 고르지 않았다. 두꺼운 갈색 뿔테 안경 뒤에 작고 까만 눈동자. 코와 입을 덮고 있는 검은 마스크. 그리고 미간의 번개 모양의 흉터. 그녀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하고 입을 벌려 웃었다.
너구나.
팽이가 쓰러지고 여자는 팽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한참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손을 뻗어 그의 가슴을 툭 쳤다.
너였어.
마스크 안이 따뜻해진다. 치즈야. 오늘 유독 조용하네. 기억나? 너에게 이름을 지어 준 사람이야. 옛 주인의 냄새를 찾는 짐승처럼 치즈는 둥글게 몸을 말고 겁먹은 눈으로 그가 보는 것을 함께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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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고양이라고 생각해 보면 어때?
무슨 소리야.
일단 이름을 지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