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강 시작은 울림이다
반갑습니다. 광고 만드는 박웅현입니다. 이 강의를 들으러 오신 분들이라면 『인문학으로 광고하다』라는 책으로 기억하기 쉬우실 겁니다. 지금부터 ‘책 들여다보기’라는 주제로 여러분과 함께하겠습니다.
광고하는 사람이 ‘창의력’이 아닌 ‘인문학’ 강의, 그것도 ‘책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실 겁니다. 사실 새로운 만남을 시작하면서 조금 두렵고 많이 걱정스럽습니다. 그러나 하려고 합니다. 창의성이 필요하다는 광고를 이십사 년간 만들 수 있었던 바탕에는 ‘인문학’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책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림, 음악, 영화 등에서도 분명 많은 영감을 얻고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그중에서 서로 소통하고 교감하기에 책만 한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강의에 오신 분 중에는, 혹은 이 강의 내용을 책으로 읽게 될 독자 중에는 저보다 인생의 폭도 더 넓고, 독서량도 많은 분들이 계실 겁니다. 혹은 저보다 어리다면 제 나이쯤 이르렀을 때 저보다 훨씬 많은 책을 읽으실 분들도 계실 거고요. 그래서 책 이야기를 함부로 해도 될까 우려가 앞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읽고 느낀 것을 진심으로 전달하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러분과 만나면서 제가 책을 통해 지나쳤던 것들을 알아내고, 그 안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했으면 합니다. 만남은 삼 주 간격으로 준비했습니다. 그 시간 동안 제가 말씀드린 책에 관심이 생긴다면 읽어보시길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그때 여러분이 책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해, 제가 놓친 것들을 잡아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서로 감동을 주고받았으면 합니다.
저는 여느 독서가들과 비교했을 때 독서량이 평균에 미치지 못할 겁니다. 매번 읽은 책들을 메모해놓는데, 통계를 내보면 일 년에 읽는 책이 서른 권에서 마흔 권 사이입니다. 한 달에 세 권 정도 읽는 건데 독서량이 많은 건 절대 아니죠. 대신 저는 책을 깊이 읽는 편입니다. 한 문장 한 문장을 꼭꼭 눌러 읽습니다. 여기 제가 써놓은 것들을 프린트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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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저는 이렇게 책을 읽으면서 좋은 부분들, 감동받은 부분들에 줄을 치고, 한 권의 책 읽기가 끝나면 따로 옮겨놓는 작업을 합니다. 이 강의의 목표는 이런 방식의 책 읽기를 통해 제가 느낀 ‘울림’을 여러분께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강의의 또 다른 목표가 있다면, 여러분이 제게 ‘울림’을 준 책을 사고 싶게 만드는 겁니다. 결국 저는 광고하는 사람이니까요.(웃음)
파도타기를 해보진 않았지만, 책 읽기는 파도타기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파도타기는 잘하면 아주 재미있지만, 잘못하면 물만 먹고 말 겁니다. 책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어떤 책은 찍어 읽어야 하고, 어떤 책은 흘려 읽어야 하고, 어떤 책은 문맥으로 읽어야 하는데, 그게 안 잡히면 책이 재미없는 겁니다. 이렇게 물만 먹다 포기할까봐 책을 함부로 추천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제게 어떤 책이 좋으냐고 물었을 때, 대뜸 제가 좋아했던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을 추천했다고 칩시다. 물론 누군가는 저와 같은 감동을 받을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어려워하며 지레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잘못된 추천으로 책을 덮어버리게 할 수 있는 것이죠. 하지만 천천히 시간을 두고 이야기하면서 준비운동을 제대로 하면, 대부분 파도 위에서 물살을 즐기게 됩니다.
사실 이 강의 기획의 모태가 되었던 것은 딸과 함께한 독서수업이었습니다. 지금은 대학생인 제 딸이 고등학생일 때 일이에요. 어느 날 딸아이가 친구들이 과외를 한다며 이야기를 하는데 입이 떡 벌어졌습니다. 여름방학에만 하는 논술 과외를 하려면 두 달에 대학 등록금 서너 배의 금액을 지불해야 한다는 겁니다. 세상이 미쳤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제 딸에게 아빠가 해주마 했습니다. 매주 일요일 1시부터 3시까지 팔 주 동안 딸아이와 친구 둘을 집으로 불러 제가 읽은 책들을 설명해줬습니다. 처음엔 어려워할 줄 알았는데 차근차근 해나가니 재미있어하더군요. 그러면서 이런 강의를 구상하게 됐습니다. 문득 다른 분들께도 제게 울림을 준 책들을 소개해서 좀더 많은 사람들이 책 읽는 즐거움을 느꼈으면 싶었던 겁니다.
이제 저에게 울림을 주었던 책들을 말씀드릴 겁니다. 제가 김훈을 왜 좋아하는지, 알랭 드 보통에 왜 빠지는지, 실존주의 성향이 짙은 지중해풍의 김화영, 알베르 카뮈, 장 그르니에, 니코스 카잔차키스에 왜 전율하는지요. 그리고 아무도 이길 수 없는 ‘시간’이라는 시련을 견뎌낸 고전들의 훌륭함에 대해 이야기할 겁니다.
오늘은 첫 시간으로 제가 어떤 식으로 어떤 것들에 감동을 받는지 설명할까 합니다. 그러기 위해 준비한 책이 판화가 이철수의 판화집 세 권(『산벚나무, 꽃피었는데』 『마른풀의 노래』 『이렇게 좋은 날』)과, 최인훈의 『광장』, 이오덕이 엮은 『나도 쓸모 있을걸』입니다. 만약 오늘 제가 성공한다면 여러분이 이 시간이 끝나고 말씀드린 책들을 사야겠다고 마음 먹지 않을까요? (웃음)
판화가 이철수의 다른 시선
여러분은 판화가 이철수를 좋아하시나요? 제가 이철수의 판화를 처음 만난 것은 누군가의 책상 위에서였습니다. 어느 날 동료의 책상 위에 있는 이철수의 『산벚나무, 꽃피었는데』의 책장을 무심히 넘겼는데 순간 몇몇 페이지에서 눈, 아니 마음이 멎었습니다. 기막히게 청각을 시각화해내는 표현들, 내가 그동안 지나쳤던 것들에 대한 세심한 시선들이 단박에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그 책으로 이철수를 처음 접한 저는 바로 『마른풀의 노래』, 그리고 시간이 꽤 지난 후에 『이렇게 좋은 날』까지 구입해 읽었는데, 한 페이지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 아주 좋은 책이었어요. 한 장 한 장 모든 작품이 생각을 하게 하지만 이 자리에서 몇몇 작품만 소개해드릴게요.
이철수, <마음, 쏟아지는구나!>, 98.0×93.0cm, 1994년.
처음 소개해드릴 작품은 <마음, 쏟아지는구나!>라는 작품인데요. 화면 하단을 채운 대나무 숲에서 수많은 점들이 여백으로 날아올라갑니다. 여백은 하늘이고 점은 새들입니다. 빈 공간인데 하늘로 보이고, 그냥 찍어둔 듯한 점인데 새들로 보여요. 언젠가 경포대 대나무 숲에서 수많은 새들이 한꺼번에 하늘로 날아오르는 걸 보고 압도된 기억이 있는데 이철수의 이 작품을 보는 순간 마치 그때 그 광경을 마주한 것 같았어요. 새가 쏟아지는구나, 대나무 숲으로 새가 다투어 몰려나오는구나. 내가 본 자연의 스케일을 다 잡아서 한 폭에 담아냈다는 것이 그냥 놀라울 뿐이었어요.
그리고 또 하나 <寂照(적조) ― 햇살>이라는 작품이 있는데요.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건 태양빛이에요. 그걸 어떻게 표현했느냐 하면, 툭툭 친 선밖에 없어요. 아래 구석에 놓인 나무도, 위에 뜬 태양도, 내리쬐고 있는 햇살도 전부 검은 선으로 단순하게 그려놨어요. 그냥 선만 죽죽 그어 넣은 것인데 진짜 햇살 같은 느낌이에요. 실제 눈으로 보이는 3차원의 넓은 스케일을 2차원의 좁은 지면에 모두 집약해놓은 힘이 대단하지 않나요? 이 작품은 제가 뉴욕대학교에서 공부할 때 발표 중에 생략된 것, 여백의 미美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보여줬어요. 그 자리에 있던 교수와 학생들 모두 용감하고 대담한 표현이라며 놀라워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소리 ― 다듬이>라는 작품에서는 청각을 시각화했다는 게 느껴져요. 단단해 보이는 다듬잇돌 위로 끊어 친 듯한 선들이 방향 없이 뻗어 있는데요. 마치 다듬잇돌 두드리는 방망이 소리가 들리는 것 같죠. 귓전에 울리는 것 같아요. 단순한 선으로 이렇게 온 감각을 일어서게 하는 것이 이철수의 판화입니다.
이철수는 원래 민중판화를 했습니다. 독재정권 시대에 다소 거친 느낌의 선 굵은 걸개그림 아시죠? 그런 작품들을 주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지나가면서 다른 분위기의 작품을 만들어내기 시작합니다. 불교 쪽에 관심이 많아서인지, 책에 보면 선禪 느낌의 담론들을 판화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인 짧은 설명은 저에게 충격을 주었는데요, 1995년 판 『마른풀의 노래』가 처음이었습니다. 이것을 읽고 책에 ‘족탈불급足脫不及’이라고 써놓을 정도였습니다.
염주끈이 풀렸다
나 다녀간다 해라
먹던 차는
다 식었을 게다
새로 끓이고,
바람 부는 날 하루
그 결에 다녀가마
몸조심들 하고
기다릴 것은 없다
이 글은 좌탈을 소재로 한 연작 중에서도 <坐脫(좌탈)>이라는 작품 속 글입니다. 판화는 좌탈한 노승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요. 꼿꼿이 앉아 있는 노스님 앞에는 작은 찻주전자가 놓여 있고 그 곁의 염주는 실이 풀려 염주알이 흩어져 있습니다. ‘좌탈’은 스님들이 앉아서 해탈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이 작품과 글을 보고 좌탈이 어떤 것인지 아주 명료하게 알게 됐습니다. 장황한 설명으로도 갸우뚱하던 것이 단번에 이해가 된 것이죠. 그래서 대단한 책이라는 생각에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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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기에 매달린 땅콩과 떨어진 땅콩 몇 개가 그려진 <땅콩>이라는 작품에는 이렇게 씌어 있습니다.
땅콩을 거두었다
덜 익은 놈일수록 줄기를 놓지 않는다
덜된 놈! 덜떨어진 놈!
이 한 줄만으로도 덜된다는 게 이런 얘기구나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익으면 떨어지는데, 익지 않아 ‘덜떨어진다’는 겁니다. 이 한 줄이 자연현상이 인간사로 넘어오는 순간입니다. 현기증 나는 차이가 느껴지시나요? 그냥 자연현상인데 순식간에 사람의 것으로 이입이 됩니다. 이철수는 또 저에게 동양철학과 서양철학, 동양의 삶의 태도와 서양의 삶의 태도를 가장 극명하게 비교하게 해주었는데요, 그것은 역시 판화 <가을사과>에 쓴 한 줄의 글이었습니다.
사과가 떨어졌다
만유인력 때문이란다
때가 되었기 때문이지
사과가 떨어진 걸 만유인력 때문이라고 기어이 과학적으로 밝혀내고야 마는 것은 서양의 장점입니다. 그리고 동양의 장점은 때가 되어서 떨어지는 걸 왜 안달복달 난리들이야 하며 자연을 아우르는 철학입니다. 과학적으로 끌고 온 서양의 담론과 노력은 인정하지만, 동양의 것은 이렇게 쾌도난마快刀亂麻의 느낌이에요. 칼로 퍽 쳐서 단숨에 꼬인 실타래를 확 풀어버리는 맛이 있죠. 서양의 장점이 가져다준 문명적인 혜택, 충분히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의 자연적 재앙도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이제 자연현상을 ‘때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파악하는 동양의 지혜가 다시 힘을 발휘해야 할 때가 되었구나 생각합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런 것이 통찰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저에게 창의력이 무엇이냐고 자주 묻는데, 저는 이런 통찰이 창의력이라 생각합니다. 저도 사과를 많이 봤지만, 뉴턴이나 이철수와 같은 생각은 한 번도 못 해봤습니다. 같은 것을 보고 다른 것을 생각할 줄 아는 것이 이 사람의 힘인 것이죠.
논에서 잡초를 뽑는다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벼와 한 논에 살게 된 것을 이유로
‘잡’이라 부르기는 미안하다
― <이쁘기만 한데…> 전문
이것도 참 좋은 한 줄입니다. 잡초라고들 하는데 관점을 벼로 놓았기 때문에 잡雜이 된 겁니다. 풀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기분 나쁘겠습니까? 텍스트만 죽 말씀드리고 있는데, 그림을 같이 봐야 감동을 제대로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사보셔야죠. 왠지 약장수가 되어가는 느낌이네요.(웃음) 자, 몇 작품 더 소개하겠습니다. <가난한 머루송이에게>라는 작품입니다. 가느다란 가지 끝에 열일곱 개의 작은 머루송이가 달려 있습니다. 누군가가 겨우 요거 달았냐 묻습니다. 머루송이가 뭐라고 답했을까요?
최선이었어요
…
그 말에 질문한 이는 비난의 시선을 거두고 사과합니다.
그랬구나…
몰랐어, 미안해!
그렇죠. 우리는 적은 머루송이를 보고, 요만큼밖에 못 달아놨느냐 혀 차는 소리를 하는데 머루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했을 겁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했는데 인간의 관점으로 적다고 말해 미안하다고 하는 거죠. 우리는 무심하게 흘려넘기지만 이철수는 사방 모든 것에서 스토리를 찾아냅니다. 비록 처음부터 그런 시선을 갖진 못했어도 책을 읽으면 따라갈 수 있게 됩니다.
여기 <작은 선물>을 보시면, 작고 붉은 알 하나가 놓여 있습니다. 그 아래에,
꽃 보내고 보니,
놓고 가신
작은 선물
이렇게 씌어 있죠. 이 작은 붉은 알이 무엇인 것 같습니까? 꽃이 놓고 가신 선물이 뭘까요?
향기로운
열매
탄성이 절로 나오죠? 이렇게 뜻밖의 시선에 놀라고 나면 그다음부터 저도 그냥 지나치게 되지 않습니다. 열매, 그냥 보아넘기지 않죠. 아, 이 자리에 꽃이 있었겠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이철수의 책은 이렇게 평소에 못 보던 걸 보게 만들어줬습니다. 그래서 참 고맙습니다. 인간의 글 안에 자연을 해석하기 위한 노력을 담는 것이 쉽지는 않을 텐데 말입니다. 소설가 김훈에 따르면 글쓰기는 자연현상에 대한 인문적인 말 걸기라고 합니다. 자연은 자연이고 인간의 글은 인문人文이잖아요. 그런데 자연을 해석하려고 인문이 노력을 하는 겁니다. 쉽지 않죠? 조금 설명을 덧붙인다면,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예전에는 김소월의 「산유화」라는 시를 좋은 줄 모르고 들었습니다. ‘그게 뭐야, 당연히 산에 꽃이 피지 뭐’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김훈이 이렇게 안내해줬습니다. “이 노래는 말을 걸 수 없는 자연을 향해 기어이 말을 걸어야 하는 인간의 슬픔과 그리움의 노래로 나는 들린다”라고 말이죠. 멋진 걸 보고 ‘우와’라는 표현밖에 못 하는 사람과 다르게 그들은 기어이 말을 걸고 싶은 인문적인 갈증이 있는 것입니다. 김훈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비로소 이 시가 다시 보였습니다. 이철수의 말 걸기도 훨씬 잘 이해가 됐고요. 자, 다시 이철수로 돌아가볼까요? 삼층석탑이 그려진 판화 <감은사지에서 듣는다>의 아래에는 이렇게 씌어 있습니다.
어찌 오셨는가?
방금들 많이 다녀가셨지…
흔하게 많이 오는
그 사람이신가?
탑이 하는 말이죠. 이 작품은 선 여덟 개로 삼층석탑을 표현했어요. 감동적이에요. 우리는 모두 처음 이 탑을 보러 가지만 천 년 가까이 그 자리에 있던 감은사의 탑은 사람이 지겹지 않을까 싶어요.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맨날 비슷한 모습의 사람들이 비슷한 짓을 하고 다녀갔을 테니 말입니다. 키도 비슷하고, 생김새도 비슷한 인간들이 와서 보고 아! 감탄하고 돌아서고 또 다를 것 없는 인간들이 몰려와 한 바퀴 돌아보며 아! 하고 가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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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시선의, 관점의 변화 같은 것들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씩 훈련이 되는 겁니다. 인간 중심의 시선을 돌릴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이철수는 이런 말도 합니다.
깊은데
마음을 열고 들으면
개가 짖어도
법문
― <개소리> 전문
저는 이 한 줄을 읽고 크게 동감했습니다. 이런 삶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음을 열고 들으면 개가 짖는 소리도 법문처럼 들릴 수 있지만, 마음을 닫고 들으면 어떤 좋은 얘기라도 시끄럽게 개가 짖는 소리로만 들리는 피폐한 삶을 살게 될 테니 말입니다. 개가 짖는 소리에서 법문을 들을 정도면 얼마나 풍요로운 삶이겠습니까?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읽겠습니다.
성이 난 채 길을 가다가, 작은 풀잎들이 추위 속에서 기꺼이
바람맞고 흔들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만두고 마음 풀었습니다.
― <길에서> 전문
화가 나서 걸어가고 있는데 아주 추운 날 작은 풀잎들이 바람 맞으면서 견디고 있는 걸 본 겁니다. 그 풀들은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 추위와 바람이 얼마나 야속하겠어요. 그런데 화를 안 내잖아요. 그냥 견디잖아요. 그걸 보고 ‘얼마나 대단한 일이라고 화를 내서 뭘 하겠어’ 생각을 했다는 거죠. 이게 좋아요. 이런 것들이 좋아요. 저도 요즘 인터뷰하면서 “힘들 때 어떻게 하냐”는 질문에 그냥 “견딘다”라고 답합니다. 어쩌겠어요. 사람들은 갈수록 이기적이 되어가는데 이런 글을 통해서 이렇게 동식물에게 배우는 거죠. 이와 유사하게 제가 좋아하는 또 다른 문장이 있습니다. “꽃잎 쏟아지는 벚나무 아래서 문명사는 엄숙할 리 없었다”라는 김훈의 문장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문명사만 엄숙하다고 하잖아요. 그러나 경이로운 자연 앞에서 나 하나의 인간사가 전부가 아닌 것이죠. 4월 말, 봄이 본격적으로 제 모습을 드러낼 때의 연둣빛을 상상해보세요. ‘모두 다 초록이지만 전부 초록은 아닌’ 깜깜하고 메마른 땅에 기적같이 올라오는 엄청난 연둣빛의 세상 말이에요. 그런 날 인간의 감정이 얼마나 하찮으냐는 얘기입니다. 프레젠테이션에서 한두 마디 더 하는 것 따위가 뭐가 중요하냐는, 인간 중심으로만 세상을 보지 말라는 말로 들려서 읽을 때마다 숙연해지기까지 하는 구절입니다. 이렇게 이철수의 판화집 속에서의 ‘울림’은 가지를 뻗어 다른 문장들을 만날 때 똑같은 혹은 더 큰 감동을 줍니다.
이철수의 판화집은 광고를 하는 저에게 업무적으로도 도움이 참 많이 됐던 책입니다. 마음을 먼저 빼앗긴 것은 텍스트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레이아웃도 안정감 있고 정돈되어 있는 것이 아주 훌륭했어요. 바디카피와 이미지의 구성을 늘 고민해야 하는 저의 입장에서 공부하기 좋은 견본이었죠. 레이아웃은 이철수의 판화뿐 아니라 우리나라 동양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요, 광고를 공부하는 학생들이라면 동양화의 세밀한 구성을 눈여겨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작품마다 찍힌 낙관의 위치도 다 다른데 딱 그 작품과 어울리게 꼭 맞는 자리에 있다는 것도 신기한 일입니다.
이렇게 이철수의 판화에서 힌트를 얻어 만든 것이 풀무원 지면 광고였는데요. 콩 하나만 놓고 주변을 비워버렸어요. 그래도 꽉 찬 느낌입니다. 이철수처럼 여백을 살려서 만든 광고예요. 좋은 책을 발견하는 것은 이렇게 뜻밖의 성과를 가져다주기도 합니다. 여러모로 즐거운 일이에요.
풀무원 지면 광고
콩입니다. 안까지 잘 보실 수 있도록 반으로 잘랐습니다. 혹시 이 콩이 유전자 변형을 했는지, 보이십니까?
이 콩이 유전자 변형을 했는지 안 했는지, 유전자 변형이 유해한지 무해한지, 그런 걱정, 주부들의 몫이 아닙니다. 풀무원의 몫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냥 풀무원을 고르세요. 그런 걱정, 풀무원이 대신해드립니다.
운문처럼 쓴 최인훈의 산문
이철수의 판화집 『마른풀의 노래』를 읽고 다음으로 펼쳤으면 하는 책이 있다면 최인훈의 『광장』입니다. 이철수가 그림과 텍스트를 함께 두고 단 한 줄로 충격을 주었다면, 최인훈은 산문 곳곳에 운문처럼 배치한 문장들로 저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저는 『광장』을 읽고 시처럼 쓴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산문은 운문에 비해 술술 읽히기 마련인데, 최인훈의 『광장』은 산문임에도 곳곳에서 문장이 각인되는 소설이었습니다. 소설 속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늙은 군인이 훈장 자랑하듯
전성기를 가졌던 사람들의 모습을 이 한 구절에 다 표현하고 있습니다. 늙은 군인이 훈장 자랑하는 모습을 생각해보세요. 막걸릿잔을 앞에 놓고, 무용담을 들려주는 모습이 연상됩니다. 이 평범한 서술문에서 폭 넓은 삶의 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또 이 문장은 제가 우리 딸한테 자주 들려주는 건데요,
삶은 실수할 적마다 패를 하나씩 빼앗기는 놀이다.
삶에서 실수는 필수불가결한 것입니다. 그러나 줄여야 하죠. 왜냐하면 하나의 실수로 인해 하나의 가능성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옹의 말대로 “지금 나의 불행은 언젠가 내가 잘못 보낸 시간의 결과”라는 건데요. 돌아보면 정말 그렇습니다. 내가 중고등학교 때 했던 어떤 행동이 오 년 후의 나와 다 연결이 되거든요. 인생에 정말 공짜란 없습니다. 그걸 전 최인훈의 한 마디를 통해 배운 것입니다.
보고 만질 수 없는 <사랑>을,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게 하고 싶은 외로움이, 사람의 몸을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이 구절을 보는 순간 저는 이게 글의 힘이라는 걸 느꼈습니다. 사랑이 먼저라는 이야기인데요. 사랑이 먼저 존재했는데 이 사랑은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겁니다. 그런데 이걸 보고 싶고 만지고 싶어서 사람의 몸이 만들어졌다는 거죠. 정말 아름다운 시선 아닙니까? 지금 말씀드린 것들은 『광장』 속의 단 몇 구절일 뿐입니다. 그 속에는 더 대단하고 아름다운 문장들이 숨어 있습니다. 그것들을 찾아내 읽으면서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같은 사람으로서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배가 아프기도 했고요.
사랑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이 책을 읽고 사랑에 대한 최인훈의 시선에 감탄을 했던 내가 어느 날 완벽히 반대 시선에 있는 김훈의 글을 읽었습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입과 항문이다. 나머지는 다 부속기관이다.
영적인 사랑이 있어서 몸이 만들어졌다는 최인훈의 이야기와 전혀 상반되는 것이지만 이것도 맞는 말인 겁니다. 냉정하게 얘기하면 인간은 먹고살기 위해 존재하는 겁니다. 먹고사는 게 다예요. 태어났으니까 살려고 애쓰는 거죠. 그렇다면 기본적인 게 입과 항문이라는 겁니다. 숨을 쉬어야 하니까 폐가 생기고, 뭔가를 잡아먹으려고 하니까 손과 발이 생긴 거고, 동물들에게 힘으로는 못 이기니까 머리가 커진 것이고, 종족번식을 해야 하니까 섹시하게 보이려고 노력하게 된 거죠. 그러니 입과 항문은 근간이라는 겁니다. 이 한 마디는 똑같은 우리를 완전히 동물의 수준으로 끌어내리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최인훈의 문장을 읽고 김훈의 문장을 읽으면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에 있다가 갑자기 지하 20층까지 떨어지는 것 같아요. 현기증 나는 경험을 최인훈과 김훈을 통해 하는 겁니다.
『광장』에 대해 몇 가지 더 말씀드릴게요.
몸은 길을 안다.
이 짧은 문장 속에도 많은 이야기가 있죠. 먹고 싶은 것을 먹는 것만큼의 다이어트가 없다고 해요.어려서 채소 안 먹다가 나이 들어 나물 좋아하게 되는 게 몸이 요구하기 때문이죠. 그런 측면에서 몸은 길을 안다는 거예요. 일본 작가 마루야마 겐지도 비슷한 얘기를 했는데요. “육체와 사는 동안 난 육체에 집중하겠다. 영혼에 집중하는 건 육체와 헤어진 다음에도 할 수 있다.” 인간들이 실존과 실제를 무시하고 영혼과 사상만 중시하는 것에 반대하는 의미에서 한 말인데 다시 한 번 삶의 방식에 대해 생각하게 해줍니다.
앞의 문장들 무심히 넘기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꼼꼼히 눌러 읽으면 새로운 시선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광장』을 두 번 읽었지만 곧 다시 읽어볼 생각입니다. 다시 읽으면 또 다른 보석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죠. 얼마 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세번째 읽었는데 지난 두 번은 읽은 게 아니더군요. 다 놓쳤어요. 아마 『광장』도 다시 읽으면 또 잡히는 게 있을 겁니다. 만약 여러분도 이미 읽으셨다면 다시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저는 책 읽기에 있어 ‘다독 콤플렉스’를 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독 콤플렉스를 가지면 쉽게 빨리 읽히는 얇은 책들만 읽게 되니까요. 올해 몇 권 읽었느냐, 자랑하는 책 읽기에서 벗어났으면 합니다. 일 년에 다섯 권을 읽어도 거기 줄 친 부분이 몇 페이지냐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줄 친 부분이라는 것은 말씀드렸던, 제게 ‘울림’을 준 문장입니다. 그 울림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숫자는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보고 잊히는 것과 ‘몸은 길을 안다’ 이 구절 하나 건져내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최인훈의 『광장』을 다시 읽는다면 저는 아마도 지금보다 더 많은 부분에 줄을 칠 것 같습니다.
이오덕이 엮은 창의성의 보고
이제 한 권만 더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이 책은 아이들의 시집입니다. 평생을 아동문학가이자 교육자로 살았던 고故 이오덕 선생이 엮은 『나도 쓸모 있을걸』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이오덕 선생이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읽은 아이들의 시를 모아놓은 것입니다. 읽어보시면 정말 재미있습니다. 이 책 속의 아이들은 창의적인 일이나, 새로운 발상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스승입니다. 보시겠습니까?
엄마, 엄마,
내가 파릴 잡을라 항깨
파리가 자꾸 빌고 있어.
― 경화 봉화 삼동국교 1년 이현우, 「파리」
감탄사가 바로 나오지요? 이건 어른들의 시선에서는 절대 안 나옵니다. 생각해보세요. 파리가 두 발로 싹싹 빌고 있는데 어떻게 잡겠어요. 순진무구하고 신선한 시선만이 발견할 수 있는 모습예요. 내가 무심히 지나친 것을 그렇게 새롭게 봐줬다는 것이 감탄스러운 문장입니다.
지금 비가 오고 있고 들판에 할미꽃이 하나 서 있습니다. 우리는 아마 있는지도 모르거나 알아도 그냥 지나칠 거예요. 그런데 또 다른 아이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할미꽃이
비를 맞고 운다.
비가 얼마나 할미꽃을 때리는동
눈물을 막 흘린다.
― 안동 대곡분교 3년 이성윤, 「할미꽃」
할미꽃에 떨어지는 빗물을 눈물로 본 거예요. 글이 아주 현장감이 있어요. 약해서 마구 흔들리며 비를 맞고 고개를 떨군 꽃을 보고 감정이입을 한 거예요. 이런 아이들이 창의적인 것이죠. 풀에 감정이입하는 능력이 있으니까요. 제가 갖고 싶고 또 가져야 하는 능력을 실제로 갖고 있는 아이들입니다. 이런 아이들이 카피라이터를 한다면 저는 행복하게 일할 것 같습니다.
신은 장사다
사람을 든다.
― 성주 대서국교 4년 이흔덕, 「신」 중에서
다들 신발 신고 계시죠? 어떤 친구가 신발에 대해 쓴 시입니다. 우리는 이 생각을 쉽게 못 해요. 우리의 관점에서 보니까요. 하지만 이 글은 신발의 관점에서 본 거죠. 창의적인 생각이 ‘뒤집어 보기’라고 한다면 이 또한 아주 창의적인 발견이죠.
고기는 이상하다.
물속에서 숨을 쉰다.
― 안동 대성국교 2년 박주극, 「고기」 중에서
이 또한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본 겁니다. 어른들은 다 알죠. 물고기는 아가미가 있고, 그래서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있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알기 때문에 ‘지식’으로 세상을 봅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보기에는, 나는 물속에서 숨을 못 쉬겠는데 물고기는 숨을 쉬니까 이상하다는 거죠. 지식이 아니라 ‘감성’으로 본 겁니다.
또 어떤 친구는 완행버스를 이렇게 얘기합니다. 관점의 변화가 부러운 시 중 하나인데요.
가다가 손님 오면
고약한 직행은 그냥 가고요,
인정 많은
완행은 태워줘요.
달리기는 직행이 이기지만,
나는 인정 많은 완행이 더 좋아요.
― 의성 이두국교 5년 박희영, 「버스」 중에서
이 아이의 안내를 받고 보니 완행버스가 예뻐 보이더군요. 피카소가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정교한 그림을 그리는 건 힘들지 않았지만, 다시 어린아이가 되는 데 사십 년이 걸렸다고요. 우리는 0세에서 100세를 놓고 봤을 때,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로 가면서 지식이 계속 쌓인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 지식을 얻는 대신 가능성을 내주는 것이죠. 지식을 쌓으면서 놓치고 있는 많은 부분들을 우리는 그 누구도 보고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 끊임없이 ‘신동’이 나오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곱 살에 화려하게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아이를 발견하면, 천재라고 부르면서 바로 기술을 가르치죠. 그런데 기술은 스무 살, 서른 살이 되면 멈춥니다. 오스트리아에 한 음악학교가 있다고 합니다. 그 학교는 음악학교인데도 어린아이들에게 악기연주를 시키지 않는 대신 애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 자연의 음들을 들려준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바닷가에 가서 자갈을 들고 큰 돌과 큰 돌이 부딪치는 소리, 큰 돌과 작은 돌이 부딪치는 소리, 파도가 치는 소리를 들으며 얘기하는 것이죠. 이렇게 음에 대한 새로운 생각들이 중요한데 우리는 기술만 가르치고 있으니까 요즘 교육이 문제가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돌아가서, 아이들 시 재미있죠? 몇 작품 더 읽어보겠습니다.
이슬은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 눈망울
가지고 있다.
그 눈만 팔면
부자가 되는데
마음 착해서
안 판다.
― 안동 대성국교 5년 손후남, 「이슬」
시골집 선반 위에
메주가 달렸다.
메주는 간장, 된장이 되려고
몸에 곰팡이가
피어도 가만히 있는데
(전 이 구절을 정말 좋아합니다.)
우리 사람들은
메주의 고마움도 모르고
못난 사람들만 보면
메주라고 한다.
― 부산 감전국교 6년 이경애, 「메주」
껌은 빳빳하지요.
그러나 입속에 넣으면
사르르 녹지요.
아무리 나쁜 사람도
껌과 같지요.
모두가 나쁜 사람이라고
팽개쳐버려도
누군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감싸 주면
껌과 같이 사르르 녹겠지요.
딱딱한 마음이
껌과 같이 되겠지요.
― 부산 감전국교 6년 김경숙, 「껌 같은 사람」
제가 나중에 언급을 하게 될 톨스토이 소설 속에는 악인과 선인이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렇게 개념정리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짜 껌 같은 거죠. 그러고 보니 이 아이는 『안나 카레니나』를 읽었을 수도 있겠네요.(웃음) 어디에선가 사람은 물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아, 난 지지리 운도 없어. 내 주변엔 나쁜 놈들만 나타나’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성격이 나쁜 사람입니다. ‘나는 인복이 좋아, 내 주변 사람들은 다 잘해줘’ 라고 말하는 사람은 성격이 좋은 사람이죠. 거기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똑같은 박웅현이 나한테 강하고 못되게 구는 사람이 있으면 덩달아 세집니다. 그런데 나한테 착하게 대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잘해주고 싶어요. 사람은 물입니다. 조용한 데 이르면 조용히 흐르고, 돌을 만나면 피해가고, 폭포를 만나면 떨어지고, 규정된 성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톨스토이 소설에 악당이 없다는 건데 이 아이의 시가 딱 그 얘기죠. 이렇게 보면 정말 산지사방의 모든 것들이 선생입니다. 강호의 고수도 셀 수 없이 많고요. 아이들까지 이런 시를 써서 가르쳐주지 않습니까? 나는 눈만 가지고 있으면 되는 겁니다.
내가 한숨을 쉬니 엄마가
아가 무슨 한숨을 자꾸 쉬노 하신다.
왜 아이들은 한숨을 못 쉴까?
한숨을 쉴 때마다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다.
우리들도 한숨을 쉴 수 있었으면……
― 안동 대성국교 6년 권순남, 「한숨」
돌담은 뱀의 엄마도 된다.
돌담은 다람쥐의 엄마도 된다.
돌담은 쥐의 엄마도 된다.
사람이 잡으려고 하면
돌담인 엄마 품으로 쏙 들어가버린다.
― 안동 대성국교 6년 김명숙, 「돌담」
『나도 쓸모 있을걸』은 이런 시들을 모아놓은 책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오덕 선생은 참 행복했겠구나 싶었습니다. 이런 울림을 바로 곁에서 발견했으니까요.
삶의 풍요를 위한 훈련
이렇게 울림이 있는 것들과 함께하면 좋은 점은 무엇보다 삶이 풍요로워진다는 겁니다. 저는 지금 인문학과 관련된 강의를 하고 있지만, 그동안 사람들이 저를 통해 듣고 싶어했던 것은 ‘창의력’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창의력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가르치는 학과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마침 창의력이 광고의 수단이 되니까 광고를 만드는 박웅현이 발상하는 과정을 보여줘봐라 해서 얘기를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전달해야 할까 고민이 많이 됐지요. 창의력이라는 게 가르치기 참 어려운 것이더군요. 그런데도 그동안 사람들은 이걸 기어이 가르치려고 했구나, 그래서 ‘좋은 카피를 쓰는 20가지 방법’ 같은 것들이 나왔구나 싶었죠. 저도 사회 초년병 때 배웠던 것들입니다.
좋은 카피를 쓰는 20가지 방법.
1. 의문문으로 써본다.
2. 명령문으로 써본다.
3. ‘나’를 주어로 써본다.
4. ‘너’를 주어로 써본다.
……
이런 식으로 20가지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십사 년간 광고 현장에서 일하면서 단 한 번도 이번에는 카피를 의문문으로 써봐야지, 이번에는 ‘나’를 주어로 써볼래, 그렇게 마음먹고 써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카피란 그렇게 써지는 게 아니거든요. 창의성이라는 건 상품화하거나 규정화하기 어렵습니다. 아이디어는 총체적으로 나오지 도식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가르치는 것은 도식적이지 않으면 어려우니까 설명할 수 없는 것을 굳이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처음엔 저도 그 도식적인 것을 바탕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생각 끝에 내가 만든 카피를 범주화해볼까도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겠더군요. 그러니까 광고 일은 소림무술영화 같은 겁니다. 이론을 읽고 느낀 걸 잘 정리하면서 배우지만, 그것이 발상에 도움이 되지는 않습니다. 일목요연한 정리도 좋지만, 아이디어를 내는 건 현장입니다. 만약 이연걸이 소림사에서 무술을 배우고 내려와 싸움을 하게 된다면 싸울 때 배운 대로 될까요? 소림사가 등장하는 무술영화를 보면 소림사의 넓은 마당에서 상대와 마주보고 인사한 후 싸움을 시작합니다. 정해진 규칙이 있어요. 그러나 실제로 싸울 때는 그렇지가 않아요. 일도 마찬가지죠. 그런 규칙은 없습니다. 상황이 다 달라요. 저의 경우라면, 같은 광고주도 두 달 전과 지금이 달라요. 모든 게 유기적으로 움직이니까요. 소비자의 반응, 경쟁사의 반응에 따라 다 달라집니다. 적이 내가 밥 먹고 있다고 해서, “그럼 너 밥 다 먹고 싸우자, 조금 있다가 마당으로 나와”라고 하지 않습니다. 밥을 먹고 있는데 표창이 날아오고 만두를 먹고 있는데 갑자기 발이 날아와요. 그럼 그걸 쳐내야 하잖아요. 걸어가고 있는데 공격해올 수도 있고, 그러다 절벽에서 뛰어내릴 수도 있고 말이죠. 순발력입니다.
우리가 배우는 이론 대부분은 소림사 마당입니다. 그 마당에서는 기본만 익히는 거예요. 생각의 기초체력만 기르는 겁니다. 수많은 경우의 수들을 이론으로 전부 다 정리해놓을 수는 없어요. 그 모든 것들을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다른 일들도 그렇겠지만, 광고는 특히 변수가 많은 일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