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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인쇄 2010년 12월 20일
초판발행 2010년 10월 25일
글 _ 김봉규
펴낸이 _ 박민우
디자인 _ 권혜진
교정・교열 _ 최희경
마케팅 _ 출판마케팅 센터
인쇄 _ 새한문화사
펴낸곳 _ 플럼북스
출판등록 _ 2007년 3월 2일
제105-91-12814호
주소 _ 서울시 마포구 상수동 345-1
전화 _ 02-6012-3611
팩스 _ 02-6442-3611
ISBN 978-89-93691-08-5
※이 책은 플럼북스가 저작권자와의 계약에 따라 발행한 것이므로 본사의 허락 없이는 어떠한 형태나 수단으로도 이 책의 내용을 사용하지 못합니다.
[제작 (주)한국이퍼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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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규
1990년생. 어릴 때부터 공상하고 상상하는 것을 좋아했다. 여섯 살 때 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사기꾼’이라는 답을 적어 세간의 주목을 받았을 만큼 엉뚱하고 사고력이 풍부한 아이로 자랐다. 책 읽기보다는 직접 글 쓰는 것을 좋아해 때때로 삶이 이해되지 않을 때는 일기장을 꺼내 하소연하기도 하며 성장기를 보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독후감 공모전, 백일장 등에서 상이란 상을 죄다(?) 쓸며 일찌감치 글 쓰는 재능을 인정받았으며, 대학 입학 후에는 방에 세계지도를 붙여놓고 매일 밤 세상을 떠도는 꿈을 꾸며 세계여행에 대한 각오를 다졌다. 이 정도면 다 컸다고 자만하게 되었을 때쯤, 스스로의 성장을 마무리하기 위해 카메라와 일기수첩, 배낭을 메고 진정한 어른이 되기 위해 홀로 여행을 떠났다. 소설가가 될 것이라는 부모님의 생각과 달리 지금은 잠시 인생을 탐험하는 탐험가로 지내고 있다.
좋아하는것들 오렌지/소보루빵/내 방/초콜릿 크림/만두/치킨/추억/가족/나랑 잘 어울리는 옷/감동을 주는 음악/운전/장난 전화/
감동주기/인도 영화 보기/상상하기
싫어하는것들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잃어버린 물건이 생각 안 나는 것
되고싶었던 것들 키가 큰 사람/의사/영화감독/작가/PD/아버지/아나운서/미남/카레이서/포크레인 조종사/수족관 운영자
사고방식무겁게 생각하고 가볍게 행동하기
장점기억력이 나빠 봤던 영화도 처음처럼 재미있게 볼 수 있음.
단점대범한 척하려다가 조금 심심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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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젊음을 어딘가 보관해두고 싶었다.
냉장고한쪽 구석에 두었다가
언젠가갈증이 날 때 다시 찾고 싶었다.
[이상한 나라]
어느 이상한 나라의 입국심사서에 적힌 질문 몇 가지.
1. 당신의 취미는?
2. 당신이 좋아하는 고양이 종류는?
3. 당신이 이 나라에 오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는 생각했다.
당신이 어떤 클래스의 좌석을 타고 왔는지, 어디서 묵는지를 묻지 않는
이 나라에 내가 가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여권을 내밀었다.
“내 이름은 김봉규고, 나이는 스무 살이에요. <당신의 스무 살>이라는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이곳으로 왔습니다.”
그가 입국심사서를 찢어버리려고 하는 순간, 나는 심사관의 팔을
붙잡았다.
“행복해지기 위해서요.”
내가 오고 싶었던, 찾고 싶었던, 만나고 싶었던
이상한 나라의 공항 심사관이 말했다.
“웰컴!”
나의 스무 살은 행복해지는 법을 배우고 싶었다.
그리하여 나의 행복을 물어주는 이상한 나라를 찾아 떠가게 되었다.
[시작하며…]
나너 그리고 우리 모두의,
스무살 보고서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스무 살이 되었다. 이건 진짜 이야기다. 지난밤까지만 해도 불가능한 일이 스무 살이 되고 가능해졌다. 밤새 술을 먹다 길거리에서 에로 춤을 추고, 나만의 공간을 얻어 독립하고, 나보다 나이 많은 아저씨에게 존댓말도 들었다. 이야, 드디어 내 세상이 왔다. 다 덤벼!
그럼 나는 지금부터 어른이 된 건가. 어른이라는 단어는 조금 묵직했다. 사실, 이 문제는 모든 스무 살이 궁금해하는 문제다. 귀찮긴 한데, 나는 다른 사람과 달리 호기심이 많아서 하루빨리 이 문제의 답을 찾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내가 스무 살을 대표해서 이 미스터리에 대한 해답을 얻어내면, 나머지 스무 살들이 꽃다발을 들고 달려와 축하해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또 이미 스무 살을 지내온 우리의 인생 선배님들과 예비 스무 살들에게도 꽤 궁금한 문제다. 그들에게도 스무 살은 마음속에 담아둔 진짜 이야기이자, 언젠가 반드시 겪게 될 통과의례 같은 거니까.
나는 검증하는 방법을 잠시 고민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인생 선배님들께 여쭙는 거겠지만, 나는 되도록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나는 엄청난 사람이니까. 그리고 마침내 좋은 방법 하나를 생각했다. 다른 사람에게 내가 어른인지를 물으면 되잖아. 내가 바로 스무 살이니까. 그러려면 되도록 많은 사람이 필요했고, 다양한 시선이 필요했다. 전 세계 사람을 한곳에 모아놓고 내가 어른처럼 보이는지 물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일정량의 예의가 있다. 내가 직접 지구 곳곳에 흩어져 있는 심사위원들을 만나 어른이 무엇인지 묻고 싶었다.
그리하여 나는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 내가 해야 할 건 여행이자, 우리의 모든 스무 살, 과거의 스무 살, 미래의 스무 살을 대표해서 보고서를 쓰는 일이다. 그리고 드디어 그 보고서는 성공적으로 완성되었다. 여기 그 결론이 담겨 있다.
그전에, 보고서의 특징들을 간결히 설명하고 싶다. 에헴.
① 일단, 이 보고서는 내가 보고 느낀 당시의 생생함을 전달하고자 노력했다. 생생한 기록은 분 단위 초 단위로도 기록하였는데, 이건 내가 거리를 걷다가도 보고서에 도움될만한 것이 떠오르면 그 자리에 멈춰 기록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순간순간의 유효기간이 지나면 안 되니까. 그러나 사람들이 때때로 쳐다봤다. 뭘 봐.
② 둘째, 보고서 중간 중간에 있는 음악과 명언은 내가 느낀 순간의 감정을 좀 더 잘 표현해주었다. 시간이 남으면 리스트를 만들어 들어주면 고맙겠다. 아님 말고.
③ 셋째, 이 이야기는 남들의 보고 방식과 달리 호흡과 전환이 빠르다. 그건 내 모든 일정을 담으려는 나의 위대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남의 일기 훔쳐보듯이 빨리 따라오시길.
④ 넷째, 이 보고서는 다른 사람의 보고서보다는 킹왕짱 재미있게 쓰여 있다. 정말 장담할 수 있다. 이건 솔직한 일기니까. 특히 나와 주파수가 맞는 사람에게 더 잘 다가올지 모른다. 곰보빵을 좋아하고, 심심할 땐 장난전화가 하고 싶어지는 사람들.
그치만 보고서를 싫어하는 사람도, 주파수가 안 맞는 사람도, 심지어 곰보빵을 싫어하는 사람도 이 책을 읽지 않으면 분명 후회하게 될 것이다. 내 말은 진짜다. 왜냐고? 이건 보통 보고서가 아니니까. 모든 사람이 게임과 성적의 상관관계에 대해 알 필요는 없지만, 누구나 스무 살은 겪으니까. 그리고 이건 스무 살을 기록한 첫 번째 이야기가 될 거거든. 무지 영광스러운 거지. 아님 말고.
어쨌든 이 보고서가 이렇게 세상에 빛을 보기까지 함께 수고해주신 플럼북스 식구들과 작가님께도 감사의 인사를 해야 한다. 나의 또 다른 실험대상이 된 스무 살 친구들,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선생님, 과 친구들, 무엇보다 심사위원을 자처해주신 여행 중 만난 모든 이들에게도 감사의 말을 돌린다. 그리고 누구보다 어른이 되는 것을 부담스럽게 하는 우리 가족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저작권은 플럼북스와 김봉규에.
※ 주의 : 아, 참고로 이건 보고서일 수도, 일기일 수도, 에세이일 수도, 거짓부렁일 수도 있음.
-목차-
pening
너나 그리고 우리
모두의스무 살 보고서
prologue
아무것도팔지 않는,
무엇이든파는 추억 가게
도쿄·런던·파리
Tokyo·London·Paris
긴마지막 밤의 시간이 속닥인다
케냐·탄자니아·카타르
Kenya·Tanzania·Qatar
자살하는코끼리 씨와 우울한 늙은 사자 씨
터키·그루지야
Turkey·Georgia
어른이되어가는 길목 즈음
시리아·요르단·이집트
Syria·Jordan·Egypt
사막여우를 찾아 나서다
홍콩
Hongkong
나는아직 어른이 되지 않았다
서울
Seoul
또다시, 그러나 똑같지 않은
시간이흐른다
아무것도팔지 않는, 무엇이든 파는 추억 가게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는 모두 지어낸 이야기야. 물론 진짜처럼 들리겠지만 이건 고작 스무 살짜리가 지어낸 허구야. 그러니까 그렇게 진지한 눈으로 들을 필요는 없다는 말이지. 옆에 음료가 있다면 마시면서 가볍게 읽어도 좋아. 들어봐.
내가 어렸을 때의 이야기야. 우리 집은 큰길에서 꽤나 깊숙이 들어와야 하는 골목에 있는 볼품없는 빌라였어. 근처에 상점이라곤 동네 사람이 이용하는 작은 구멍가게와 아이들이 즐겨 찾던 분식집이 전부였어. 그 밖의 물건들은 조금만 걸어가면 나오는 시장에 모두 있었으니까 큰 불편함은 없었지.
어느 날 바로 우리 옆집에, 그러니까 2층으로 된 작은 건물이었는데 그곳 1층에 새로운 가게가 하나 들어왔어. 우리 집 앞에는 작은 구멍가게 하나와 분식집 하나 정도면 충분했는데, 도대체 왜 이런 보잘것없는 골목으로 가게가 들어온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 게다가 겉으로 보기에는 무얼 팔고 싶어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곳이었거든. 가게 주인이 물건을 팔기 싫어 이곳으로 도망 온 것만 같은 느낌의 가게였지. 가게의 외벽에는 이상한 모양의 지도가 걸려 있고, 출처가 어딘지도 모를 사진들과 편지처럼 보이는 종이들이 가득 붙어 있었어. 그중에는 노랗게 아주 빛이 바랜 것들도 있었지.
동네 사람들도 처음에는 그 가게의 존재에 대해 호기심을 가졌지만 정작 그들이 얻을 수 있는 게 그 가게에 없다는 걸 알고는 외면하기 시작했어. 그게 나를 제외한 이 동네 사람들의 특징이었지. 필요하지 않은 것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
확실히 그 가게는 시작부터 망한 듯했지. 실제로 나는 그 가게에 들어가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단 한 사람, 가게 주인인 할아버지만 빼고 말이야. 그 가게는 간판도 없었으니까 엄마는 그건 가게가 아니라 요상한 할아버지의 창고라고 했어. 그치만 나는 그게 창고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 창고는 누군가 자신의 물건들을 구경해주길 바라며 문을 열어 놓지 않거든.
어느 날 엄마가 집을 비운 틈을 타 나는 그 가게로 향했어. 그 가게에 가면 사려고 한 달 동안 모아둔 내 용돈도 챙겼지. 슬그머니 열려 있는 가게의 문턱을 넘어들어가는데 주인 할아버지가 ‘짠’하고 나타났어. 나는 솔직히 조금 무서워서 인사하는 것을 까먹고 대뜸 물었지.
“여긴 무얼 파는 가게에요?”
“추억을 파는 가게입니다. 들어오세요.”
추억을 파는 가게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어쩐지 ‘추억’이란 건 상당히 값이 나갈 것만 같았지. 그런데 가게를 둘러보면서 이건 엄마 말대로 창고가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먼 곳에서 왔을 것만 같은 신기한 조각들과 액세서리들, 이상한 모양의 악기도 있었어. 한쪽 벽면은 내가 가 본 적 없는 곳들의 사진이 가득 채우고 있었지. 할아버지는 넋 나간 채 구경하는 내 모습을 잠시 보더니 다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셨어. 그 창고, 아니 가게에 있는 물건은 모두 할아버지가 젊은 시절부터 바다 건너 가져온 귀한 추억들이라고 하셨지. 물건을 설명하실 때마다 할아버지는 당신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전해주셨어. 한참을 듣다가 보잘것없어 보이는 나무 팔찌 하나가 눈에 들어왔어. 이 정도는 내 돈으로도 살 수 있을 것만 같았어. 게다가 할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은 얼른 물건을 사고 나가라는 무언의 협박처럼 들리기도 했단 말이야. 어린 나이지만 적어도 그 정도의 눈치는 있었던 것 같아.
“이건 얼마에요?”
“미안하지만 이 물건은 팔 수가 없어. 이건 내 추억이거든.”
“추억을 파는 가게잖아요. 그럼 제가 살 수 있는 추억은 어떤 거예요?”
“처음부터 말하지 못해 미안하네. 실은 여기 있는 모든 추억은 나한테 팔고 있어. 모두 내가 젊은 시절부터 만들어 놓은 추억들이지. 그때 만들었던 추억이 모두 여기 있는 거야. 추억을 사고 싶다면, 젊을 때 만드는 거야. 이렇게 나이 들어 과거만을 바라보며 살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 추억을 살 수 있거든. 실은 이 가게는 아무한테도 추억을 팔고 있지 않아. 나한테 팔고 있단다.”
“그럼 이 가게는 할아버지가 젊은 시절에 만든 추억을 사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란 말이에요? 이건 정말로 가게가 아니라 창고네요.”
“허허. 그럴지도 모르지. 잠깐 내 얘기 좀 들어보겠나. 나는 젊었을 때 사탕가게를 했어. 어느 날 할아버지와 아이 하나가 우리 가게로 왔는데, 아이가 할아버지에게 사탕 하나를 골라주고 있었어. 아이는 옛날식 알사탕을 찾았는데, 나는 뭔가 뒤바뀐 것 같다고 느꼈지. 아이에게 묻자 아이는 할아버지가 추억을 하나 사 달랬다더군. 할아버지는 사탕 하나에 어린 시절 추억을 찾고 있었던 거지. 나는 그때 생각했어. 나이가 들면 누구나 추억에 매달린 채 살아가게 되는구나. 그리고 나도 지금 가지고 있는 젊음을 좀 더 가치 있게 만들 필요가 있겠구나, 추억이 될 수 있도록. 얼마 후 나는 사탕가게를 닫고 그동안 꿈꿔왔던 여행을 떠났어. 그리고 이곳은 그때부터의 나의 추억을 모아놓은 곳이야. 실은 창고나 다름없지. 오늘 처음으로 손님이 온 거야. 이 가게는 나에게 추억을 팔고 있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추억을 만들도록 이야기해주고 있어. 나의 사탕가게에 왔던 할아버지처럼 말이야. 내가 혹시 다른 사람에게도 팔고 있는 게 있다면 바로 그거야.
아마 아직 친구는 내 말이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어. 나중에 어른이 됐다고 느끼는 날이 오면 한 번 세상 밖으로 최대한 멀리 떠나봐. 사람에겐 언제나 추억이 필요한데 그건 사탕보다 훨씬 달콤하고 오래 기억될 거야. 그리고 나처럼 추억 가게를 열 필요가 없게 기록을 남겨보는 거야. 언제라도 꺼내 추억할 수 있도록.”
“그럼 어른이 된다는 건 언제를 의미하죠?”
“글쎄….”
그리고는 잠시 동안 말이 없으셨어. 아무것도 팔 수 없다고 말씀하신 할아버지는 그러나 내게 나무 팔찌를 선물로 주셨어. 나는 그 길로 가게를 나왔고 두 번 다시 그 가게에 들어가는 일은 없었지. 내가 그곳에서 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거든. 어른이 되기 전까지는.
그리고 나는 스무 살이 되었고 여행을 떠났어. 가장 중요한 건 지금부터 진짜 이야기라는 거야. 지금부터가 내 진짜 추억이라는 말이지.
회현역과루브르역의 아저씨
내가아는 회현역의 어느 노숙자는 밤이 되면 거울 앞으로 간다.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한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떨어뜨린다. 그 거울 속에 비치는 그의 과거가 궁금해졌다.
낭만적인도시 파리의 루브르역에도 낭만 없는 거지가 있다. 그에게 희망은 없지만 낭만을 책임지는 도시에 살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다.
나는생각했다. 낭만적인 도시의 낭만 없는 아저씨는 불쌍하지만, 희망 없는 곳에서 과거를 곱씹을 줄 아는 그 거울 속 이야기에는 어쩐지 반전이 생겨날 것만 같은 희망이 있다고.
03 / 16 / 화요일
In Narita,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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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움, 비 조금
원래나는 이야기가 많은
눈을가지고 싶었다.
사람들이나와 눈을 맞추며 이야기할 때,
내인생이
묻어나올수 있으면 좋겠다.
am 11:30
드디어 긴 여행이 시작되었다. 일본 나리타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긴 하품을 해본다. 하품을 한 뒤 멍하니 눈을 껌벅인다. 그 짧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 마치 마취된 수술대에서 갓 깨어난 것처럼, 하품하기 전의 상황을 하나하나 기억해내야 한다. 머릿속이 리셋된 것처럼 멍하다. 보통은 노력이랄 것도 없이 금세 기억이 돌아오므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이번엔 좀 달랐다. 깜박깜박 열심히 눈을 굴려 봐도 지금 이 상황이 현실감 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정말 내가 지금 어디론가 떠나고 있는 걸까. 착륙 준비하는 비행기의 일본어 안내 방송이 ‘그래, 여기가 네가 말하는 어디론가의 첫 번째 도착지다. 이 쪼다야’라고 상징한다. 잔뜩 움츠러든다. 확실히.
과연 이 여행이 끝나고 나는 얼마나 달라져 돌아올 수 있을까.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나는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를 골고루 담은 눈을 가지고 싶다. 원래 나는 이야기가 많은 눈을 가지고 싶었다. 사람들이 나와 눈을 맞추며 이야기할 때, 내 인생이 묻어나올 수 있으면 좋겠다. 겨우 두 달이긴 하지만 이번 여행을 통해 성숙한 눈빛을 지닌 ‘어른’이 되고 싶다.
여행의 시작은 꽤 오래전 과거로 돌아간다. 대학에 입학해 한창 새로운 문화에 흠뻑 취해 있던 때, 나는 학창시절에 경험할 수 없던 무한의 자유를 느끼며 갓 출입한 ‘어른들의 세계’에 열광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수업을 들을 것인가 말 것인가는 온전히 내 자유였고, 학생들의 짧은 머리에 가장 큰 직업정신을 발휘하는 학생주임 선생님 따위도 대학엔 없었다. 당시 나는 그런 화려한 자유에 열광하고 있었고, 따라서 ‘자유’라는 상표 뒤에 부착된 ‘책임’이라는 등록 정보는 미처 확인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렇게 방종에 가까운 자유를 느끼며 나는 내 자유를 폭발시킬 거리(?)를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듣게 되었던 ‘세계문화’ 수업은 나를 열광시키기에 충분했다. 우리에게 이질적으로 다가오는 세계의 다양한 문화를 배우며 특히 터키의 매력에 푹 빠질 수 있었다. 그 길로 나는 스무 살이라는 따끈한 온기가 사라져 버리기 전에 여행을 떠나리라 다짐했다. 그 후 휴학을 하고 돈을 벌었다. 컬러링으로 유명한 콘텐츠 업계에 다니면서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넉넉한 급여는 아니었지만 ‘좋은(?)’ 경험이었다. 그렇게 나는 여행 전까지 바쁘게 바쁘게 정신없이 살았다.
너무 정신없이 살았나?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비로소 내가 혼자 남겨졌다는 걸 깨달았다. 여행이라는 걸 자각하는 데는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일본 공항에 내리자 일본 냄새가 나면서 여행이 시작됐다는 걸 알았다. 사실 비행기 안에서도 옆자리에 앉은 일본 아저씨에게서 냄새가 나긴 했다. 각 나라에는 그들만의 ‘후각 느낌!’이 있다. 일본의 ‘후각 느낌!’은 초밥 냄새다. 킁킁! 좋은 냄새다. 굳이 향수로 만들 필요까지는 없다. 치킨도 향수로 나오면 이상할 거야. 응? 어쨌든 좋은 시작.
나리타에서 하루 머물기 위한 근처 게스트하우스. 아직까진 쫄지 않고 잘 버티고 있다.
‘쿵쿵쿵.’
소리 없는 진동이 어딘가에서 전해진다. 둔하고 멍청한 가슴이 인제야 쿵쾅거린다. 아직은 금방이라도 여행을 끝내고 내 침대로 돌아가 누울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나는 멀어진다. 내일부터는 정말로 멀어질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가슴이 더 쿵쾅쿵쾅거린다. 짜증 나게! 설렌다는 건지 긴장된다는 건지 이해의 결정을 내릴 수 없다. 그것은 이해되는 것도, 결정지어지는 것도 아닌데도….
아무도 없는 게스트하우스 부엌에서 오른쪽 가슴에 손을 얹고 자체 테스트를 한다.
-‘설렌다’고 말해본다.
1/4로 쿵쾅쿵쾅 한다.
-‘긴장된다’라고 말해본다.
1/4로 쿵쾅쿵쾅 한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때의 심장박동은 굳이 재지 않는다. 결론은 이미 나 있으니까.
나는 지금 긴장되고 설렌다. 당장 내일부터 나는 혼자다. 그간 먹고 놀며 자유에 익숙한 몸이 말을 잘 들을지 걱정이다. 심장이 눈치챈 ‘긴장’을 머리로 올려보내고 싶다. 머리가 못 알아들을 것 같아 오늘은 긴장 대신 푹 쉬었다. 간장 아니고 긴장.
03 / 17 / 수요일
Narita → 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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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맑음
시한부선고를 받은 사람의
12시간을 생각해본다.
꽤그럴듯한 생각을 했다고
칭찬하지만 딱히 달라지는 건 없다.
같은시간이
언제나같은 가치를 지니긴 힘든 건
나도안다.
홀로 타는 첫 비행기라 긴장했더니 일어나기로 마음먹은 시간이 꽤 많이 남았는데도 저절로 눈이 떠졌다. 마땅히 숙소에서 할 것도 없어 공항으로 갔다. 일찍 티켓팅을 마치고 14번 게이트 앞 의자에 앉았다. 어쩐지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지난밤 아이팟이 방전됐는데 덕분에 그 안에 넣어두었던 32G의 음악, 영화, 지도, 사전, 스카이프, 게임 등이 모두 날아갔다. 공항 내 인터넷 가능 컴퓨터를 알아봤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그렇게 나의 킬링타임용 아이팟은 무책임하게 떠나갔다. 위자료를 물을 수 없는 이별이라는 것이 나를 슬프게 한다. 당장 그 안에 있는 수 많은 여행 정보를 활용하지 못한다는 사실도 화가 나지만, 지금부터 12시간의 비행을 어떻게 참아낼지 암담하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사람의 12시간을 생각해본다. 꽤 그럴듯한 생각을 했다고 칭찬하지만 딱히 달라지는 건 없다. 같은 시간이 언제나 같은 가치를 지니긴 힘든 건 나도 안다.
원래작을수록 선명하진 않지만,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 단단히 자기 자릴 차지하고 있다. 기억처럼.
이 와중에도 시간은 흐르지 않고 멍청한 비행기는 가만히 멈춰 있다. 저렇게 멍청하게 생긴 놈이 무사히 날 영국까지 데려가 줄 수 있을까? 지루한 시간이 가져다주는 거의 유일한 장점은 긴장과 두려움을 반감시켜 준다는 거다. 덕분에 나는 한국사람 하나 없는 여기 일본발 영국 항공에서 두려움이 무뎌져 감을 느낀다. 그러고 보니 어제는 스튜어디스들도 내게 한국말로 말을 걸었는데 지금은 나를 전부 ‘스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도 좋다. 이제 이 사람들마저 소수가 되어버리면 진짜 여행이 시작될 것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유일한 한국인인 나의 목젖을 한 번 만져보고 비행기에 오른다. 별로 없네. 목젖 젠장.
비행기가 한참 지나 구름 꼭대기로 올라왔다. 구멍 난 구름의 틈으로 아직 일본이 남아 있다. 점점 멀어지는 구름을 내려다보며, 작아질수록 시야에서 멀어지지 않는다는 이치가 시각적으로 다가온다. 원래 작을수록 선명하진 않지만,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 단단히 자기 자릴 차지하고 있다. 기억처럼.
가장 중요한 사실은 아직도 기내식 안 나옴-.
03 / 17 / 수요일
In London
/
하늘맑음
“나는 지금 뭔가에 겁을 먹고 있어. 그 구멍을 찾아야 해. 이유를.”
am 12:15(한국 시간)
의외로 공항에서 지하철 타고 숙소로 향하는 길이 어색하지 않다. 어렵지도 않다. 이렇게 쉬운 걸 그렇게 긴장했었다니. 나와 같은 비행기를 타고 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 남자와 눈이 마주친다. 눈빛에 무언가 뜻이 덮여 있다. 덮밥은 아닌데 일단.
‘여기는 타지다. 우리 둘은 어떤 관계로 얽혀 있다. 무슨 상황이 닥치면 우리는 모른 척할 수 없다.’
그는 일본인, 나는 한국인이지만 그깟 국적쯤은 상관없다는 투다. 그런데 실은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뭘 꼴아봐.’
지하철이 정말 작다. 만약 우리나라 지하철이 이 정도 크기라면 신도림에서 어떤 대공황이 일어날지 무섭다. 어쨌든 나는 한자리 차지하고 앉았으므로 오케이. 오전 7시에 강남으로 향하는 9호선 속 내 모습을 떠올려본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많은 평일 오후의 오이도행 4호선도 생각한다. 운이 좋지 않으면 학교까지 앉아서 갈 수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상이었다. 어쨌든. 어색하지 않은 시작.
어떤영국 시각
- 어렵게 찾은 숙소에서 한숨.
눈을 떴을 때는 영국 배낭여행객들을 위한 어떤 숙소 안 2층 침대 위였다. 24명이 들어갈 수 있는 방에는 수면이 부족한 여행객을 위해 낮에도 철저하게 외부 빛을 차단하고 있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방해받아 눈을 뜬다는 건 확실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대체로 불안해진다. 나도 어쩐 일인지 영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친근함과는 달리 막연한 두려움에 휩싸였다. 갑갑한 도미토리 속 침대를 박차고 밖으로 나왔다. 발걸음을 이동시켜보고 싶지만 가죽신발이 뭔가에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어떤 이유도 없었다. 새로운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어둠 속에서 좀 더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나는 지금 뭔가에 겁을 먹고 있어. 그 구멍을 찾아야 해. 이유를.”
그러나 구멍은 없었다. 숙소 근처 맥도날드에 들어가 어설프게 버거 하나를 붙들고 여행을 생각한다. 내일부터 나는 영국이라는 놈의 심장을 이리저리 파헤치며 둘러볼 거다. 영화 ‘노팅힐’의 주 무대에서 잠시 감상에 젖기도 하고, 내셔널갤러리로 들어가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명작들 앞에서 있는 척도 조금 해줘야 한다. 그러나 당장은 어떤 두려움이 나를 잡는다. 그것은 혼자 떠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인지도 모른다. 혹은 다른 세계에 본격적으로 들어왔음을 암시하는 어떤 두려움인지도. 무언가를 시작할 때 항상 따라오는 싫증과 후회에 대한 두려움일까. 그래, 거기에 구멍이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어떤 일을 시작하든 지레 겁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