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두기
·지도 상에 표시된 세력 범위와 국경 등은 편집부의 추정에 따른 것입니다.
·지도 상에 표시된 화살표는 대략적인 것으로, 당시의 교통로를 재현한 것이 아닙니다.
·지도 상에 표시된 지명은 개략적인 위치 표시로 실제와 오차가 있을 수 있습니다.
·중국 인명과 지명은 처음 나왔을 때는 한문 병기를 원칙으로 하고 이후는 한글로만 표기합니다.
·중국 인명과 지명은 한자 독음으로 표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ZUKAI SANGOKUSHI GUNYUU SEIRYOKU MAP SHOUSAIB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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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글
《삼국지》 영웅들이 펼치는 신출귀몰한 전략과 전쟁을 지도로 읽는다!
중국 역사 가운데 삼국시대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조조가 이끄는 위(魏), 유비가 이끄는 촉한(蜀漢), 손권이 이끄는 오(吳)의 삼국이 중국 대륙을 삼등분하여 천하의 패권을 놓고 숨 막히는 명승부를 펼친 게 유명하기 때문이다.
삼국시대는 위・촉한・오의 삼국으로 나뉘기 전, 서력기원을 사이에 두고 약 400년이나 이어 내려온 한제국이 멸망하는 계기가 된 황건의 난(184년)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황건의 난 이후, 동탁・여포・원소・원술・손견・유표와 같은 난세의 영웅들이 눈부신 활약을 하며 삼국시대의 개막을 알린다. 그 이후 삼국시대의 주인공이라 할 만한 조조, 유비, 손권이 차례로 역사의 전면에 나서면서 장대한 드라마를 만들어간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부하인 제갈량과 관우・주유・사마의와 같은 명장들이 속속 등장하며 삼국시대를 더욱 화려하게 수놓는다.
2,0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삼국시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여전히 살아 있는 전설이다. 삼국시대의 스토리가 흥미진진한 이유도 속고 속이는 계책과 죽고 죽이는 전쟁을 통해 난세를 헤쳐 나가는 인간 군상의 모습에 있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인간의 원형이야말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며,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우리의 모습일 것이다.
우리가 삼국시대를 만나는 방식은 소설, 역사, 영화, 게임, 만화 등등 여러 가지가 있다. 여기서 굳이 두 가지로 나눈다면 나관중이 쓴 소설 《삼국지연의》와 진수가 쓴 역사 《삼국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삼국시대의 역사와 스토리는 대부분 《삼국지연의》를 기반으로 한 것들이다. 그래서 역사적 사실과 소설적 허구를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삼국지 100년’ 동안 영웅들의 족적과 세력권의 추이를 한눈에 꿰뚫는다!
《삼국지》를 다루면서 역사와 소설 사이의 일반적인 논쟁을 펼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역사는 역사대로, 소설은 소설대로 읽고 즐길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정사 《삼국지》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인물 중심의 서술 방식을 선택해 독자들이 보다 흥미롭게 삼국시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 책은 후한 왕조의 말기에 발생한 황건의 난을 시작으로, 진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할 때(280년)까지 96년 동안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이 시기에 등장한 숱한 영웅호걸들이 펼쳤던 전쟁과 전투를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연대별로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을 내세우라면 단연 130여 개의 풍부한 지도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삼국시대에 일어난 크고 작은 전쟁과 전투 대부분을 지도 위에다 옮겨놓았다. 적벽대전, 이릉 전투, 오장원 전투, 제갈량의 북벌 등 국가와 개인의 운명을 바꾼 명승부를 장수들의 전략과 전투 지도, 진지도로 확인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다.
황건의 난 이후 여러 영웅이 어떤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권을 확대해나갔는가? 평생 동안 전쟁터를 누빈 조조는 여러 번의 쿠데타를 경험하는데, 언제 어디서 누가 왜 일으켰는가? 평생 동안 배신을 밥 먹듯이 한 유비가 어떻게 황제의 자리에 올랐는가? 손권은 어떻게 장강 이남 지역을 통일하고 오나라를 건국했는가?
이 책은 ‘삼국지 100년’ 동안 영웅들의 족적과 세력권의 추이를 지도로 보여주고 있다. 당시에 활약하던 군웅의 세력 범위를 색으로 구분하여 표시했다. 짙은 색과 옅은 색이 있는 경우는 짙은 부분이 세력 범위, 옅은 부분이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이다(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했지만 색으로 엄밀하게 분류하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미리 밝혀둔다). 그리고 지도와 텍스트를 결합해 역사적 사실과 흐름을 한눈에 꿰뚫고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은 소설 《삼국지》를 읽은 사람에게는 새로운 형태의 지도를 통해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체험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삼국지》를 읽지 않은 사람이라면 소설의 재미와 역사의 진실을 한꺼번에 맛보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라면 앞으로 어떤 형태의 《삼국지》를 만나더라도 더욱 사랑하게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삼국지》는 세상과 인간의 모든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후한 왕조 타도를 내세운 황건의 난이 발발한다
전한 시대 이래, 한 왕조는 약 400년이나 이어 내려온 대제국이었다. 하지만 후한 왕조도 후반이 되면 외척(황후 일족)과 환관(황제 측근의 거세당한 사람들)이 권력 투쟁으로 밤낮을 지새우게 된다. 금권정치가 만연해서 정치는 혼란에 빠지고, 백성을 돌보는 대신 백성에게 세금 증대라는 무거운 부담을 지운다. 여기에 기근도 자주 발생하여 백성의 생활은 날로 피폐해져갔다.
184년, 그러한 사회 정세 속에서 마침내 백성이 들고일어났다. 후한 왕조 타도를 내세운 황건(黃巾)의 난이 발발한 것이다. 반란을 주도한 우두머리는 하북 지방(황하 이북의 유주(幽州)・기주(冀州)・병주(幷州))에 ‘태평도(太平道)’라는 종교를 퍼트린 장각(張角)이라는 인물이었다.
기근과 질병에 시달리던 백성에게 태평도는 안식처와도 같았다. 십수 년에 걸쳐 포교한 결과, 청주(靑州)・서주(徐州)・유주・기주・형주(荊州)・양주(揚州)・연주(兗州)・예주(豫州) 등 여러 주로 세력을 넓혀가는 동안 신자는 수십만 명에 이르렀다. 장각은 신자를 36개 지부로 나누고 지부마다 장군을 두었는데, 태평도의 조직력이 일국의 군대 못지않았다고 한다.
장각이 이끄는 반란군이 수도 낙양의 턱밑까지 진출
장각이 언제 반란을 일으키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는지는 모른다. 다만 당시에 “창천이 죽고 황천이 일어났으니, 갑자의 해에 천하가 크게 길하리라(蒼天已死 黃天當立 歲在甲子 天下大吉)”라는 말이 항간에 널리 퍼져 있었다. 이는 ‘갑자의 해(184년)에 봉기하여 세상을 바로잡으면, 태평도 천하가 되어 세상이 좋아진다’라는 뜻이다.
장각은 이 말을 듣고 낙양(洛陽) 안팎에서 봉기하기로 결정하고, 184년 3월 5일로 날을 잡았다.
그 준비의 일환으로 그는 자신의 심복인 마원의(馬元義)를 낙양에 잠입시켰다. 하지만 184년 1월, 장각을 따르던 제자의 밀고로 계획이 발각되면서 마원의는 죽임을 당했다. 거사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자 장각은 일정을 앞당겨서 반란을 일으켰다. 스스로 천공장군(天公將軍)이라 칭한 후, 아우인 장보(張寶)과 장량(張梁)을 각각 지공장군(地公將軍)・인공장군(人公將軍)에 임명하고, 2월에 격문을 발표하면서 36개 지부에서 일제히 봉기를 단행한 것이다.
노란색 천을 머리에 둘러서 ‘황건적(黃巾賊)’이라 불린 반란군은 각지의 지방 군청을 습격하고 관리들을 보이는 족족 살해했다.
반란 초기 황건군의 기세는 엄청나서 수도 낙양에서 가까운 예주 영천(潁川)군의 각 현도 차례로 함락되었다. 반란군은 한 달도 되지 않아서 낙양의 턱밑까지 쳐들어왔다. 조정은 황제인 영제(靈帝)의 외척 하진(何進)을 대장군으로 임명하여 수도 주변의 방위를 맡기고, 노식(盧植)을 북중랑장(北中郎將)에 임명하여 기주에 있는 장각 토벌에 나서게 한다. 또 좌중랑장(左中郎將) 황보숭(皇甫嵩)과 우중랑장(右中郎將) 주준(朱儁)에게는 영천군 방면에 있는 황건 일당을 토벌하라고 명했다.
장각 3형제가 죽으면서 황건의 난도 막을 내렸다
영천군으로 향한 황보숭과 주준은 황건군의 기세에 눌려, 주준의 토벌군이 전초전을 벌였던 황건적의 장수 파재(波才)의 반란군에게 패한다. 승기를 잡은 파재의 대군은 그대로 황보숭이 진주하던 장사(長社, 예주 영천군)로 진군하여 이곳을 포위한다. 열세에 몰린 황보숭군은 어둠을 틈타, 초원에 진을 치고 있던 황건군을 강풍을 이용한 화공으로 공격해 혼란에 빠트렸다. 그리고 이때 원군으로 달려온 조조(曹操)군과 전열을 정비한 주준군까지 합류한 관군이 반란군을 진압하고 영천군을 평정하는 데 성공했다.
영천군의 반란을 평정한 관군은 반격에 나서 형주의 완성(宛城)을 점거하던 장만성(張曼成)을 격파하고, 영천군 양적(陽翟)으로 패주한 파재군의 잔당까지 괴멸했다. 나아가 여남(汝南)군 서화(西華)에서 폭동을 일으킨 팽탈(彭脫)을 무찌르고 여남군을 평정했다. 완성에서는 장만성이 죽은 이후, 조홍(趙弘)・한충(韓忠)이 반란군의 지휘를 이어받아 끝까지 저항했으나 관군의 공격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한편, 기주 거록(鉅鹿)군에서 장각 형제를 공격하던 노식은 장각군이 광종(廣宗)에서 농성에 들어갈 때까지 공세를 퍼부었다. 노식이 환관 좌풍(左豊)의 터무니없는 중상모략으로 도성에 소환되자, 그를 대신하여 동탁(董卓)이 파견된다. 하지만 동탁은 황건군에게 패한 채 파면된다. 이에 조정은 예주를 평정한 후 연주 동군(東郡)에서 복기(卜己)군을 격파한 황보숭에게 광종으로 가서 황건 일당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광종에 간 황보숭도 황건군의 수비가 너무도 견고하여 공략에 애를 먹었다. 하지만 적의 방심을 틈타 성내를 급습하여 장량을 살해하고, 이미 병사한 장각의 관을 파내어 시신의 목을 벤 후 낙양으로 보냈다. 광종을 평정한 황보숭은 다시 북상하여 11월에 하곡양(下曲陽)에 있던 장보마저 격파했다. 장각 3형제를 잃은 황건적은 괴멸되고, 마침내 황건의 난은 막을 내렸다.
군웅할거의 시대가 열리고, 후한 왕조는 몰락의 길을 걷는다
황건의 난은 수습되었지만 조정의 악정에 대한 불만은 수그러들지 않은 채 각지에서 폭동으로 이어졌다. 특히 이민족의 움직임이 거세지면서 서북 방면에서 침략이 끊이질 않았다. 황건적이 맹위를 떨치던 184년 6월에는 지금의 베트남 북부인 교지(交趾)에서 이민족이 봉기했다. 이어서 연말에는 옹주의 북지(北地)군에서 강족(羌族)이, 양주(涼州)의 금성(金城)군에서는 강족의 우두머리인 선령강(先零羌)이 호족인 변장(邊章)과 한수(韓遂)를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변장과 한수는 이듬해 11월에 장온(張溫)에게 진압되지만, 187년에 다시 봉기한다. 이때는 관군 측이던 마등(馬騰)이 가담하고 한양(韓陽)군의 왕국(王國)도 이에 호응하여 다 함께 양주자사 경비(耿鄙)를 공격한다.
한편 황건의 난이 일어난 혼란을 틈타 봉기한 도적단의 두목 장연(張燕)이 그와 비슷한 시기에 봉기한 장우각(張牛角)의 군대와 합류한다. 장우각이 죽은 후에는 그의 군대까지 손에 넣게 되어 장연의 군대는 수십만 명을 넘어 무려 10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나중에 장연은 하내(河內)군 조가(朝歌)현의 흑산(黑山) 일대에 거점을 두고 스스로 ‘흑산적’이라 칭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 후 군관에 투항하여 평난중랑장(平難中郞將)에 임명되면서 그가 일으킨 흑산적의 반란은 일단 수습되었다.
그 외에 186년 10월에는 형주 일대에 거주하는 만족인 무릉만(武陵蠻)이 군사를 일으켰다. 187년에는 사주 형양(滎陽)현의 도적 떼가 사주 중모(中牟)현을 다스리던 관리를 살해했고, 같은 해 6월에는 유주에서 오환(烏丸)과 손을 잡은 장순(張純)・장거(張擧)가 봉기했으며, 형주의 영릉(零陵)군과 장사(長沙)군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황건적의 잔당도 각지에 숨어 지내며 조정에 항거를 계속했다.
황건의 난은 1년도 되지 않아 진압되었다. 하지만 후한 왕조에 미친 영향력은 막대했다.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은 지방에서 군웅할거를 부채질했고, 따라서 후한 왕조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면서 멸망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압제에 시달리던 민중이 일으킨 황건의 난 자체가 호족과 지식인의 지지를 받으며 무장을 한 채 국가 전복을 꾀한 쿠데타였기 때문이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주인공들
인물 클로즈업 장각
•자 : 알려지지 않음 •생몰년 : ?~184년
•출신지 : 기주 거록군 •관직 : 없음
황건의 난을 주도하여 후한 왕조에 최후의 일격을 날리다
기주 거록군 출신으로 산중에서 수행에 힘썼고, 스스로 태평도인이라 칭했다. 170년대에 포교를 개시한 후 난민과 유민을 대상으로 치료 행위를 하여 신자를 늘렸다. 신자들은 장각에게 죄를 고백하고 부적과 함께 물을 마신 후 주문을 외면 병이 낫는다고 믿었다.
이로 인해 신자가 순식간에 십수만 명이 되며 유주・기주・연주・예주・청주・서주・형주・양주 등 여러 주로 세력을 넓혔다. 개중에는 사재를 쾌척하고 태평도에 귀의한 신자도 많았다고 한다.
184년이 되자 후한 왕조를 타도하겠다며 아우인 장보・장량과 함께 전국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을 일으킨 초기에는 환관이 실권을 잡고 있던 조정이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여 황건 세력이 파죽지세로 수도인 낙양까지 위협했다. 하지만 곧 전투 경험이 많은 군관에게 전세를 역전당하고 포위당한 상태에서 병사했다.
인물 삼국지 열전
노식(盧植) <?~192>
구강(九江)태수 시대와 여강태수 시대에 이민족의 반란을 진압했다. 황건의 난이 일어나자 북중랑장에 임명된 그는 광종으로 토벌에 나서 황건의 수령 장각을 포위했다. 하지만 환관에게 뇌물 주기를 거부하다 중상모략을 받고 죄인 호송용 수레에 탄 채 낙양으로 호송되는 굴욕을 당했다. 황보숭이 황건적을 평정한 후에 다시 상서가 되었다. 동탁이 소제(少帝)를 폐위할 때(동탁은 그 후 어린 헌제(獻帝)를 꼭두각시로 옹립하여 온갖 폭정을 일삼았다-역주) 홀로 반대했으나, 주변의 설득으로 죄를 추궁당하지 않았다. 유비(劉備)가 그의 문하에 있던 것으로 유명하다.
황보숭(皇甫嵩) <?~195>
자는 의진(義眞)이라 하고, 옹주 안정(安定)군 조나(朝那) 출신의 후한의 관료다. 강족의 반란을 진압하는 등 젊은 시절부터 조정에서 활약했다. 황건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파재·장량·장옥과 같은 황건의 주력군을 무찌르며 반란을 진압한 최고의 공로자였다. 또 황건적과 청류파(淸流派, 외척과 환관에 반대한 관료)의 결탁을 막기 위하여 ‘당고의 금(黨錮之禁, 당고의 옥이라고도 한다. 중국 후한 말기에 관료와 환관이 충돌하여, 환관 세력이 관료를 금고에 처한 탄압 사건이다-역주)’을 해제하자고 진언했다. 동탁이 정권을 쥐었을 때는 그에게 굴복함으로써 동탁의 폭거를 막아내지 못했다.
주준(朱儁) <?~195>
양주 회계(會稽)군 상우(上虞)현 출신으로, 자는 공위(公偉)라고 한다. 후한 왕조의 군신으로 황건의 난이 발발했을 때는 황보숭, 노식과 함께 반란을 진압했다. 완성에서 황건군을 포위했을 때 “도적 떼는 유리하다고 느끼면 싸우고, 불리하다고 느끼면 물러선다. 지금은 항복한다 해도 장래에 다시 역심을 품으리라”라고 하며, 항복하겠다는 황건군의 제의를 거부하고 도적 떼를 토벌했다. 동탁 정권하에서는 장안으로 도읍을 옮기려는 동탁에게 끝까지 반발했다.
장연(張燕) <?~?>
기주 상산(常山)군 진정(眞定)현 사람. 본성은 저(褚)라고 한다. 황건의 난이 일어나자 도적단을 결성하여 기주 방면에서 양민을 약탈한다. 황건적에 호응하여 봉기한 장우각과 뜻을 같이했으며, 장우각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성을 장(張)씨로 바꾸고 ‘흑산적(黑山賊)’이라 불리는 100만 명에 가까운 군대를 통솔했다. 훗날 후한에 투항하여 반동탁 연합이 일어났을 때는 연합군 편에 서서 싸웠고, 원소와 공손찬이 싸울 때는 공손찬을 도왔다. 205년 10만여 군사를 이끌고 조조 밑으로 들어가 안국정후(安國亭侯)에 봉해졌다.
황건의 난이 진압된 후, ‘백파적’이라는 도적 떼가 봉기
황건의 난이 진압된 후에도 남은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188년 2월에는 병주의 백파곡(白波谷)에서 수령 곽태(郭太)가 이끄는 ‘백파적(白波賊)’이라는 집단이 봉기했는데, 그 수가 십수만에 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조정은 진압할 힘이 없어 도성에 침공해 오는 것을 막는 게 고작이었다.
유주에서는 187년에 반란을 일으킨 장순·장거가 이민족 오환과 손을 잡고 여전히 침공을 거듭했다. 공손찬(公孫瓚)이 조정의 요청을 받고 이들을 무찔렀지만, 오환의 수령 구력거(丘力居)까지는 무찌르지 못했다. 그래서 조정은 유주목(牧, 장관)으로 유우(劉虞)를 임명하고 파견했다.
유우가 선정을 베풀면서 주변 이민족의 인심을 얻자 오환의 구력거가 투항하고 모두 국경 바깥으로 물러났다. 이런 상황에서 세력을 잃게 된 장순이 선비로 도망쳤지만, 189년 3월에 부하 왕정(王政)에게 살해당하며 장순의 반란은 수습되었다.
184년 이후, 양주(涼州)에서는 한수가 툭하면 반란을 일으켰다. 양주사마(司馬) 마등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한수 측에 붙어서, 자기와 마찬가지로 왕조에 반란을 일으킨 왕국이라는 자를 수령으로 추대했다. 그리고 다시 거병하여 188년 11월에 진창(陳倉)을 포위한다. 이 일이 일어나기 직전인 9월, 흉노의 선우(單于, 흉노의 군주를 가리킨다-역주) 어부라(於夫羅)와 백파적도 사례주(司隷州, 정식명은 사례교위부이며 도성과 주변 지역)의 하동군(河東郡)까지 침략하기도 했다. 이민족의 잦은 침략에 조정에서는 황보숭을 좌장군(左將軍)에 임명하고, 양주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한수군의 진압을 명령했다. 이에 황보숭은 전장군(前將軍) 동탁과 함께 진창에 도착하여 진을 쳤다.
천혜의 요새인 진창성은 한수군이 포위한 채 공격을 감행했지만 좀체 함락되지 않았다. 황보숭은 성 밖에서 포위한 한수군을 공격해야 한다는 동탁의 진언을 물리치고 지구전을 펼치면서 역습의 기회를 기다렸다. 결국 한수군은 진창성을 포위한 지 2개월여 만에 철수를 결정하고 양주로 돌아갔다.
이에 황보숭은 이들을 추격하여 왕국군 병사의 목을 1만여 구나 베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한수가 양주까지 철수한 뒤에는 패배한 책임을 물어 왕국을 살해했다.
십상시를 비롯한 환관 일파와 외척 하진의 대립이 시작
189년 4월, 각지에서 반란이 이어지는 가운데 영제가 세상을 떠났다. 영제에게는 황자가 두 명 있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환관과 외척은 후계자를 둘러싸고 또다시 대립하기 시작했다.
하황후(何皇后, 유변의 생모)의 남동생인 대장군 하진은 영제의 장남 유변(劉辯)을 밀었고, 조정의 권력을 잡은 십상시(十常侍)라 불리는 환관들은 아우인 유협(劉協)을 밀었다. 하진이 억지로 유변을 황제로 즉위시키자 양측의 대립은 더욱 심해져, 하진은 십상시 중 한 명인 건석(蹇碩)을 살해하고 군권을 거의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신변에 위험을 느낀 십상시는 하황후에게 금은보석을 보내는 등 환심을 사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그러나 하진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명문 출신의 원소(袁紹)와 함께 환관 주살을 모의하게 되었다. 하진은 하황후에게도 협력을 구했으나, 하황후는 환관에게 동정적이어서 숙청 계획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하진은 환관 세력을 무력으로 위압하려고 동탁을 비롯한 병주의 정원(丁原)과 왕광(王匡), 기도위(騎都尉) 포신(鮑信), 원소의 아우인 원술(袁術) 등 무력을 지닌 각지의 세력에게 상경을 촉구했다. 그들은 하진의 부름을 받고 차례로 낙양 근교까지 진군해 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위기감을 느낀 십상시의 장양(張讓)과 단규(段珪)는 거짓 칙서로 하진을 궁중으로 불러들여 살해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원소와 장군들은 분노했다. 성문 밖에서 대기하던 원소·원술은 궁중으로 쳐들어가서 십상시 중 한 명인 조충(趙忠)과 환관파로 보이던 하묘(何苗, 하진의 아우)를 살해하는 등 순식간에 환관 2,000여 명을 학살했다.
장양과 단규는 소제(少帝)인 유변과 훗날 헌제(獻帝)가 되는 유협 형제를 데리고 궁중에서 도망쳤으나 추격군이 황하 부근까지 따라오자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이러한 내우외환을 거듭한 끝에 환관과 외척은 모두 자멸하고, 후한 왕조도 실질적으로 멸망의 길을 걸었다.
여포를 앞세워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동탁의 공포정치
한수의 난을 진압한 후, 소부(少府)에 임명된 동탁은 황보숭에게 군을 인계하고 귀환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근방의 치안 악화를 이유로 거부했다. 다시 병주목에 임명되고 군을 내놓으라고 명령받았으나, 동탁은 이마저도 거부한 채 계속 하동에 주둔해 있었다.
그러다 하진의 격문에 응하여 출진하던 동탁은 도성에서 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서둘러 낙양으로 향했다. 낙양 교외에 도착한 동탁은 낙양에서 도망친 유변 일행이 혼란의 소용돌이 한복판에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황제 일행을 구출한다는 명목으로 도성에 들어갔다.
조정에 기반이 없는 동탁이 도성을 장악하려면 군사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동탁은 제일 먼저 하진의 병사들을 흡수하기로 했다. 동탁은 자신 휘하의 병사가 많은 것처럼 보이려고 4~5일마다 밤이 되면 성 밖으로 병사를 내보냈다가, 이튿날 진태고(陣太鼓, 진중에서 진퇴의 신호로 치던 북-역주)를 울리며 성에 들어오게 했다. 이리하여 하진 휘하에 있던 병사들은 동탁군을 두려워하여 차례차례 동탁에게 투항했다고 한다.
나아가 동탁은 낙양의 치안을 담당하던 정원의 부장 여포(呂布)에게 수하로 들어오면 어떠냐고 넌지시 떠보았다. 동탁의 제안에 응한 여포는 자신이 모시던 정원을 살해하고, 정원 휘하에 있던 병사와 함께 동탁군에 합류했다.
이렇게 해서 동탁은 수도의 군사권을 수중에 넣었다. 조정의 실권을 쥔 동탁은 하황후를 위협하여 소제를 황제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동생인 유협을 황제의 자리에 즉위시켰다. 그리고 쓸모가 없어진 하황후를 살해하고, 순식간에 조정의 권력을 장악한 채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정치가 공백 상태에 놓였다는 거짓말로 단숨에 황실의 중추를 제압한 동탁은 신하 중 최고위인 상국(相國)의 지위에 올랐다. 그리고 자신의 일족을 조정으로 불러들여 고관에 임명해 반항하는 세력들을 철저히 탄압했다.
조정의 실권을 손에 넣은 이후로 동탁은 폭정을 일삼았다. 영제의 능묘를 파헤쳐 금은 등 귀한 재물로 만든 부장품을 찬탈하거나, 마을 축제에 참가한 농민을 닥치는 대로 죽이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동탁의 병사들도 낙양의 부잣집을 습격하여 금품을 빼앗거나 부녀자를 폭행하는 등 무자비한 악행을 저질렀다.
한편으로 동탁은 초야에 묻혀 있던 인재를 발굴하여 군관에 기용하는 등 정치 체제를 정비했는데, 이걸 보면 스스로 제위에 오를 야망이 있는 듯이 보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낙양에 주둔하던 원소·원술·조조를 비롯한 장군들은 동탁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하나둘 낙양을 빠져나갔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주인공들
인물 클로즈업 동탁
•자 : 중영(仲穎)•생몰년 : 139~192년
•출신지 : 옹주 농서군 •관직 : 상국(相國), 태사(太師)
십상시의 난으로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희대의 폭군
젊은 시절부터 무재와 마술에 능하여, 달리는 말 위에서 활대 2개를 달고 좌우 어느 쪽에서도 활을 쏠 수 있었다고 한다.
강족 지방을 방랑하던 시기에는 강족의 족장들과 교우를 맺었는데, 동탁이 농서(隴西)로 돌아온 후에도 족장이 방문하는 등 신뢰 관계가 두터웠다고 한다. 그 후, 동탁은 조정군에 소속되어 활약하면서 중랑장까지 승진했다.
184년의 황건의 난에서는 황건적에게 패하여 면직되었다가 이듬해 봄에 한수군 반란의 진압에 나서 장온과 함께 전투에서 승리했다.
189년에는 십상시의 난을 기회로 삼아 낙양에 입성하여 헌제를 꼭두각시로 옹립하고 조정 내의 실권을 쥐었다. 하지만 이내 폭정을 휘두르며 도읍 사람들을 공포에 빠트렸다.
만년에는 부자의 인연을 맺은 심복 여포에게 배신당한 채, 192년 4월에 암살당했다.
인물 삼국지 열전
유우(劉虞) <?~193>
자는 백안(伯安)이라 하고, 청주 동해(東海)군 담(郯)현 출신이다. 동해공왕(東海恭王) 유강(劉彊)의 5대손으로 종실 사람이다. 188년에 유주목이 되어, 반란을 일으킨 장순·장거를 토벌했다. 오환을 비롯한 이민족에게도 선정을 펼쳐서 존경받았다고 한다. 한 황실에 대한 충성심이 깊어서, 원소가 헌제를 대신하여 유우를 제위에 올리려고 모의하자 “이러한 역모에 가담할 수 없다”라며 거절했다. 193년에 유주의 지배권을 놓고 다투었던 공손찬에게 패배하고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한수(韓遂) <?~?>
자는 문약(文約)이라고 한다. 양주 금성(金城)군 출신이다. 황건의 난으로 중앙이 혼란해지자 이를 틈타 양주에서 거병했다. 이후 여러 번 반란을 일으켰다 번번이 진압되는 등 약 30년에 걸쳐 양주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켜 후한과 위나라에 위협을 가했다. 211년에는 조조가 관중(關中)에 침공하자 마초(馬超), 양추(楊秋)와 손을 잡고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다. 하지만 조조의 계략에 빠져 마초와 사이가 벌어지는 바람에 철수했다. 214년에 다시 거병했으나 하후연(夏侯淵)에게 패했다.
마등(馬騰) <?~212>
자는 수성(壽成)이라 하고 옹주 부풍(扶風)군 사람이다. 후한 왕조 말기 양주에서 한수와 함께 자주 반란을 일으켰다. 동탁이 실권을 쥐자 그를 도왔고, 그 공으로 동탁이 죽은 후 정서장군(征西將軍)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194년에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패하자 양주로 도망쳤다. 197년에 다시 조정에 들어가 전장군에 임명되어 장안 주변을 다스리기도 했다. 208년, 조조의 간계로 한수와의 사이가 험악해지자 벼슬길에 올라 가족과 함께 업현(鄴懸)으로 이주했다. 나중에 아들 마초가 조조에게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일족과 함께 살해당했다.
하진(何進) <?~212>
자는 수고(遂高)라 하고 형주 남양(南陽)군 완(宛)현 출신으로, 후한 왕조의 혼란기에 실력자로 부상했다. 친누이 하씨가 영제의 황후가 되자 외척으로 권력을 휘두른다. 황건의 난이 일어나자 군을 지휘하지 못하는 환관들의 지지를 받아 대장군에 취임했다. 실권을 쥔 하진은 원소 등의 호족과 청류파 관료를 등용하면서 차츰 반환관파가 되어 환관의 숙청에 앞장서게 되었다. 하지만 환관 일파에게 선수를 빼앗기고 궁중에서 암살당했다.
조조를 비롯한 장수들이 거병하자 동탁은 장안으로 천도
190년, 공포정치로 수도 낙양을 억압하고 정치를 농단하던 동탁과 그 일당의 행태를 더는 두고 보지 못한 관동(함곡관(函谷關) 동쪽)의 장수들이 들고일어났다. 동탁이 주변 장수들의 동태를 눈치채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원소를 발해태수(渤海太守), 원술을 후장군(後將軍), 조조를 효기교위(驍騎校尉)에 임명하는 등 그들에 대한 회유책을 썼다.
하지만 그들은 동탁이 제위에 오르려는 야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자 일제히 반발했다. 그것은 한(漢) 왕조를 흠모하는 마음에서만이 아니라 ‘정통성’이 없는 동탁에 대한 거부감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먼저 낙양에서 탈출한 조조가 동탁을 토벌하기 위하여 약 5,000명의 병사를 모아 예주에서 거병했다. 또 진류(陳留)에 있던 장막(張邈)이 아우인 장초(張超)와 함께 반동탁을 내세우며 거병하자, 산양(山陽)의 원유(袁遺)와 동군(東郡)의 교모(橋瑁)가 호응했다.
발해태수 원소 또한 동탁에게 이반하며 관동의 모든 장수와 연합해 반동탁 연합을 결성했다. 원소가 반동탁 동맹의 맹주가 되었지만 장막은 사사건건 원소와 대립하며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다.
반동탁군에는 이들 외에도 손견(孫堅), 왕광, 한복(韓馥), 유대(劉垈), 포신 등 각지의 태수와 자사가 대거 참가했다.
반동탁 연합군의 결성을 알게 된 동탁은 190년 2월, 낙양을 버리고 장안(長安)으로 도읍을 옮겼다. 옹주 농서군 출신인 동탁에게는 양주와 더 가까운 장안이 거동하기에 더 유리했기 때문이다. 장안이 과거 한 왕조의 도읍이었던 사정도 있었다. 동탁은 장안의 동쪽에 요새를 쌓는 등 수비를 굳건히 했다. 심복 곽사(郭汜)에게 장안의 수비를 맡긴 동탁은 군대와 함께 낙양에 머물며 궁궐과 도성에 불을 지르는 등 온갖 패악을 저질렀다.
조조가 맨 먼저 출병했으나 형양 전투에서 동탁군에게 패배
반동탁 연합군이 낙양을 포위하자 동탁을 토벌할 시기가 무르익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집결한 장수들은 누구도 먼저 군대를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동탁의 압도적인 군사력이 두렵기도 했지만 그보다 서로 견제하는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조조만이 동탁 토벌을 위해 군사를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여포와 서영(徐榮) 등의 정예 부대가 모여 있는 동탁군을 상대로 선봉에 나서려는 장군은 아무도 없었다. 조조는 하는 수 없이 자신의 병사와 자신의 의견에 찬동한 제후의 병사 일부를 인솔하여 출진할 수밖에 없었다. 조조가 이끄는 군대는 낙양을 향하는 도중에 형양(滎陽)의 변수(汴水)에서 동탁의 수하인 서영의 대부대와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한다. 많은 병사를 잃은 조조는 일단 양주로 가서 황건적 잔당을 토벌하면서 전열을 가다듬었다. 새로운 인재를 받아들이고 병사를 조련하는데, 이는 훗날 조조가 천하를 호령할 힘의 근거가 된다.
이렇게 동탁군과 반동탁군이 대치하면서 조정의 혼란은 극에 달했고, 전국 각지에서 도적 떼가 날뛰고 제후들이 군사를 일으키는 등 군웅할거의 시대로 접어들기 시작한다. 조정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관군의 통제력이 어수선한 틈을 타서 백파적이 연주 동군을 습격하고, 유주의 요동군에서는 공손탁이 스스로 요동태수 평주목으로 칭하며 독립한다.
손견이 동탁과 여포를 물리치고 낙양에 입성한다
낙양을 목표로 장사에서 북상하던 손견은 도중에 형주자사 왕예(王叡)와 남양태수 장자(張咨)를 살해하고, 191년 초에는 노양(魯陽)까지 진군하며 원술과 합류했다. 손견이 이끄는 군대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아 2월에는 낙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양현(梁県)까지 진격했으나 동탁의 부장 서영의 맹공을 받고 무참히 깨진다. 하지만 손견은 포기하지 않고 뿔뿔이 흩어진 군사를 모아서 다시 북진한다.
동탁은 화웅(華雄)과 여포를 장수로 내세워 손견에게 맞섰다. 이에 손견이 진두에 서서 화웅의 목을 베고, 대곡구(大谷口)로 진군하여 직접 출진한 동탁을 무찌른다. 그리고 도주하는 동탁군을 추격하여 낙양에 거의 이르렀다. 그러나 손견을 의심한 원술은 낙양 진입을 막기 위해 식량 보급을 중단했다. 이에 손견이 양인에서 노양까지 직접 달려가 원술의 의심을 풀었다.
손견이 대곡구로 진군하기 직전, 그 용맹함에 두려움을 느낀 동탁은 손견의 자제를 자사와 태수로 임명한다는 조건으로 화친을 제안하지만 거절당한다. 더는 내놓을 카드가 없어진 동탁은 몸소 출진했다가 패주하고, 낙양을 지키던 여포까지 손견에게 패하자 결국 낙양을 포기하고 장안으로 철수한다.
그리고 4월, 마침내 손견이 낙양에 입성한다. 하지만 낙양은 동탁의 폭정으로 황폐할 대로 황폐해져 있었다. 손견은 동탁이 마구 훼손한 종묘와 파헤친 능을 바로잡은 후에 노양으로 돌아가 그곳에 주둔했다.
반동탁 연합이 동탁을 완전히 토벌하지 못했으나 승리를 거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교모가 유대에게 죽임을 당하고, 한복이 원소에게 협박받고 기주를 빼앗기는 등 연합군 장수들 사이에 불협화음이 일어났다.
기주 땅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공손찬과 원소가 대립 시작
형제 사이(형인 원소가 서얼이라는 설)인 원소와 원술의 대립도 표면화되었다. 191년 초, 연합군의 맹주인 원소는 명망 있는 유우를 새 황제로 옹립하고자 했지만 원술은 유우 옹립에 반대하면서 서로 등을 돌렸다. 이 무렵 반동탁 연합군이 붕괴되면서 원술이 공손찬과 결탁하자, 이에 맞서 원소가 형주의 유표(劉表)와 손을 잡았다. 이에 원술은 낙양에서 돌아온 손견을 내세워 유표를 토벌하기로 결심했다.
번성(樊城)과 등현(鄧縣)에서 유표군을 무찌른 손견은 유표가 주둔한 양양(襄陽)을 포위했다. 하지만 그는 유표의 부장 황조(黃祖)를 쫓아 산에 들어갔다가 역습을 당하여 어이없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대장을 잃은 손견군은 유표군의 공격을 받고 뿔뿔이 흩어져서 원술군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원소가 한복에게서 무혈로 빼앗은 기주 땅은 유주의 군웅 공손찬도 노리던 곳이었다. 공손찬은 191년에 발해를 침공한 청주의 황건 잔당 30만 명을 겨우 2만 명의 보병과 기병으로 격퇴하며 기주 일대의 맹주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공손찬은 원소와 대립하고 있던 사촌 동생 공손월(公孫越)을 파견하여 원술과 우호 관계를 맺었다.
원술은 손견(孫堅)과 공손월을 파견해 원소의 세력권 내에 있던 양성(陽城)을 공략하기 위해 출진했다. 이때 공손월이 동행했다가 이 전투에서 그만 전사한다.
공손찬은 공손월의 죽음이 원소 탓이라며 원소를 비난하는 격문을 발표하고 기주를 침공한다. 주 내에 있는 태수와 현령에게도 동참을 호소했다.
이에 원소는 휘하에 있던 공손찬의 사촌 아우 공손범(公孫範)을 발해군에 파견하여 공손찬과 우호 관계를 맺으려 시도했다. 하지만 공손범은 발해군에 도착하자마자 원소에게 등을 돌리고 공손찬군에 들어갔다. 이렇게 해서 기주를 사이에 두고 원소와 공손찬이라는 맹장의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지게 된다.
한편, 공손찬은 유주에서 유우와도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따라서 하북 방면은 당장이라도 전쟁이 일어날 듯한 긴박한 분위기가 감돌면서 군웅 사이의 대전을 예고하고 있었다.
또 익주에서는 익주목에 부임한 후 독립할 기회를 노리던 유언(劉焉)이 191년 장노(張魯)와 장수(張脩)에게 한중(漢中)태수 소고(蘇固)를 토벌하라 명했다.
하지만 장노는 소고를 토벌한 후에도 한중에 남아 장수를 살해하고, 오두미도(五斗米道, 중국 후한 말에 장릉(張陵)이 창시한 도교의 교단을 가리킨다-역주)를 일으켜 한중에서 독립했다. 그 후, 장노는 25년 동안이나 독립 왕국으로서 한중을 지배하게 된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주인공들
인물 삼국지 열전
장막(張邈) <?~195>
자는 맹탁(孟卓)이라고 하며 연주 동평(東平)군 수장(壽張)현 사람. 190년에 원소와 함께 반동탁 연합을 결성했다. 원소의 오만을 질책했다가 원소에게 죽을 뻔했으나, 조조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구한다. 이후 조조가 연주목이 되었을 때는 그를 수행했고, 서주에 침공했을 때는 연주의 빈자리를 맡을 정도로 신뢰받았다. 하지만 원소와의 관계로 조조를 불신하게 되면서, 여포와 함께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패한다.
공융(孔融) <153~208>
자는 문거(文擧)라고 하며 예주 노국(魯國) 곡부(曲阜) 사람. 공자(孔子)의 20세손이라고 한다. 하진에게 인정받고 벼슬길에 올라 호분중랑장(虎賁中郞將)에 임명되었다.
반동탁 진영에 이름을 올리지만 특별히 한 것도 없이 얼마 후 조조의 수하로 들어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