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년 후에도 변하지 않는 인문학 교육의 가치
세상은 정말 빠르게 변합니다. 아마 5년, 10년 후에 맞이할 세상은 지금과는 많이 다를 것입니다. 인공지능 시대가 가속화되고 인간의 역할이 달라져 있을 것입니다. 지금의 아이들은 우리가 상상도 하지 못한 세상에서 살아가게 되겠지요.
20년 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대학에 들어갈 때는 전자공학과, 건축학과 등이 인기가 있었습니다. 졸업 후에 취직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당연히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이 그런 학과에 갔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습니다. 무엇을 전공하면 유망할지 전혀 예측할 수가 없어요. 우리는 이렇게 예측되지 않는 미래를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요?
역사서 중에는 제목이 ‘감鑑’으로 끝나는 것들이 많습니다. 《자치통감資治通鑑》이 대표적입니다. 여기서 감은 거울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역사책 제목에 왜 거울 감 자를 붙였을까요? 역사책이 바로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왜 거울일까요? 과거를 들여다보니 미래가 보이더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어떠한 시대가 다가올지 불안해하고 동요할 필요는 없습니다. 앞으로의 삶이 불안하다면 지나온 역사를 돌아보면 되니까요. 지금까지도 인류에게 영향을 미치는 위대한 고전들을 읽으며 미래를 대비하면 되는 것입니다.
자녀 교육을 문화로 받아들이는 시간
그렇다면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독서에 대해 조금 이야기해볼까요.
미국의 사립학교 도서관은 그 크기가 어마어마합니다. 소장 도서가 10만 권이 넘는 곳들도 있을 정도니까요. 웬만한 지역사회 도서관보다 더 크죠. 상류층이 사는 저택에도 엄청난 크기의 도서관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에게는 독서 교육이라는 말이 없다고 합니다. 유럽의 상류층이나 조선의 사대부 집안 역시 독서 교육이나 인문학 교육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에게 독서는 교육이 아니라 문화였기 때문입니다. 딱히 “인문학 책을 읽어야 한다.” “플라톤을 읽어야 한다.” “바흐를 들어야 한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부모가 매일 책을 읽고 음악을 들었으니까요. 교육은 문화가 형성되지 않은 부자연스러운 환경에서 필요한 것입니다. 자동차에 대해 잘 알고 만들 수도 있는 사람이라면 굳이 자동차에 대해 교육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 사람에게 자동차는 하나의 문화니까요. 마찬가지로 독서가 문화라면 굳이 교육할 필요는 없겠지요.
우리 중 대부분은 독서 문화나 인문학 문화를 접해본 경험이 없습니다. 기껏해야 학원에서 정리해준 요약집을 보듯 책을 읽었을 뿐입니다. 어떤 관점으로 책을 읽어야 하는지 스스로 고민하고 답을 찾기보다는 남들이 어떻게 읽었는지, 어떻게 읽는 것이 정답인지를 고민할 뿐이지요. 이렇게 수동적으로 책을 읽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독서가 아닙니다. TV 여행 프로그램을 보는 것과 같죠. 실제로 그곳에 가지 않고도 거기에 다녀온 사람보다 더 잘 안다고 착각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착각에 빠진 부모는 아이와 함께 책을 읽고 같이 토론을 해도 옳은 방향으로 이끌어줄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이런 예를 들어볼까요?
어느 날 아이 게가 자꾸만 옆으로 걷습니다. 부모 게가 깜짝 놀라 아이 게의 다리 힘을 키워주죠. 게 다리에 근육이 단단하게 생깁니다. 부모 게가 다시 한 번 아이 게를 걸어보게 합니다.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아이 게는 더 빨리 옆으로 걷습니다. 우리의 교육 현실이 이렇습니다. 게가 앞으로 걸으려면 게의 상태를 벗어나야 합니다. 게의 상태로 다리 근육을 만든다면 오히려 곤란한 일만 생깁니다. 근육이 없을 때는 시속 5킬로미터로 걷던 아이 게가 다리 근육이 생긴 후로 시속 30킬로미터로 걷는다면 얼마나 위험하겠습니까.
어떻게 읽을 것인가
《내 아이를 위한 칼 비테 교육법》은 아이 게를 어떻게 게의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줄지를 가르쳐주는 책입니다. 얼핏 보면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책입니다. 그냥 200년 전에 조기교육에 성공한 이야기 정도로 치부해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현미경을 대고 들여다보면 놀라운 사실이 펼쳐집니다. 당시 서양 아이들의 대부분은 열 살이 되면 성인과 똑같이 16시간 이상 중노동을 했습니다. 대개는 다섯 살 때부터 허드렛일을 했죠. 그런 까닭에 아이들이 일찍 죽었습니다. 평균 수명이 23세 정도였어요.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교육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칼 비테가 아이 교육을 시작할 때 다들 비웃었죠. 도대체 왜 그렇게 빨리 아이를 교육하느냐고요. 그래도 칼 비테는 굴하지 않고 아이를 교육해서 결국 천재로 키워냈습니다.
우리가 《칼 비테 교육법》을 읽는 이유는 단순히 그가 어떻게 아이를 교육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시대와 저자를 자세히 읽고 나를 어떻게 바꿀지를 생각해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칼 비테의 책을 읽기 전에 세 가지에 유의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칼 비테가 살았던 시대는 어땠는지 잘 살펴봐야 합니다. 둘째, 그 시대 배경 안에서 칼 비테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행동을 했는지 알아봐야겠죠. 셋째, 우리는 어떤 미래를 만들어나갈 것인지 깊게 연구해봐야 합니다.
이 책을 통해 칼 비테의 교육관과 교육법에 흠뻑 빠져보고 여러분에게 어떤 변화의 계기가 생기기를 바랍니다. 결국 변화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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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비테의 책에는 자신에 대한 소개가 거의 없습니다. 그저 목사라고만 되어 있죠. 그렇기에 우리는 칼 비테가 그저 평범한 부모라고 생각하고 넘어갑니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칼 비테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인물이었습니다. 칼 비테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아야 그가 아들에게 펼친 교육법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겠죠. 여기서는 칼 비테가 누구인지, 그가 살았던 시대는 어땠는지 일단 그 배경부터 알아보겠습니다.
칼 비테는 19세기 독일의 유명한 천재 학자 칼 비테 주니어의 아버지입니다. 조기교육과 영재교육의 중요성을 일찍이 알고 실천한 사람이죠. 칼 비테의 아들 칼은 미숙아로 태어났습니다. 심지어 저능아라는 판정까지 받았습니다. 하지만 칼 비테의 철저한 교육으로 아홉 살에 6개 국어를 하게 되었고 열 살에 대학교에 입학한 것은 물론 열여섯 살에 법학대학 교수가 됩니다. 우리가 칼 비테에 대해 아는 것은 대략 이 정도입니다.
제가 칼 비테를 처음 만난 것은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할 때였습니다. 학교 현장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굉장히 의아했습니다. 왜 아이들이 배울수록 똑똑해지는 것이 아니라 바보가 되어가는지. 아이들은 학교에서, 학원에서 같은 내용을 수없이 반복해서 배웁니다. 하지만 배운 것을 설명해보라고 하면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상담을 해보면 다들 이구동성으로 불행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부모를 아주 싫어하죠. 마찬가지로 부모도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학교에서 자녀 상담을 해보면 다들 약속한 듯이 아이들의 나쁜 점만 이야기합니다. 아이와 부모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서로에게 악감정을 갖고 있는 것일까요. 저는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내기 위해 교육서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한 교육자들의 생각과 교육 방법을 알고 싶었던 거죠. 그러다 칼 비테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의 잠재력을 믿고 온 마음을 다해 교육한 점이 대단히 감명 깊었습니다.
제가 칼 비테를 알기 오래전부터 그는 교육계의 전설들에게 거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대표적으로 독일의 프뢰벨, 미국의 스토너 부인, 이탈리아의 마리아 몬테소리 등이 칼 비테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프뢰벨은 칼 비테의 교육법을 기반으로 유치원을 창설했습니다. 스토너 부인은 《칼 비테 교육법》을 읽고 자신의 아이에게 적용했습니다. 그 결과 스토너 부인의 아들 역시 다섯 살에 8개 국어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편 마리아 몬테소리는 당시 통제의 대상으로 여겨지던 어린이를 잠재력을 가진 인격체로 보고 눈높이에 맞는 교육을 주창했습니다.
이렇게 《칼 비테 교육법》은 이미 오래전부터 세계 각국에서 활발하게 읽히고 있었습니다. 책이 출간된 이후 100여 년간 묻혀 있다가 하버드 대학교의 레오 위너 교수에게 재발견되어 전 세계의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다고 하지요.
일본의 경우 1980년대에 이미 《칼 비테 교육법》을 읽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중국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칼 비테 교육법》이 대중적으로 읽히기 시작했죠.
하지만 《칼 비테 교육법》은 우리나라에는 그다지 많이 알려진 편이 아닙니다. 유아교육에 관심 있는 사람들 사이에만 알려진 정도지요. 우리가 아는 칼 비테는 아들을 천재로 키워낸 사람 정도에서 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보다 놀라운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칼 비테에 대해서 한번 알아볼까요? 칼 비테의 직업은 목사였습니다. 대한민국에서 목사가 되려면 신학 공부를 열심히 하면 됩니다. 목사는 종교인이지 지식인은 아닙니다. 목사는 교회를 이끌고 믿음을 이끌 뿐이지 정치나 교육을 이끌지는 않으니까요. 우리나라에서는 목사가 지극히 종교적인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200년 전 독일의 목사는 어떤 존재였을까요?
그 시절의 목사는 종교인이자 지식인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따지면 대학 교수 이상의 지식인이었죠. 좀 더 구체적으로 목사라는 직업에 대해 당시 사람들이 어떤 인식을 가졌는지 책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바로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라는 책입니다. 헤세는 칼 비테가 세상을 떠난 해로부터 약 40년 뒤인 1877년에 태어났습니다칼 비테가 태어난 해는 1748~1831 또는 1767~1845로 두 가지 설이 있는데, 본서는 전자를 기준으로 하였습니다. 헤세는 목사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 열네 살에 신학교에 입학했지요. 하지만 신학교의 기숙사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학교를 뛰쳐나와 자살 시도를 했습니다. 자살 시도는 실패하고 그는 다시 학교로 돌아갔지요. 하지만 결국 1년도 버티지 못하고 학교를 그만두게 됩니다. 이후 그는 문학 수업을 받고 위대한 작가가 됩니다. 헤세는 자신의 경험담을 《수레바퀴 아래서》에 담았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한스 기벤라트입니다.
한스는 재능이 몹시 뛰어난 아이였기에 이미 장래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교사는 물론 이웃 사람들과 학교 친구들도 한스가 틀림없이 성직자 양성학교에 들어갈 것이라고 믿었던 거죠. 그다음에는 신학교를 거쳐서 설교대에 서거나 강단에 진출하는 탄탄대로가 펼쳐졌습니다. 이런 선택을 할 수 있는 학생들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주 전체에서 40~50명의 소년들만이 이런 평탄한 길로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한스는 성직자 양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합니다. 한스의 일과는 치열한 사교육에 시달리는 우리나라 아이들 못지않았습니다. 오후 4시까지 수업을 받고 교장 선생님 댁에서 그리스어 수업을 받았습니다. 목사님에게 라틴어와 종교 수업을 받고 수학 과외도 따로 받았습니다. 정말 말만 들어도 숨이 찰 지경입니다. 도대체 한스는 왜 이렇게까지 목사가 되려고 했을까요?
당시 신학교에 들어가는 것은 최고의 출세 코스였습니다. 목사는 일반 서민에게 허락된 최고의 지위 가운데 하나였으니까요. 일단 신학교에 들어가면 바로 국가로부터 생활비를 보조받게 됩니다. 그러니 먹고살기 어려운 시절에 얼마나 좋은 직업이었겠습니까.
그런데 눈치채셨습니까? 소설 속에서 한스에게 그리스어와 라틴어 수업을 해주는 사람이 동네 목사님과 교장 선생님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당시에는 시골 목사들도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기본적으로 구사했던 것이죠. 한스가 2등으로 시험에 합격한 후에는 히브리어까지 가르쳐주겠다고 말합니다. 시골 목사가 히브리어 실력까지 갖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다 보면 당시 마을 목사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목사들과는 사뭇 다른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러니까 칼 비테 역시 상당한 지식인 계층이었던 것입니다.
칼 비테는 52세에 결혼했습니다. 결혼이 많이 늦어진 요즘에도 52세는 굉장히 늦은 나이입니다. 게다가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나게 늦은 나이죠. 지금 기준으로는 거의 백 살에 결혼 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일 겁니다.
칼 비테에게 결혼의 목적은 하나님의 계획에 맞는 자녀를 키우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신앙심이 깊었던 칼 비테는 자녀가 부모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오랫동안 기도하고 또 기도하다가 중년이 되어서야 결혼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부잣집 아가씨나 예쁜 아가씨를 찾았지만 칼 비테는 육신이 건강하고 내면이 아름다운 여자를 찾았습니다. 아버지의 첫 번째 임무는 자녀를 위해 좋은 엄마를 선택하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교육을 준비했던 것이죠. 칼 비테가 뛰어난 지적 능력을 지닌 사람이어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칼 비테는 대를 잇거나 부모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자녀가 희생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대신 아이가 사회와 가정에 필요한 인재가 되도록 부모가 최선을 다해 교육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마침내 그는 아이를 낳았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는 곧 병에 걸려 죽고 말았습니다. 바로 칼 비테 주니어의 형이었습니다. 칼 비테는 슬픔 속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조기교육뿐만 아니라 태교도 중요하다는 것을요. 그래서 그는 건강한 아이를 얻기 위해 체질을 개선했을 뿐만 아니라 임신한 아내를 편안하고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칼 비테 주니어가 태어났습니다. 칼 비테는 아들의 교육에 대해서도 확신이 가득했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아들을 천재로 키울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칼은 예정보다 일찍 태어났기 때문에 여러 면으로 부족해 보였습니다. 심지어 저능아 판정까지 받았죠. 그렇기에 칼 비테를 비웃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칼이 천재가 되면 해가 서쪽에서 뜨겠소.”
하지만 칼 비테는 절대 굴하지 않고 ‘자신 있다.’고 장담했습니다.
칼 비테의 아내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습니다. 그저 평범한 여자라고만 알려져 있죠. 하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절대 평범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칼 비테의 아내도 칼 비테처럼 목사 가정에서 자랐거든요. 칼 비테는 목사가 되기 위해 오랜 시간 깊이 있게 공부했지만 아내는 그렇게까지 공부하지는 않았겠죠. 하지만 당시 목사들이 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목사 가정에서는 기본적으로 그리스어, 히브리어, 라틴어 대화가 가능했으리라 짐작됩니다. 그런 가정에서 자란 칼 비테의 아내 역시 그런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목사인 칼 비테가 보기에는 평범한 여자였겠지만 사실은 지적 수준이 상당히 높은 여자였던 것입니다.
칼 비테 시대에 책은 주로 지식인들이 읽었습니다. 그래서 칼 비테는 자신의 책에서 자신을 굉장히 겸손하게 표현했을 것이고, 그러다 보니 아내 역시 지극히 평범하다고 썼던 것이 아닐까요. 그의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아마 칼 비테는 목사의 딸들 중에서 지적인 여자를 고르기 위해 늦은 나이까지 결혼을 미룬 것이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칼 비테는 진심을 다해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 노력했고 아들을 천재로 키워냈지만 모든 것이 완벽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들 칼 역시 자신을 훌륭하게 키워준 아버지를 존경했지만 때로는 불평불만을 늘어놓기도 했어요.
가령 칼 비테에게는 극단적인 면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들이 친구를 사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죠. 물론 나름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나쁜 친구들에게 금세 물든다는 것이었죠.
당시 독일의 농촌 마을은 먹고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대기근도 일어나고 과격한 시위들도 많았습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으면 사람들은 쉽게 타락하게 됩니다. 그렇다 보니 아이들도 도박을 하고 술을 마시는 일이 흔했습니다. 바르게 자라던 아이들이 그런 친구들에게 순식간에 물드는 것을 보면서 칼 비테는 아들이 친구를 사귀는 것을 막을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아들은 아버지가 원망스러웠을 것입니다. 나쁜 친구들이라도 친하게 지내면서 좋은 사람으로 바꿀 수도 있을 텐데, 그리고 찾아보면 좋은 친구들도 있을 텐데 무작정 놀지 못하게 하니 아버지가 원망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또 하나, 칼 비테는 장난감을 사주는 대신 직접 만들어주었습니다. 물론 직접 만든 장난감이 더욱 좋은 교구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 입장에서는 파는 장난감이 얼마나 갖고 싶었겠습니까. 아마 칼 비테가 장난감을 거의 사주지 않은 것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탓도 있었을 것입니다.
성장기에 각각의 발달 단계에서 충분히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훗날 성격이나 인격에 장애가 생길 수도 있다고 합니다. 가령 입양아들 중에는 정서적으로 불안한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활발히 기어 다녀야 하는 시기에 충분히 기어 다니지 못한 것이 훗날 정서적 결핍으로 나타나는 것이죠.
그런데 그 치료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다시 아기가 된 듯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고 열심히 기어 다니는 것입니다. 어른이 기어 다닌다니, 조금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결핍을 치료하는 데는 더할 나위 없이 효과적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장난감을 가지고 놀아야 하는 나이에 공부만 했던 아이들은 훗날 장난감을 가지고 놀게 해주면 치유가 된다고 합니다.
인간에게는 자연적인 발달 단계가 있고 각 단계마다 과제가 있습니다. 만일 그것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한다면 성인이 되어서 결핍으로 나타납니다. 칼 비테는 그런 면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나는 어떤 부모인가
아이를 어떻게 교육할지 생각하기에 앞서 먼저 부모인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세상이 보는 나의 모습을 봐야 하는 것이죠. 나는 칼 비테처럼 내공이 충실한 사람인가? 아니면 남의 흉내만 내는 사람인가? 여기에 대한 엄격한 평가가 있어야 합니다. 더 중요하게는 내 아이에게 나는 어떤 모습인지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부모는 자신의 아이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전혀 예상하지 못하죠. 대부분은 아이들이 자신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그나마 아이들이 어릴 때는 부모를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죠. 그러나 아이들은 빠르게 성장합니다. 하지만 부모는 아이의 성장을 눈치채지 못하고 아이가 여전히 순수하게 부모를 좋아할 거라고 착각합니다.
제가 초등학교 교사를 하던 시절을 떠올려보면 아이들은 부모들이 모르는 다른 인격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남학생보다 여학생이 그랬습니다. 남학생들은 부모에 대해 써보라고 하면 부모님이 좋다, 또는 싫다라고 단순하게 썼습니다. 아무리 길어봐야 반쪽을 넘어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여학생들의 경우 금세 종이 한 장을 채웠습니다. 특히 조숙한 여자아이들이 친구들과 돌려보는 비밀 일기장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엄마 욕으로 뒤덮인 경우도 있었습니다. 부모님은 전혀 그 사실을 모르죠.
그런데 아이가 바라보는 나의 모습을 전혀 모른다면 교육은 전부 헛것입니다. 관계가 좋지 않으면 신뢰 회복이 우선입니다. 그러므로 아이의 교육에 대해 생각해보기 전에 우선 나는 어떤 사람인지부터 돌아봐야 합니다. 아이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이의 눈에 비친 나의 모습은 어떤지를 찬찬히 되새겨보는 거죠. 어떤 모습이든 실망하거나 좌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이를 알고 나를 아는 데서부터 진정한 교육이 시작되니까요.
칼 비테는 1748년에 태어나 1831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리나라의 영·정조 시대였습니다. 조선의 르네상스가 빛을 발하다 꺼지는 때였습니다. 칼 비테가 태어난 1748년은 조선이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고 프랑스의 몽테스키외가 삼권분립의 원칙을 설파한 《법의 정신》을 출간한 해입니다. 서양에 민주주의가 정착되면서 집단에서 개인을 발견한 때입니다. 산업혁명의 시대이기도 했죠. 산업혁명의 시대에는 어린아이들도 공장에 가서 일을 해야 했습니다. 아동학대도 심했고 공장에서 죽어가는 아이들도 많았죠. 탄광에 팔려가는 아이들도 많았고요.
칼 비테의 아들 칼 비테 주니어는 1800년에 태어나 1883년에 사망했습니다. 근대의 마지막 시기였습니다. 격동의 시기에 태어난 칼 비테 주니어는 한편으로 운이 좋은 아이였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여섯 살만 되면 술집 같은 곳에서 허드렛일을 돕거나 심부름을 해야 했지만 칼 비테 주니어는 조기교육에 눈뜬 아버지 덕분에 일을 하지 않고 훌륭한 교육을 받았으니까요.
당시 독일은 몰락하고 있었습니다. 프로이센 군대가 나폴레옹 군대에게 처참하게 패하고 나라에는 희망이 사라졌죠. 칼 비테는 몰락의 기운이 가득한 나라의 시골 마을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한편으로 자괴감이 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나라에서 아이가 태어난 것에 열패감을 가졌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칼 비테는 교육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칼 비테는 아이를 제대로 가르친다면 유럽 초강대국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은 아이보다 훌륭해질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아이가 모든 것을 바꿀 수도 있다고 기대했던 것입니다.
칼 비테 주니어는 객관적으로 조금 모자란 아이였습니다. 그런 아이를 보면서도 칼 비테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아들에 대한 자신감과 믿음이 바로 칼 비테 교육법의 핵심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런 믿음이 칼 비테 주니어를 최고로 키우는 데 한몫했던 거죠.
독일은 서양 최초로 국민교육을 실시한 나라였습니다. 교육의 목적은 국가에 충성하는 국민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런 불평 없이 국가를 위해 온몸을 바치는 국민 말이에요. 그래서 아이들은 수업 시간에 질문을 할 수 없었고 규칙대로만 행동해야 했습니다. 비판 능력을 상실하게 하고 공장처럼 일꾼을 찍어내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었습니다. 한마디로 프로이센의 교육은 입력 받은 대로만 움직이는 로봇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교육 방식은 효과를 거두어서 이후 워털루 전투에서 웰링턴 장군이 승리하는 데 프로이센 군대가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이 사건은 유럽과 미국을 경악시켰습니다. 특히 미국이 많은 충격을 받았죠. 당시 유럽에 비해 매우 처져 있던 미국은 얼른 발전하기 위해 프로이센의 교육제도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1814년부터 1900년까지 5만 명 이상의 지식인들이 프로이센에 가서 1만여 명이 박사 학위를 받아옵니다. 그리고 그들이 프로이센의 교육제도를 그대로 따라 미국의 교육제도를 만들게 됩니다. 중하류층을 위한 공립학교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의 모범이 되었던 프로이센 교육은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요? 히틀러의 등장과 함께 철저히 망하게 됩니다. 인문학적인 토론이나 성찰 없이 엘리트 교육에만 집중했던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성찰 없이 지식만 쌓는 교육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지난 정권에서 우리나라를 혼란에 빠뜨린 사람들도 전부 일류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나의 행동이 우리나라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에 대한 진지한 사고가 부족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망하지 않고 오히려 부강한 나라로 발전했을까요? 미국은 프로이센의 교육제도를 받아들인 대신 중하류층과 상류층의 교육 방식을 차별화했습니다. 중하류층에게는 주어진 일을 제대로 하도록 교육한 반면 상류층에게는 깊이 있는 인문학 교육을 실시했던 것이죠.
다시 칼 비테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칼 비테는 당시 독일 학교를 ‘무능력한 사람들이 교사라는 이름으로 집합해 있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프로이센의 교사는 비록 경제적으로는 중하류층이었어도 사회적으로는 중상류층에 속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칼 비테의 기준에는 크게 미치지 못하는 무능력한 수준이었습니다.
칼 비테는 ‘학교는 지식을 파는 소매점으로서 강압적인 교육과정을 따르는 학생들을 대량으로 생산한다’고 했습니다. 평범한 학생들은 무능력한 양 떼에 불과하며, 사회가 만들어놓은 기득권의 틀에서 수탈당하는 바보로 살아가게 된다고 했죠. 또한 부모가 지출한 비용에 비해 비효율적인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왠지 마음이 불편해지죠? 현재 한국 사회에 대입해도 꼭 들어맞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칼 비테는 독일 교육의 병폐를 정확히 진단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인문고전 가운데 교육에 관한 부분을 읽고 연구했습니다. 특히 그리스와 로마의 인문학 교육을 많이 참조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만의 교육 사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리스와 로마의 천재들을 분석해서 그들이 어릴 때부터 인문학 교육을 철저하게 받았다는 공통점을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을 자신의 아이에게 그대로 적용하기로 했습니다.
반면 루소는 천재는 태어나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루소는 황당하게도 자기 자식을 고아원에 맡겨버립니다. 천재로 태어났다면 어디에서든 천재로 자랄 거라고 생각한 거죠. 루소의 《에밀》에 따르면 한 어미에게서 태어난 강아지들이 같은 곳에서 교육받아도 결과는 다르다고 합니다. 어떤 강아지는 천성적으로 똑똑하고 예민한 반면 어떤 강아지는 멍청하고 둔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페스탈로치는 조금 다릅니다. 부족한 아이라도 제대로 교육받으면 훌륭하게 자란다고 믿었습니다. 쌍둥이 망아지 가운데 똑똑한 농부에게 보내진 망아지는 명마가 되는 반면 가난한 농부에게 보내진 망아지는 돈벌이에 이용되는 보잘것없는 마바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페스탈로치가 이런 생각을 가졌던 것은 사상가 엘베시우스 덕분이었습니다. 엘베시우스는 사람은 누구나 똑같이 태어난다고 주장했습니다. 다만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가에 따라 어떤 사람은 천재나 영재가 되는 반면 어떤 사람은 평범한 사람, 심지어 바보가 된다고 했습니다.
칼 비테는 기본적으로 엘베시우스의 의견에 동감했습니다. 아무리 지적으로 떨어지는 아이라도 조기교육을 통해 천재로 만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엘베시우스와는 조금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아이의 성장에 환경이 중요한 것은 맞지만 개인의 능력에도 분명 차이가 있다는 것이었죠. 비범한 아이의 재능을 100, 바보의 재능을 1, 평범한 아이의 재능을 50이라고 할 경우 교육으로 잠재력을 계발하면 평범한 아이도 80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80의 재능을 가진 아이가 같은 교육을 받으면 100의 재능을 발휘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루 종일이 아니라 두세 시간만 공부하면 충분하다고 했습니다. 고통과 인내가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으로 이루어지는 교육이었죠. 이런 생각을 토대로 칼 비테는 아이의 재능을 키워줘야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아이가 어떤 재능이 있는지, 무엇을 잘하는지 깊이 있게 관찰했습니다.
칼 비테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위대한 교육 사상가들의 이론을 소화하여 자신의 아이에게 맞추어 자신만의 천재론을 만들었으니까요. 그는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결국 독일 주류 이론의 한계를 뛰어넘은 교육을 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