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님이와 꽃봉이, 그리고 누구보다 큰똥글.
이왕 사는 인생, 재미있게 살자.
여는 말
아이도 엄마도
행복한 영어 공부
“뭐? 너 진짜 알파벳 몰라? 이게 b야, d야?”
꽃봉이 2학년, 꽃님이 6학년 여름방학, 어학연수를 하러 캐나다로 가는 비행기 안이었습니다. 병설 유치원 출신 꽃봉이는 캐나다행이 결정된 후 허겁지겁 과외를 몇 달 받은 게 영어 교육의 전부였죠. 그래도 우리말은 한 마디도 안 쓰고 교포 선생님께 일대일로 배웠으니 파닉스는 할 줄 알았는데, 파닉스는커녕 b와 d도 헷갈리다니요!
“삐(b)는 하늘에서 쭈욱 내려와서 빗방울 딱! 그래서 삐야. 디(d)는 똥글뱅이 뒤에, 디(뒤)에 작대기가 있어서 디야. 디(뒤)에 있어서 디!”
앞이 깜깜했습니다. 바쁘답시고 선생님께 맡겨놓고 숙제 한 번 제대로 체크하지 않은 대가를 이렇게 받는구나……. 나도 나름대로 인생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아아, 이제 어떡하지?
평소엔 아이 성적이 왜 엄마 탓이냐고 목청 높였지만, 지금 누굴 탓하겠습니까. 누나 때 사놓은 영어 그림책과 DVD, CD, 각종 영어 교재가 집에 가득한데도 안 가르친 엄마 잘못 맞습니다. ‘영어 가르쳐야지’ 결심은 몇 번 했지만, 영어 그림책도 읽어주다 말다~ DVD도 보여주다 말다~ 엄마가 피곤하거나 바쁘면 흐지부지…….
“꽃님이 보니까 일찍 시작해도 별거 없더라. 우리말 탄탄히 하고, 영어는 학교 갈 즈음에 시작하면 돼.”
하지만 둘째라고 마냥 귀엽다며 물고 빨고만 했더니 학교 갈 즈음엔 꽃봉이가 한글도 제대로 모르더라고요. 허둥지둥 한글과 숫자를 하느라 영어까지 신경 쓸 틈이 없었죠.
비행기 안에서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휴~. 어쨌거나 영어라곤 한 마디도 못 하는 꽃봉이가 당장 보름 후면 캐나다 학교에 가야 하는데, 화가 나면서도 미안하더군요. 부모 결정에 따라 엉겁결에 낯선 나라로 끌려온 꽃봉이는 얼마나 무섭겠어요? 엄마의 급한 마음 같아선 학교 갈 때까지 빡세게 공부를 시키고 싶었지만, 아이의 스트레스를 생각하면 막 몰아붙이기도 미안하고요.
캐나다에 도착한 다음 날, 내가 이 동네에 산다는 걸 증명해줄 집 렌트 계약서를 들고(도서관 카드를 만들어야 하니까요) 도서관부터 갔습니다. 제가 ‘0세부터 6학년까지 생각의 힘을 키우는 그림책 독서법’ 『웰컴 투 그림책 육아』(북하우스)를 썼습니다. 꽃님이, 꽃봉이와 함께 우리말 그림책을 읽고 나눈 대화의 기록이자 그림책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쓴 책이에요. 엄마가 할 줄 아는 게 아이와 함께 그림책을 읽는 것밖에 없으니, 영어 그림책이라도 보여주려고요. 글자 모양이라도 눈에 익숙해지라고요.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요? 도서관에 가긴 갔는데 무슨 책을 빌려야 할지 모르겠는 겁니다. 제가 비록 꽃봉이는 영어 문맹으로 놔뒀지만, 꽃님이는 학원 한 번 안 보내고 10년 넘게 집에서 저랑 영어책을 읽으면서 공부시켰거든요. 나름대로 아이들 영어책이라면 어지간히 안다고 생각했는데, 도서관의 이 많은 책 중에 제가 아는 책이 이토록 없다니요?!
일단 도서관 책꽂이 한 칸의 그림책을 싹 다 꺼냈습니다. 한 사람당 60권씩 빌릴 수 있다기에, 글자 수 적다 싶은 책은 다 담았습니다. 100여 권을 골라 낑낑대며 집으로 들고 오며 결심했습니다.
“이번엔 끝까지 할 거야!”
2002년생 꽃님이가 어릴 때는 엄마가 실생활 속에서 직접 영어를 사용하면서 아이에게 ‘자연스럽게’ 영어에 노출시키는 공부법이 유행이었어요. 저는 ‘자연스럽게’ 영어를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던지라, 화장실에는 “Wash your hands. Brush your teeth. Spit it out.”(손 씻자. 이 닦아. 퉤 뱉어.), 옷장 앞에는 “Let’s get dressed.”(옷 입자.) 이런 카드를 붙여두고 커닝을 해가며 아이에게 영어로 말을 걸곤 했습니다.
하지만 잘 안 되더라고요. 그림책을 읽으면서 하는 질문도 고작 “What color do you like best?”(무슨 색깔 제일 좋아해?), “How many dogs are in this picture?”(이 그림에 개가 몇 마리 있니?) 이 수준에서 뱅뱅 돌았습니다. 나름대로 밤을 새며 영어 문장을 외웠는데도 말이죠. 그래서인지 유아기 꽃님이의 아웃풋은 신통치 않았습니다.
어쨌거나 꽃님이는 초등 내내 꾸준히 영어책을 읽었고, 6학년에 캐나다에 갔을 때는 듣기와 읽기도 얼추 되는 상태였습니다. 에릭 칼의 『Brown Bear, Brown Bear, What Do You See?』 그림책에서 출발해서 여섯 살쯤 파닉스 교재를 거쳐, 「Learn to Read」, 「Science Emergent Readers」, 「Hello Reader」 등 한 줄짜리 리더스북을 읽었고요, 술술 읽는다 싶으면 서너 줄짜리 리더스북으로 글 분량을 늘렸습니다. 각 단계를 넘어갈 땐 충분히 임계량을 채울 수 있도록 ‘지평선 읽기’를 하고, 드디어 챕터북으로 넘어갔죠. 처음엔 챕터북이되 그림이 많은 것, 이왕이면 역사, 사회, 과학 등 배경지식도 좀 쌓을 수 있는 내용의 챕터북 시리즈를 두루 읽고 소설로 진입 성공! 이게 말이 쉬워서 그렇지, 고비마다 얼마나 갈등과 고민을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어쨌거나 그 결과, 꽃님이가 제 나이 캐나다 아이들과 독서 수준이 비슷하게 됐으니 ‘엄마표 영어’로 성공한 셈이긴 한데, 저는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습니다. 제가 구태여 학원이나 다른 시스템의 힘을 빌리지 않고 엄마표 영어를 한 이유는 영어를 ‘미션 클리어’ 해야 하는 ‘공부 과목’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독서와 적절한 학습 속에서 보다 즐겁게, 보다 살아 있는 언어로서 익히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엄마’였다는 것뿐이지 과연 그렇게 행복하고, 효과 있게 한 건지 자신이 없었습니다. 학원 숙제에 치이는 게 싫어서 독서를 택한 건데, 꽃님이에게 영어책 읽기는 ‘엄마 학원’에서 낸 숙제가 아니었을까…….
무엇보다 문제는, 둘째인 꽃봉이에게는 알파벳도 가르치지 못할 정도로 엄마가 지쳐버렸다는 거죠. 앞으로 몇 년이나 더 어떻게 버틸지 자신이 없었습니다. 결국엔 어학연수를 택할 만큼요.
도서관을 내 집처럼 들락거린 지 한참 후에야 깨달았습니다. 제가 알고 있던 영어책은 순수한 그림책Authentic picture book보다 영어 학습 효과를 내기 위해 문장과 단어를 단순하게 만들고 레벨별로 정리한 ‘교재’가 더 많았더군요. 파닉스를 배우는 시기엔 파닉스 규칙에 맞는 단어들로 이뤄져 있는 책, 읽기를 시작한 후엔 300단어, 500단어 등 단어 수를 점차 늘려갈 수 있도록 레벨별로 나온 시리즈들을 ‘그림 있고, 문장 짧다’고 다 그림책인 줄 알았던 거죠.
그나마 읽은 그림책들도 단어를 바꿔가면서 문장이 패턴처럼 반복되는 책이 유난히 많았습니다. 제가 ‘읽어주는 음원’이 있는 책들을 주로 골랐기 때문입니다. “엄마 발음이 좋지 않아서 직접 읽어주면 아이 귀 버릴까 봐”, “읽어주고 싶어도 영어를 잘 몰라서” 읽어주는 음원, 이왕이면 아이가 재미있게 들으라고 노래로 된 것들로 고르다 보니, 결과적으로 노래로 만들기 쉬운 책들만 읽은 거죠.
길이가 짧고, 문장이 반복되는 책은 대상 연령이 어리게 마련이고, 책 종류 자체도 적습니다. 그러다 보니 영어 그림책 자체에 크게 애정을 느끼지 못한 채, 리더스북으로 진도를 나가버린 겁니다. 아마 저랑 비슷한 집이 많지 않을까 싶어요.
꽃님이의 경험으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 그렇다면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가 새롭게 고민을 하면서 도서관에서 산 지 몇 달. 그제야 도서관에서 제가 아는 책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보니 꽃님이, 꽃봉이가 재미있게 읽었던 우리말 그림책들이 원서로 죄다 있는 겁니다! 아, 맞아. 원래 영어책인데 우리말로 번역된 거였지?! 써놓고 보니 제가 좀 바보 같네요. 하하. 당연한 걸 그 전엔 왜 몰랐을까요?
그때부터는 한글책을 고를 때와 똑같은 기준으로 책을 골랐습니다. 어떤 책이 영어 실력 향상에 유리한가보다 어떤 책이 좋은 책인가를 생각했어요. 한글책이든 영어책이든 좋은 책의 기준은 똑같습니다. 재미있을 것, 아름다울 것, 그리고 마음을 움직일 것.
그즈음엔 꽃봉이의 영어 실력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던 참이라, 그림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영유아일 때 영어를 자연스레 시작하는 것도 좋지만, 좀 자란 다음에 영어를 하는 것도 장점이 있더군요. 일단 아이가 ‘해야 한다’는 걸 알고요! 우리말 책의 재미를 아는 아이는 영어책을 읽는 것도 크게 힘들어하지 않습니다. 모국어 수준이 높을수록 외국어 습득에 유리하답니다. 책을 읽으면 무슨 이야기인지 빨리 알아차리기 때문에 모르는 단어가 좀 있어도 쿵 하면 짝, 짝 하면 쿵 하고 문장 뜻을 추론해내거든요.
당시 꽃봉이가 독서를 ‘즐겁게’ 할 수 있도록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매일 책 읽을 시간을 최우선으로 확보하고, 간식은 충분히! 무엇보다 재미있는 책을 찾아야죠. 아이는 머릿속에 새로운 언어의 집을 짓느라 얼마나 힘들겠어요? 이왕이면 재미있는 재료를 써야 덜 지치겠죠. 똑같은 단어 하나를 익혀도 못 외울까 봐 안달하면서 외우는 것과 그 한 단어로 줄거리 어엿하게 있는, 재미있고 찡한 그림책을 보면서 습득하는 건 완전히 다른 차원일 테니까요.
처음 제가 정한 도서관 원칙은 ‘T요일은 도서관!’이었어요. Tuesday(화요일), Thursday(목요일), Saturday(토요일)에는 무조건 도서관에 가는 거죠. 정해진 요일에 학원에 가듯이, 정해진 요일엔 도서관으로! 시간 날 때마다 가겠다고 생각하면 자꾸 미루게 되더라고요. 학원에 결석하지 않듯이 도서관도 결석하지 않겠다는 결심이었습니다. (그러다 나중에는 월수금으로 바꾸었는데요, 제가 ‘T요일은 도서관!’이라는 구호를 못 쓰는 걸 아쉬워하자, 꽃봉이가 “Today마다 책을 읽을게요. 그러니까, 매일매일.”이라며 위로해주더라고요.)
도서관 요일엔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준 후 바로 도서관으로 갔습니다. 매번 60권 정도 빌렸으니까 한 주에 180권을 빌린 셈이고, 여러 번 읽은 책도 있지만 재미없다고 안 읽거나 바빠서 못 읽은 책도 있으니 굳이 평균을 내자면 1주일에 100권 정도 읽은 것 같아요.
어떤 날은 한 권도 읽지 못했지만, 어떤 날은 두세 시간씩 책탑을 쌓아가며 읽었습니다. 귀국할 때 도서관 대여목록을 봤더니 1년 반 동안 3,500권이 넘었더라고요. 아무래도 뒤로 갈수록 긴 책을 읽는 경우가 많아져서 권수가 많이 줄었으니, 참 열심히 읽었다 싶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한국에서 이만큼 열심히 도서관을 다니고, 정성 들여 책을 고르고, 충분히 읽었더라면 어학연수를 오지 않았어도 비슷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실없는 자랑을 하자면, 알파벳을 헷갈려 하던 꽃봉이가 그림책만 읽고도 1년 반 만에 해리포터 정도 소설을 읽는 수준이 되었으니 그림책의 공부 효과가 참 대단한 것 같습니다.
그림책으로 영어를 배우면 장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랍니다. 문법을 가르치기 위해 일부러 만든 문장이 아니기 때문에 현지인들이 실생활에서 쓰는 자연스러운 표현을 익힐 수 있고요, 언어뿐만 아니라 문화와 사고방식까지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림이 함께 있으니 뉘앙스와 뜻도 훨씬 더 정확하게 익히고, 교재의 진도에 따라 나간다면 한참 후에 배우는 어려운 문법 표현들도 자연스럽게 습득합니다. 그림책 자체가 주는 스토리의 즐거움과 그림을 통한 미적 경험만 생각해도 감사한데, 실생활 속에서 쓰는 ‘살아 있는 표현’과 적재적소에 쓰인 문법까지 보면 엄마 마음이 진짜 뿌듯하답니다. 하하하. 무엇보다 그림책의 가장 큰 장점은 재미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읽기 연습을 위해 만든 교재는 말고 순수한 그림책만 읽자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랍니다. 두 종류의 책이 적절하게 잘 섞여야 효과가 나오더라고요. 그림책으로 진주를 만들고, 교재로는 진주를 꿰어 목걸이를 만든다고 할까요?
매일매일 영어 그림책으로 공부를 하던 시절(꽃봉이 본인은 공부인 줄 잘 몰랐지만!) 가장 행복했던 것은 우리 가족에게 다시금 ‘그림책 대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한동안 영어 스트레스로 책 대화가 사라졌었거든요. 영어 그림책에 익숙해지면서 우리말보다 영어로 읽어야 더 ‘맛’이 느껴지는 책들, 아직 미처 번역되지 않은 책들…… 우리는 매일 보물을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영어 그림책에 대해, 그리고 서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꽃님이와 꽃봉이는 네 살 차이입니다. 한창 꽃님이가 놀러 다닐 나이에 터울이 있는 동생 때문에 동네 놀이터만 맴돌아야 했던 게 미안했는데, 그림책의 장점을 깨달으면서 그 미안함이 많이 가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남들은 그림책을 졸업할(!) 나이에도 동생 때문에 집에 그림책이 가득 있으니 꽃님이는 훨씬 오래 그림책을 읽고 대화하며 즐길 수 있었거든요.
그런데 우습게도 영어 그림책을 읽으면서 꽃봉이에게도 비슷한 느낌이 들었답니다. 남들은 두꺼운 영어 소설 읽을 때, 꽃봉이는 영어를 못하니까 한 줄짜리 그림책밖에 읽을 수 있는 게 없어서 읽기 시작한 건데, 그 덕분에 남들은 그림책은 그만 보는 나이에도 그림책을 보고 있으니까요. 그림책이 주는 위로와 감동, 상상과 유머, 통찰과 지혜를 마음껏 느끼면서요!
이 책은 그렇게 재미와 공부, 두 마리 토끼를 잡았던 추억의 기록입니다. 3,500여 권 그림책 중에서 글이 적건 많건 재미있는 책, 영어 문장 말고도 볼 게 있고 느낄 게 있는 책들로 골랐어요. 오히려 아주 어린 아이들에겐 길이는 짧아도 어려운 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림 하나에 단어 하나씩 있어서 단어 공부에 딱 좋은 컨셉북부터 어른이 읽어도 만만찮은 그림책까지 글 분량에 따라 단계별로 나누었습니다. 영어를 늦게 배우기 시작해서 우리말 책 수준에 비해 ‘재미없는’ 영어책만 읽어야 했던 친구들에게 특별히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캐나다에 있을 때, 옆집 한국인 엄마가 여덟 살 아들이 캐나다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를 못한다며 하소연했습니다. “쉬는 시간에 구석에서 애들 노는 거 구경만 하고 있더라고요. 아직 영어를 잘 못해요. 일단 먼저 다가가서 ‘같이 놀자’ 하라고, ‘Let’s play together!’ 연습시켜서 보내긴 했는데 잘 말할지…….”
그런데 마침 옆에 있던 꽃님이가 조심스레 “‘Let’s play together!’ 하면 좀 촌스러워요.” 하는 겁니다. “엥? 같이 놀자! ‘렛츠 플레이 투게더!’ 해야지, 다른 말이 또 있어?” 꽃님이 말로는 “Let’s play together” 하면 어쩐지 “내가 너희와 같이 놀아도 괜찮겠니?” 이런 문어체 느낌이래요. 틀린 말은 아니지만, 너무 외국인스럽다고 할까요?
꽃봉이가 “맞아. 나는 ‘May I join in?’ 그러는데?” 하대요. 어디서 “May I join in?”을 배웠냐니까 꽃봉이가 그러더군요.
“그림책에서 봤지.”
아는 단어가 많아도 정작 말을 못하는 이유
그림책으로 영어를 배우면 좋은 점은 실제로 쓰는 표현을 다양한 상황 속에서 배울 수 있다는 겁니다. 단어를 영어와 한국어 일대일 대응으로 외우고, 문법을 몇 개의 문장 속에서만 배우면 한계가 있습니다. 아는 단어, 숙어는 많은데 정작 말은 할 수 없는 거, 우리 어른들이 겪어봤잖아요. 언어 지식에, 어떤 상황에서 이 말을 쓰는지 ‘경험치’가 덧붙여져야 내 말이 되는 법이죠. 그림으로 한눈에 알 수 있는 상황, 자연스럽게 반복되는 문장, 말하는 이의 감정까지 다 느낄 수 있는 영어 그림책이야말로 생생한 경험치를 제공해줍니다.
『Llama Llama and the Bully Goat』는 미국에서만 100만 부 이상 팔렸다는 생활동화 「Llama Llama」 시리즈 중 한 권입니다. 이 시리즈는 처음 기관생활을 시작하는 아이의 감정과 상황들을 진솔하게 그리고 있어서, 영미권에서 ‘학교 준비용’으로 많이 본다고 하더라고요. 아닌 게 아니라 꽃봉이도 이 책을 캐나다 학교 준비용으로 읽었습니다.
줄거리는 라마라마가 자기와 친구들을 괴롭히는 아이에게 어떻게 대처하는가인데요, 미술시간, 운동장 풍경 등 학교 여기저기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보여주다 보니 학교생활과 관련한 표현들이 골고루 나옵니다. 이 책만 이해해도 학교 가서 선생님 지시사항은 어지간히 따라 하겠더라고요.
clap(손뼉치다), draw(그리다), 이런 단어부터 roll a pancake, calling names is not OK, 이런 표현들이 나옵니다. 미술시간에 흔히 쓰는 말인 roll a pancake은 점토를 밀대로 밀어서 팬케이크처럼 넓게 펴라는 뜻입니다. call name은 이름을 부르는 것이지만, call names는 욕을 한다는 뜻이래요. 현지에서는 흔히 쓰는 표현이라는데, 저는 나이 마흔 넘도록 처음 들어봤거든요. 도대체 제가 10년 넘게 했던 영어 공부는 무엇이었을까요.
Calling names is not OK. (욕을 하지 마세요.)
Being mean is not allowed. (심술궂게 행동하지 마세요.)
He gets sand on Llama’s shirt. (그가 라마의 셔츠에 모래를 묻혔어요.)
get sand on. 아이들이 놀다가 옷에 모래를 뿌리는 것도 흔히 일어나는 사건이지만, 그 사건을 말로 하려고 하면 잘 생각나지 않는 표현이죠.
영어 앞에서 엄마가 먼저 용감해져라
꽃봉이가 캐나다 학교에 가기 전, 학교생활이 잘 나와 있는 책도 읽혔지만, 급한 대로 “화장실 가도 되나요?”, “오늘 숙제가 뭔지 알림장에 좀 써주세요.” 이런 문장을 스무 개 정도 외우게 해서 보냈는데요, 나중에 보니까 제가 아주 공격적인 말들을 가르쳤더군요. “It’s mine.”(이거 내 거야.) “Don’t tease me.”(놀리지 마.) “I will tell the teacher on you.”(선생님께 이를 거야.)
아이들이 영어 못하는 꽃봉이를 괴롭히면 어떡하나 걱정이 됐거든요. 오죽하면 get sand on이라는 표현을 보고 ‘꽃봉이가 선생님께 일러야 하는 상황’을 떠올리고 급히 외우게 시켰으니까요. 지금 생각하니 좀 민망합니다. 새로운 문화권에 들어가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아이에게 마음을 활짝 열고 친구를 사귀라고 가르치지는 못할망정, 두려움과 경계심부터 가르치다니요. 다행히 꽃봉이가 그런 말을 써야 하는 상황은 없었답니다.
엄마가 영어를 못한다고 아이에게 그림책 읽어주기를 망설이는 경우, 아이에게 미치는 가장 나쁜 영향은 엄마의 형편없는 발음을 아이가 듣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영어에 대한 두려움’을 배우는 것이라고 합니다. 영어 앞에서, 새로운 문화와 세상 앞에서 아이보다 엄마가 먼저 용감해져야 할 때입니다. 아아, 엄마의 길은 멀고도 어렵습니다.
엄마도 모르는 단어를 아이가 알고 있다면
『It’s a Book』에서는 인터넷에 관한 표현들도 만날 수 있습니다.
Do you blog with it? (이걸로 블로그 할 수 있어?)
Can it text? (문자 쓸 수 있어?)
I’ll charge it up when I’m done! (다 쓰면 충전해줄게!)
본문 중에는 lol 같은 인터넷 줄임말도 나옵니다. lol은 laughing out loud(크게 웃고 있는)라는 뜻의 문자 이모티콘입니다. 도서관에서 원숭이가 책을 읽고 있는데 당나귀 친구가 와서 묻습니다.
“네가 갖고 있는 게 뭐야? 그걸로 블로그 해? 와이파이 돼?”
“아니. 이건 책이야.”
원숭이는 책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들어 있다는 걸 알려줍니다. 당나귀는 어느새 책에 빠져듭니다. 원숭이가 책을 돌려달라고 하자, 다 쓰면 충전해줄 테니 걱정 말라고 하죠. 당나귀를 보면 책보다 스마트기기에 더 익숙한 우리 아이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꽃봉이가 책을 보다가 그러더라고요. “엄마. 왜 책이 뭔지도 모르고, 인터넷만 하는 아이가 Jackass(수탕나귀)인지 알아요?” “그러게. 사자도 있고, 토끼도 있고, 고양이도 있는데 왜 하필이면 당나귀일까?” “그건 책이 뭔지 모르면 멍청이이기 때문이에요.” 아하! Jackass는 당나귀란 뜻도 있고, 멍청이란 뜻도 있거든요. 엄마도 모르고 중학생 누나도 모르는 단어를 꽃봉이가 아는 이유는 다시 말씀드리지 않아도 짐작하시죠? 그렇습니다. 그림책에서 본 적 있다네요.
그림책은 최고의 영어 교재다
“최신 교재들은 생생한 영어 표현을 금방 반영해서 가르쳐줘. 그것도 일목요연하게 다 정리해준다고.”
하지만 영어 표현이 내 것이 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스펠링과 뜻만 알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표현이 있는가를 아는 데 그치면 반쪽 지식이죠. 나중에 그 단어를 어딘가에서 만나면 해석은 할 수 있지만, 내가 그 단어를 써서 말하고 글을 쓰기는 어렵습니다. 내가 쓸 수도 있으려면 그 표현을 어떤 경우에 어떤 뉘앙스로 사용하는지 구체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것도 여러 번 반복해서 만나야 하고요. 교재를 여러 번 보기는 어려워도 아이들이 재미있는 그림책은 지겹도록 반복한다는 거, 아시잖아요.
그림책이 영어를 배우기에 최고의 교재가 될 수 있는 이유, 두 가지입니다!
★ 단어와 표현이 어떻게 쓰이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 즐겁게 반복할 수 있다.
당장 캐나다 현지 학교 수업을 들어야 하는 꽃봉이에게 단어 플래시카드라도 만들어서 달달달 외우게 해야 할 판에 태평하게 그림책을 읽어준 건요, 아이가 조금이라도 덜 영어 공부 스트레스를 받으라고 나름 엄마가 짜낸 꾀였습니다. 공부가 아니라 ‘재미있는 책’을 읽는 것뿐이라고 생각해주기를, 더불어 아름다운 그림들로 위로받고 스트레스를 풀기를 바라는 꾀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그림책으로 영어를 배우면 가장 큰 장점이 영어를 배우는 스트레스가 적은 것은 물론, 아이가 책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더군요. 모르는 게 있으면 모르는 대로, 두꺼우면 두꺼운 대로 별로 겁내지 않고 일단 읽어나갑니다.
이 책은 재미없어요 = 이 책은 아직 나에겐 어려워요!
원래 영어 그림책 문장들이 꽤 어렵답니다. 엄마들도 영어 그림책 처음 보면 속으로 놀라잖아요. ‘이게 무슨 소리지?’ 싶고요. 레벨별로 단어 난이도 다 조절된 교재와 리더스북만 읽어온 아이들은 그림책을 보면 당황합니다. 분명히 짧은 문장인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거든요. 영어 실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문법 지식과 외우고 있는 단어량은 대개 ‘단계별 학습’을 해온 아이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하지만 단어는 다 아는데 문장이 무슨 뜻인지는 모른다고 할까요? 우리말로 치면 “차갑게 몸이 식어갔다”를 읽을 줄도 알고, 핵심 키워드 “차갑다”의 뜻도 알지만 이 문장이 ‘죽었다’는 뜻인 줄은 모르는 거예요.
각각의 문장은 이해했는데, 전체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도 흔합니다. 조금만 사건이 생략되고 감정이 비유적으로 표현되면, 그만 아이가 포기해버립니다. “이 책 어려워.” 아니, 아이들은 이렇게 더 많이 말하더라고요. “이 책 재미없어!”
리더스북, 챕터북은 잘 읽는데 어쩐지 소설로는 못 넘어가는 아이들도 있죠. 사람들은 “영어도 결국은 국어 문제야!”라고 흔히 이야기합니다. 맞습니다. 영어도 결국 이해력과 사고력, 문장을 이해하는 능력Literacy의 문제이기 때문에 영어를 잘하려면 국어 실력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저도 아이의 영어가 어쩐지 벽에 부딪혔다 싶을 때 우리말 책을 더 많이 읽게 하고 배경 지식을 늘렸더니 영어가 스르륵 따라 올라가는 경험을 종종 했답니다.
영어로 사고하는 능력은 어떻게 자랄까?
하지만 영어는 영어잖아요. 영어적인 독해력과 이해력은 여전히 필요합니다. 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영어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영어는 영어로 사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 그 능력은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요? 뜻밖에도, 혹은 당연하게도 영어 그림책이 답입니다. 그림책을 읽으면서 새로운 어휘와 문장의 흐름을 이해하는 힘, 사건과 아이디어의 전체를 이해하는 능력이 길러지거든요.
그림책을 많이 읽은 아이들은 모르는 단어가 있어도 용케 내용의 흐름을 따라갑니다. 그림과 문장을 함께 파악하고, 행간의 의미를 찾는 사고력과 추론능력, 우리끼리 하는 말로 ‘감’이 생기니까요!
그림책은 단순히 짧은 문장과 그림이 같이 있는 책이 아닙니다. 한 장, 한 장의 그림과 신중하게 고른 문장들이 모여 하나의 ‘아이디어’, ‘주제’, ‘철학’을 표현하는 예술 작품입니다.
단순히 그림책은 그림으로 힌트를 주기 때문에 단어를 익히기 쉽고, 재미있어서 아이가 덜 지루해하니까 영어 그림책으로 영어를 배워야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말 그림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림책으로 아이의 이성과 감성, 사고력과 이해력이 동시에 자라기 때문에 그림책이 답인 거죠.
영어가 느는 만큼 아이의 생각도 자라고 있을까?
점 이야기 하나 보실래요? 『One』입니다. 조용한 성격의 Blue는 혼자 있을 땐 즐겁다가도 Red가 나타나 “Red is hot. Blue is not.”(Red는 멋져. 하지만 Blue는 별로야.)이라고 하면, 자기가 blue인 게 싫어집니다. 다른 색깔 친구들은 “파랑도 괜찮은 색깔이야.” 하며 Blue를 위로하긴 하지만 Red 앞에선 아무 말도 못해요. 다들 Red가 무섭거든요. 점점 Red는 기고만장해집니다.
Red picked on all the colors. (Red는 모두를 괴롭혔습니다.)
그때 나타난 One! 화살처럼 당당한 1이 Red에게 당당하게 외쳐요.
“NO!” (하지 마! 싫어!)
One을 보고 다른 색깔 친구들도 하나씩 숫자로 변신합니다. 이제 누가 자기를 괴롭히면 당당하게 1처럼 맞서겠대요. Red는 늘 하듯이 아직 숫자로 변신하지 않은 Blue를 괴롭힙니다.
“Red is hot. Blue is not.” (Red는 멋져. Blue는 아니야.)
짜식. 놀릴 때도 라임을 맞추는군요. hot, not.
더 이상 못 참겠다! Blue가 당당하게 6으로 변신합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살짝 충격을 받았답니다. 저는 Blue가 용기도 냈겠다, 친구들도 자기편이겠다, “파랑이 빨강보다 훨씬 더! 백 배 천 배 멋지거든! 넌 바보야.” 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Blue가 이러는 겁니다.
“Red can be really HOT, but Blue can be super COOL.” (빨강은 진짜 멋져. 그런데 파랑도 정말 끝내줘.)
그 미웠던 상대방을 인정해주네요. 이렇게 우리 둘 다 멋지다고 하니, Red도 마음이 움직이나 봅니다. 이제 Red는 7이 되어 함께 어울린답니다. 아마 Red는 속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Blue가 고마웠을 겁니다.
저는 처음엔 One이 주인공 같고, 제일 멋지다고 생각했는데요, 볼수록 Blue가 좋아 보이더라고요. 나중에 이들 중에 리더가 생긴다면 One이 아니라, Blue일 것 같아요. 다스리는 리더십보다 포용하는 리더십이 더 강한 법이니까요. 무엇보다, 상처 없이 아름다운 영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한 번도 아프지 않은 사람보다 아픔을 견뎌낸 사람이 더 아름답고, 다른 이들을 더 감동시키니까요.
영어 그림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 무엇보다도 이렇게 생각하는 힘이 길러지고, 마음이 커지기 때문이죠.
어떻게 영어를 배우든, 공부 시간이 쌓이면 영어 실력은 늡니다. 느는 속도의 차이, 영어 실력이 느는 동안 얼마나 즐겁게 공부할 수 있나 그런 차이는 있지만, 늘긴 늡니다. 그런데 문제는요, 영어가 느는 만큼 그 영어로 표현할 생각과 콘텐츠도 함께 자라고 있나요? 이제 우리가 준비해야 할 부분은 영어 성적이 아니라, 그 영어의 틀에 담아낼 내용이랍니다.
비주얼 소통의 시대에도 그림책이 딱!
그림책이 좋은 이유는 문자 언어뿐만 아니라 시각 언어 능력도 함께 자라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중요 정보들이 대부분 문자 언어로 전달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아이들이 접하는 정보 대부분이 시각 정보입니다. 감정도 이모티콘으로 표현하고, 자신의 주장도 동영상과 PPT나 사진 등의 시각 자료로 만들어 전달합니다. 시각 정보를 만들 줄도 알아야 하고, 이해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와는 다른, 새로운 언어 능력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그림책은 시각적 문해력Visual Literacy을 길러주는 훌륭한 교재가 됩니다. 시각적 문해력이 별건가요? 그림 정보를 빨리, 제대로 이해하는 능력이죠.
이 책 한번 보실래요? 『Dot』에는 여러 점들이 나옵니다. 점 하나에 이름 하나입니다. 책을 펼치면 맨 먼저 빨간 점과 초록 점이 나오는데요, 그럼 이름이 Red dot, Green dot일 것 같은데, Stop dot, Go dot이네요? 그렇습니다. 이 점들은 신호등이군요! 검고 선명한 점은 Heavy dot(무거운 점)인데, 비눗방울처럼 얇고 투명한 점은 Light dot(가벼운 점)입니다. 빨간 핏방울이 하나 있는 점은 Hurt dot(상처 입은 점)이고요. 치료받은 점, Heal dot은? 핏방울 있던 자리에 밴드를 붙였네요.
누군가 베어 먹은 자국이 있는 점에는 “This dot is yummy.”(이 점은 맛있어요.)인데, 옆 페이지엔 “This dot tastes bad.”(이 점은 맛이 없어요.)입니다. 오호라! 한 입 베어 물었다가, 옆에 뱉어놓았네요. 맛이 딱 느껴지지 않으세요? 그림으로 맛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합니다. 그것도 이렇게 단순한 그림으로요.
이런 것들이 모두 시각적 문해력의 첫 발자국이 되는 거죠. 이렇게 시각 정보의 소통 방법에 능숙해진 아이들이 어떻게 자신의 세계를 표현하고 이해할지 흥미진진 기대를 해봅니다.
언젠가 친구와 가벼운 입씨름을 한 적이 있습니다. 술래잡기에서 술래가 다른 아이를 잡을 때, 저희 동네에선 “쨍!”이라고 했는데 친구네 동네에선 “땡!”이라고 했다는 거예요. 어떤 것이 표준말인가 다른 친구들에게도 물어봤지만 끝내 합의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영어권에선 다행히 동네마다 다르지 않고 “Tag!”로 똑같다네요. tag가 ‘꼬리표’, ‘술래잡기 놀이’ 자체를 뜻하는 명사이기도 하고, ‘술래가 잡는다’는 동사이기도 합니다. 술래는 영어로 그냥 it입니다. 이런 단어는 아이들 세계에선 꼭 필요한 ‘전문용어’죠.
그럼 혹시 팔로 땅을 짚고 옆으로 빙글빙글 도는 재주넘기는 뭐라고 하는지 아시나요? cartwheel이라고 한답니다. 수레바퀴처럼 빙글빙글 돌아가서 그런 이름이 붙었나 봅니다. 재주넘기를 잘한다고 아예 카트휠이 별명인 주인공이 나오는 이야기를 볼까요?
언어라는 담요를 열심히 짓고 있는 아이들
『My Two Blankets』입니다. 책의 겉표지 아래쪽에 작은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Moving is hard-friends make it easier. (이사는 힘든 일이지만, 친구가 있으면 훨씬 쉽다.)
카트휠Cartwheel은 전쟁 때문에 새로운 나라로 이민을 옵니다. 카트휠이 별명인 걸 보면 어지간히 말괄량이 소녀인가 본데, 낯선 나라에선 “I felt like I wasn’t me anymore”(내가 나 같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낯섭니다. 사람도 낯설고, 나무도 동물도 낯설고, 심지어 바람마저도 낯설게 느껴집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 말들을 듣고 있노라면, 차가운 폭포 아래 홀로 외로이 서 있는 기분이 듭니다.(페이지마다 고작 두세 줄 있는 짧은 그림책에 이런 표현들이 가득하답니다!)
집에서 고향의 말, 내 언어를 쓰면 꼭 따뜻한 담요에 싸여 있는 것 같아요. 어떨 땐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영원히 이 ‘담요’ 안에 머물고만 싶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원에서 나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웃어주는 소녀를 만납니다. 하지만 그 아이가 말을 하면, 또다시 차가운 폭포 아래로 들어가는 기분이 되죠.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 낯섦, 외로움. 그래도 그 소녀는 계속 웃어줍니다. 두 아이는 친구가 되고, 만날 때마다 그 소녀는 카트휠에게 영어를 가르쳐줍니다. 하나하나 아는 단어가 늘어날 때마다 아이는 새로운 담요를 만드는 심정입니다.
이 책은 색깔로 감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인공 아이와 아이의 고향은 붉은색이고, 새로운 나라는 푸른 색조로 그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카트휠이 새로운 담요, 즉 새로운 언어의 폭을 넓혀갈 때마다 두 세계가 조금씩 섞이네요. 책의 앞부분, 아이가 새로운 언어를 잘 모를 때는 차가운 회색과 푸른 색조로 뒤덮여 있던 공원이 언어를 익히고 친구가 생길수록 따뜻한 파스텔 색조로 바뀌거든요.
영어권 문화를 익힌다는 것의 진짜 의미
저는 두 세상의 색깔이 아름답게 어우러지는 마지막 장면에서 콧등이 찡했습니다. 이렇게 두 세상을 이루는 색깔마저 다르게 보일 만큼, 언어가 통하지 않을 때 느껴지는 거리감, 절망감이 단순히 작가의 예술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는 걸 경험해봤거든요.
캐나다에서 무슨 말인지 하나도 들리지 않을 때, 하늘은 차가운 파랑이었고 나무는 침울한 청록이었습니다. 나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바보 천치만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어가 좀 잘 들린 날은 하늘이 맑았고 단풍은 더 아름다웠죠. 저는 자신감에 넘쳤고요.
영어 그림책을 많이 보면 현지인들이 쓰는 표현뿐만 아니라, 영어권의 문화를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습니다. 단순히 할로윈이나 땡스기빙데이가 뭐 하는 날인지, 어떤 집에서 사는지 알게 된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