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경기도 가평에서 태어나 서라벌예대와 경희대를 졸업하였다. 196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나 십 년 동안 침묵을 지키며 작품 활동을 일절 하지 않았다. 1975년 『칼날』을 발표함으로써 새로 작가 생활을 시작한 그는 「뫼비우스의 띠」로부터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에필로그」에 이르기까지, 고통받는 소외계층 일가를 주인 공으로 한 '난장이 연작'을 1978년 열두 편으로 마무리 지었다. 현실과 미학의 뛰어난 결합으로 평가된 이 연작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으로 묶여 간행되었으며, 작가는 그 뒤 『시간여행』과 『침묵의 뿌리』를 출간하였다. 2022년 12월 25일 타계하였다.
<난쏘공> 구매 시
P. 12
혁명이 필요할 때 우리는 혁명을 겪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자라지 못하고 있다. 제삼세계의 많은 나라가 경험한 그대로, 우리 땅에서도 혁명은 구체제의 작은 후퇴, 그리고 조그마한 개선들에 의해 저지되었다.
우리는 그것의 목격자이다.
―「작가의 말」
P. 24
“아파트 입주 능력이 없어서 팔아 버린 것 아냐? 그런데 이제 와서 무슨 이야길 하는 거야?”
P. 40
그는 증오하는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P. 41
그는 직장에서, 지하도 속에서, 무심히 지나치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그리고 숱한 배기가스 속에서 쫓기며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자신을 느낀다고 말했었다.
P. 47
아들은 아버지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았다.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생각 때문에 고통을 받을 것이다. 너무나 바르고 너무나 옳은 그 생각들은 아들을 또 얼마나 괴롭힐 것인가?
P. 63
달걀 생산을 늘리기 위해 사육사들이 조명장치를 해놓은 사진을 어디에선가 보았다. 닭장 속의 닭들이 겪는 끔찍한 시련을 난장이도, 저도, 함께 겪고 있다고 생각했다.
P. 64-65
“아저씨.”
신애는 낮게 말했다.
“저희들도 난장이랍니다. 서로 몰라서 그렇지, 우리는 한편이에요.”
P. 76
그는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너무나 끔찍하다고 했다. 그의 책에 의하면 지상에서는 시간을 터무니없이 낭비하고, 약속과 맹세는 깨어지고, 기도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눈물도 보람 없이 흘려야 하고, 마음은 억눌리고 희망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제일 끔찍한 일은 갖고 있는 생각 때문에 고통을 받는 일이다.
P. 93
사람들은 아버지를 난장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옳게 보았다. 아버지는 난장이였다.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아버지를 보는 것 하나만 옳았다. 그 밖의 것들은 하나도 옳지 않았다.
P. 93
우리의 생활은 전쟁과 같았다. 우리는 그 전쟁에서 날마다 지기만 했다.
P. 100
아버지는 그동안 충분히 일했다. 고생도 충분히 했다. 아버지만 고생을 한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아버지, 아버지의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할아버지 -또- 대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P. 104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계획이 아니었다. (...)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의 고통을 알아주고 그 고통을 함께 져 줄 사람이었다.
P. 107
“사이다, 포도, 라면, 빵, 사과, 계란, 고기, 쌀밥, 김.” 명희는 나의 손가락 하나를 마저 짚지 못했다.
P. 107
아버지의 신장은 백십칠 센티미터, 체중은 삼십이 킬로그램이었다. 사람들은 이 신체적 결함이 주는 선입관에 사로잡혀 아버지가 늙는 것을 몰랐다.
P. 111
우리는 무슨 일이 있든 공부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공부를 하지 않고는 우리 구역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세상은 공부를 한 자와 못 한 자로 너무나 엄격하게 나누어져 있었다.
P. 117
“사람들은 사랑이 없는 욕망만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 한 사람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릴 줄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만 사는 땅은 죽은 땅입니다.”
P. 121
“우리는 우리가 받아야 할 최소한도의 대우를 위해 싸워야 해. 싸움은 언제나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이 부딪쳐 일어나는 거야. 우리가 어느 쪽인가 생각해 봐.”
P. 125
“폭력이란 무엇인가? 총탄이나 경찰 곤봉이나 주먹만이 폭력이 아니다. 우리의 도시 한 귀퉁이에서 젖먹이 아이들이 굶주리는 것을 내버려 두는 것도 폭력이다.”
P. 126
“뭘 하겠다는 게 아냐.”
형이 말했다.
“나는 책을 통해 나 자신을 알아보는 거야.”
P. 127
한결같이 영양이 나쁜 얼굴들이었다. 거기서는 눈물 냄새가 났다. 나는 눈물 냄새를 가슴으로 맡았다.
P. 131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식들이 전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첫 번째 싸움에서 져 버렸다.
P. 139
우리의 밥상에 우리 선조들 대부터 묶어 흘려보낸 시간들이 올라앉았다. 그것을 잡아 칼날로 눌렀다면 피와 눈물, 그리고 힘없는 웃음소리와 밭은기침 소리가 그 마디마디에서 흘러 떨어졌을 것이다.
P. 190
우리나라에서 십대 노동자에 대해 죄스러운 마음 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P. 191
난장이 아저씨의 아들딸과 그 어린 동료들이 겪는 일을 보고 느낀 것이 있습니다. 197X년, 한국은 죄인들로 가득 찼다는 것입니다. 죄인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P. 231
아버지의 시대가 아버지를 고문했다. 난장이 아버지는 경제적 고문을 이겨내지 못했다.
P. 241
어머니의 가계부는 이런 내역들로 꽉 찼다.나는 은강에서의 생존비를 생각했다. 생활비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생존비였다.
P. 245
아버지는 열심히 일했다. 열심히 일하고도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잃었다. 그래서 말년의 아버지는 자기 시대에 대해 앙심을 품고 있었다.
P. 246
아버지가 꿈꾼 세상에서 강요되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으로 일하고 사랑으로 자식을 키운다. 사랑으로 비를 내리게 하고, 사랑으로 평형을 이루고, 사랑으로 바람을 불러 작은 미나리아재비꽃 줄기에까지 머물게 한다.
P. 251
은강 노동자들이 똑같은 생활을 했다. 좋지 못한 음식을 먹고, 좋지 못한 옷을 입고, 건강하지 못한 몸으로 오염된 환경, 더러운 동네, 더러운 집에서 살았다.
P. 253
나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사랑 때문에 괴로워했다. 우리는 사랑이 없는 세계에서 살았다.
P. 268
“아버지가 그린 세상에서는 지나친 부의 축적을 사랑의 상실로 공인하고, 사랑을 갖지 않은 사람 집에 내리는 햇빛을 가려 버리고 바람도 막아 버리고, 전깃줄도 잘라 버리고, 수도선도 끊어 버린다. 그 세상 사람들은 사랑으로 일하고, 사랑으로 자식을 키운다. 비도 사랑으로 내리게 하고, 사랑으로 평형을 이루고, 사랑으로 바람을 불러 작은 미나리아재비꽃 줄기에까지 머물게 한다. 아버지는 사랑을 갖지 않은 사람을 벌하기 위해 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믿었다. 나는 그것이 못마땅했었다. 그러나 그날 밤 나는 나의 생각을 수정하기로 했다. 아버지가 옳았다. 모두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다. 예외란 있을 수 없었다. 은강에서는 신도 예외가 아니었다.”
P. 278
“나는 여러분과 여러분의 동료들이 열심히 부를 생산하는 것을 보아 왔습니다”라고 목사는 말했다. “그러나 부를 생산하고도 그것을 제대로 나누어 받는 사람은 아직 한 사람도 못 보았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P. 290
시퍼런 칼을 맞아 살이 찢겨 파이고 칼자리에서는 피가 흐르는데 그 상처에 소금을 뿌려 넣는 무엇의 정체를 나는 알 수 없었다. 행복동 시절을 생각하면 언제나 슬픔이 앞섰다. 난장이네 큰아들로 태어나 자란 나는 정말 불행하게도 무엇을 선택할 기회를 한번도 가져본 적이 없다.
P. 307
나는 일 분 가량 잠수해 있었다. 풀 밑바닥 모퉁이에 몸을 오그리고 앉아 느끼는 일 분 동안의 숨막힘, 일 분 동안의 거짓 절망이, 나중에 잃게 될 내 세계와 지금 멀어져 버리는 괴로움으로 변해 나를 죄어 왔다.
P. 333
이런 억압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은 있을 수 없으며,그 억압을 정면으로 받는 중심에 있는 사람으로서 자기의 저항권 행사를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보든가 생존을 포기한 자일 것이라고 말했다.
P. 337
하루하루 열심히 혁명을 준비하며, 그러나 오늘도 오지 않은 그 혁명을 지치지도 않고 기다리는 자들과 나는 거리를 두고 앉아 조용히 들었다.
P. 334-335
앙상한 뼈와 가시에 두 눈과 가슴지느러미만 단 큰가시고기들이었다. 수백수천 마리의 큰가시고기들이 뼈와 가시 소리를 내며 와 내 그물에 걸렸다. 나는 무서웠다. 밖으로 나와 그물을 걷어 올렸다. 큰가시고기들이 수없이 걸려 올라왔다. 그것들이 그물코에서 빠져나와 수천수만 줄기의 인광을 뿜어내며 나에게 뛰어올랐다.
P. 335
사람들의 사랑이 나를 슬프게 했다.
P. 350
우리는 너무 바쁘기만 했다. 그동안 바빴던 것은 과연 우리의 가치를 위해서였을까? 짧은 시간이지만 생각을 해보자.
P. 364
지구에 살든, 혹성에 살든, 우리의 정신은 언제나 자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