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은영 세 번째 시집. 2011년 현대문학상 수상작인 '그 머나먼' 외 5편('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훔쳐가는 노래' '망각은 없다' '아름답게 시작되는 시' '오래된 이야기')을 비롯, 현실세계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 속에 사회학적 상상력과 시적 정치성이 어우러진 새로운 감각의 세계를 선보인다.
서른살 무렵,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 카프카가 죽은 나이까지는 살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런데 하느님은 내 소원을 잘못 알아들으신 것 같다. 카프카가 쓴 것처럼 쓸 수 있을 때까지 살게 해달라는 이야기로. 그리하여 나는 그 누구보다 오래 살고, 어쩌면 영원히 살게 될지도 모른다. 이 불미스러운 장수와 질 나쁜 불멸에 나는 곧 무감해질 테지. 문학은 나에게 친구와 연인과 동지 몇몇을 훔쳐다주었고 이내 빼앗아버렸다. 훔쳐온 물건으로 베푸는 향응이란 본래 그런 것이지, 지혜로운 스승은 말씀하실 테지만 나는 듣는 둥 마는 둥. 소중한 것을 전부 팔아서 하찮은 것을 마련하는 어리석은 습관을 여전히 버리지 못했다.
2012년 8월
나는 너의 슬픔을 몽땅 훔쳐가는 노래가 되고 싶었네.
심보선 시인의 추천사를 참고하여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쨍한 색의 선분이 표지를 지나 책의 안쪽까지 펼쳐지는 것을 상상해서 본문의 종이도 아주 환한 분홍색으로 된 책을 상상했지만, 읽을 수 있는 시가 되어야 하므로 면지까지만 분홍으로 했습니다.
이 책을 주머니 안에 넣을 수는 없겠지만, 주머니 안의 돌처럼 어딘가에서 조용하고 환하게 자리하길 바라며 디자인했습니다.
디자이너 박정민
변두리의 흰 달 떠오르는 시간에 너의 겨드랑이 팔 손목 곡선의 부드러움<아케이드> 부분
첫 시집의 변치 않는 한 줄을 마지막 시집에 넣어야 할 것 같다 청춘은 글쎄…… 가버린 것 같다<이 모든 것> 부분
아름다운 세탁소를 보여드립니다 잔뜩 걸린 옷들 사이로 얼굴 파묻고 들어가면 신비의 아무 표정도 안 보이는 내 옷도 아니고 당신 옷도 아닌 이 고백들 어디에 걸치고 나갈 수도 없어 이곳에만 드높이 걸려있을, 보여드립니다 위생학의 대가인 당신들이 손을 뻗어 사랑하는 나의 이 천부적인 더러움을<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부분
지금 주머니에 있는 걸 다 줘 그러면
사랑해 주지, 가난한 아가씨야 <훔쳐가는 노래> 부분
나의 과거가 나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흰 물개처럼 온순해질 수 있다면<후크> 부분
너도 아는지? 우리가 알고 있는 거리, 거리들로 공기가 수만개의 투명 유리종처럼 부서지고 있어<자스민> 부분
홍대 앞보다 마레 지구가 좋았다 내 동생 희영이보다 앨리스가 좋았다 철수보다 폴이 좋았다 국어사전보다 세계대백과가 좋다 아가씨들의 향수보다 당나라 벼루에 갈린 먹 냄새가 좋다
과학자의 천왕성보다 시인들의 달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