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흔히 인생관이란 말들을 많이 쓴다. 공부를 많이 했다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물으면 도리어 엉뚱한 소리만 한다. 나름대로 인생관에 대해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다가 ‘당신이 과거 생에 어느 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다가 왔는지 그걸 말해 보라’ 하면 갑자기 벙어리가 된다.
그게 원숭이가 남 흉내 잘 내는 것과 뭐가 다른가. 인생관이란 인생 문제에 확연한 것을 일음인데 그게 학식이나 재주로 알아지겠는가? 그래서 성인의 가르침이 필요한 거다.
우리가 흔히 자동차에 비유해서 말해보면 자동차는 그것을 운전할 수 있는 운전수가 있어야 비로소 자동차로서의 쓸모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 몸을 자동차라 할 때 그것을 운전하는 운전수는 무엇인가?
도대체 어떤 존재가 있어 이 몸을 이끌고 다니는가. 그것을 말해보라하면 다들 모른다고 한다. 사실 모르는 게 당연하다.
우리의 몸뚱이는 죽은 송장과 똑같은 것이다. 그렇지만 송장은 보고 듣고 말하지 못하는데 우리 몸은 보고 듣고 말한다. 보고 듣고 말하는 그 놈이 우리 몸을 이끌고 다니는 운전수지만 그것에는 일체의 이름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나무, 돌 등의 무정물(無情物)과는 똑같지 않다. 그것이 바로 불문(佛門)의 8만 대장경의 글자이며 최고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가! 모르겠거든 그것을 의심해 보라. 그게 바로 공부하는 법이다. 그 의심을 꾸준히 갖고 있다가 의심이 자꾸 커지면 마침내 그것이 터득되어 물리(物理)가 터지게 되는데 그런 사람은 어떤 분야에서든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내가 만난 사람 중에 유일하게 다지음 한글구성성명학회의 예지연회장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제일 먼저 나눈 대화가 나의 속명(俗名)과 법명(法名)에 대한 이름풀이였다. 막상 듣고 나니 십년 묵은 체중이 싹 내려앉듯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청년 시절부터 수십 년간 명산을 유주하며, 주역, 사주명리, 자미두수, 기문둔갑, 기공수련 그리고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49일간 단식 등 고행을 통해 얻어진 것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상담해 오면서 무언가 부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무엇으로도 다시 말해 불교의 경전으로도 그들의 당면한 과제들을 해소시켜줄 수 없었던 점이었다. 세상풍파에 찌들어 신음과 고통의 한(恨)이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의 그 마음을 어떤 경전으로 풀어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늘 뭔가 개운치 않아 답답하고 안타까웠던 차에 그때 구성성명학과의 만남은 내게 큰 행운임과 동시에, 비로소 대승불교라는 대 명제 앞에 중생을 교화하는 하화중생(下化衆生)의 가르침을 바로 실천할 수 있는 시절인연이 도래한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마치 천 년 동안 깜깜했던 깊은 동굴에 갇혀 있던 나의 가여운 영혼에 한줄기 빛이 보이듯 저만치서 밝은 내일이 손짓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무작정 떠나느라 먼 길 여행길에 배고픔과 갈증으로 허기진 나에게 구성성명학은 사막에서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였다.
무엇보다 사람들은 늘 불러주는 이름 속에서 살아간다. 그래서인지 타고난 사주팔자와 더불어 운명에 강력한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성명(姓名)이라 생각한다. 성명의 뜻을 고취해 보면 저녁 석(夕)자에 입 구(口)자다. 이는 저녁이 되면 앞이 보이지 않아 입(소리)을 통해 자신의 뜻을 상대에게 나타내는 파동 즉 구성성명학의 진위다.
이러한 구성성명학의 우수성을 불자들과 일부 사람들만이 독점하기엔 그 원리적 우수성이 너무나 탁월하여 더 많은 국민이, 나아가 세계인이 함께할만한 가치로 보았고 이에 진중한 걸음으로 책을 출간하게 되었다.
실은 내게 있어 도(道)보다는 글 쓰는 일이 더 어렵기 때문에 결코 욕심을 내지 않으리라 다짐해 보면서도, 사자(獅子)의 울부짖음에 모든 짐승이 두려워 굴복(屈服)하는 부처의 위엄 있는 설법(說法)처럼 글의 힘을 알기에 감히 사자후처럼 인간의 운명에 이름이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거침없이 토해낼 생각이다.
끝으로 이 책이 나오기까지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신 예지연회장님과 (주)다지음의 전국 150여 가맹지사장 모든 분들께 한 식구로서 이 글을 통해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강릉 경포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