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1월 22일 조용한 농촌마을 전라북도 김제시 청하면 대신마을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제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집안에 아들만 셋이었기 때문에 어른들은 제가 딸로 태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여자 이름인 문영주로지어놓았다고합니다.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 마을 인근에 위치한 청하초등학교, 청하중학교를 졸업을 하였으나 가정형편이 너무 어려워 인문계 고등학교는 진학할 수 없었습니다. 부모님의 권유로 이리공업고등학교 전기과 야간학교에 입학하여 낮에는 돈을 벌어 집안 살림에 보태며 학업을 마쳤습니다. 고등학교의 선택처럼 제가 처한 여건에 따라 진로를 고민하면서 늘 생계를 위해 고군분투하였습니다. 군위탁 장학을 지원하여 고등학교 졸업 후 육군부사관학교에 입대하게 된 것도 같은 맥락이었습니다.
자동차와의 인연은 운명이었던 것 같습니다. 육군부사관학교 입대 당시, 처음 주특기와는 다른 차량정비로 변경되어 수송부 선임하사로 임명되어 6년 1개월의 군생활을 마쳤기 때문입니다.
박봉이었지만 직업군인의 급여를 저축하여 제대할 즈음에는 1천만 원의 목돈으로 전세방을 얻어 어머님을 모시게 된 것이 얼마나 큰 보람이었는지요…….
고등학교 졸업이라는 학력으로 제가 선택했던 사회생활의 시작은 1987년 4월 7일 경기도 광명시에 위치한 기아자동차의 생산직사원으로였습니다. 주야간 2교대 근무를 하는 자동차제조 생산라인 품질부서에 근무하면서 가정도 꾸려 ‘아빠’도 되었습니다.
생활은 안정이 되는 듯했지만, 저는 뭔가 다른 모습을 꿈꾸기 시작하였습니다. 92년 관리직 시험을 치른 후 신분을 변경하여 화성공장에서 근무하며 미국, 일본 등 해외출장을 다니고 자동차기능사검사1급 자격증을 소지하여 대관청 업무도 맡았습니다. 95년에는 국내영업본부 관리업무를 지원하여 고향인 전북 김제지점 업무과장으로 발령받아 영업본부의 근무도 시작했습니다.
영업지점에서 영업사원을 교육시키는 업무를 수행하면서 내성적인 성격은 가장 큰 과제이었습니다. 무조건 최대한 많은 사람을 만나고 사귀자는 목표를 갖고 익산시 봉사단체인 청운라이온스클럽 창단 멤버로 활동하고, 아이의 아빠로서 익산부천초등학교 학부모 회장을 6년동안 맡기도 하였습니다.
첫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룰 즈음, 기아자동차가 부도나 봉급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생활이 어려워지고 설상가상으로 회사는 구조조정에 돌입하게 됩니다. 어려운 회사사정으로 자동차판매영업 부서에 3개월 동안 파견되어 처음으로 자동차 판매를 해야 했습니다. 방법을 몰랐습니다. 그저 진심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결과 전국 일반직 자동차 판매왕 2위를 달성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현대자동차가 기아자동차를 인수하면서 저의 직장도 안정이 되는 듯했습니다.
많은 사람을 만나는 일은 계속 되었습니다. 이리영등중학교 운영위원장, 이리시민연대에 집행위원으로 시민운동가로도 활동,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총동문 및 동창회 활동과 사무국장 및 총무 역임, 익산경찰서 소속의 익산지역 경우회 자문위원, 전라북도 럭비협회에서 이사위원, 이리신광교회 호산나 및 쉐마찬양대 부대장, 스랍중창단의 단원, 2011년에는 중국 연길로 찬양선교도 수행했습니다.
직장에서는 사내강사 과정을 이수하고 현재까지 기아자동차에서 강사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2007년부터 3년 동안은 본사에서 전임교수로 활동하며 사이버교육, 자동차 상품교육, 자동차 정비교육 등 많은 강의를 하였고 명강사로도 인정을 받았습니다. 98년부터는 기아자동차 사내 진급시험 출제위원으로 뽑혀 현재까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 살아오면서 일상생활 속에서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을 글로 엮어 2009년에는 에세이시집인 『넝쿨이 강까지』도 출간하였습니다.
저는 가진 능력이 작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많은 분들이 저에게 큰 기대를 해주십니다. 그러니 저는 잠을 줄여가며 노력하는 것밖에는 달리 방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2012년 현재는 기아자동차의 영업지점에서 10년 이상 근무하며 유능한 지점장이 되고자 오늘도 팀원들과 노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