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제1회 나손학술상(1991)을 수상하고 단국대 조교수(1992)에 임용됐다.
「조선 전기 연희시에 나타난 문학사조상의 특징」, 『한국의 방외인문학』(집문당, 1999)의 집필 이래로 단국대 나손문고에서 벽동병객의 <기완별록>을 발굴하여 『문헌과해석』(1999)을 통해 학계에 알리고, 관련 후속 논문과 글을 여러 편 썼다. 「연희시가의 전통에서 본 <관우희>」, 『열상고전연구』(2013)에서는 구사회 교수 소장본 『판교초집』의 문헌비평과 수록 작품집 「관우희」의 성격을 논했다. 한국 한문학의 관점에서 고전연극사에 대해 지속적 관심을 지니고 있으며, 『윤리의 서사화―<오륜전비기> 수용 연구』, 『한국우언문학사 1』, 『한국 고전문학의 넘터』 등의 저서가 있다.
한국에서 인문학의 위상은 날이 갈수록 추락하고 있다. ‘문송스럽다’는 말이 유행한다는 소식을 하필 졸업식장에서 들었다. “문과여서 죄송스럽다”는 자조 섞인 한탄의 말이다. 그런데 한국 고전문학 선생 노릇을 삼십 년 가까이해온 나는 뭐라고 해야 할까? 마땅히 ‘문송겹다’라고나 해야 하나? 인문학적 담론을 형성하는 데 한국문학, 고전문학은 또 얼마나 기여를 할까? 민족문학 담론도 점점 힘을 잃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도 의문투성이를 숨기지 못하며 다시 한국 고전문학의 초입에 서 있는 젊은이들을 맞이한다.
지금 세상은 고전이니 민족이니 문학이니 떠드는 시대는 끝난 것처럼 보인다. 왜 고전을 알아야 하는가? 왜 민족을 말해야 하는가? 왜 문학을 해야 하는가? 그것은 근대의 열정과 낭만의 소산이지 않은가? 그러나 아무리 다시 생각해 봐도 자기 집단의 내력이나 고전문학은 알고, 말하고, 전해서 끝내 창조의 원천으로 삼아야 한다. 열정과 낭만의 힘을 빌려서라도. 금시발복하는 대박이 아니더라도 그것은 커다랗게 열리는 세계의 그루터기이자 밑거름임을 믿는다. 주위를 둘러보면 피댓줄에 감긴 듯한 우리네 삶을 잠시라도 멈추고 스스로의 과거를 상상하게 만들고 ‘오래된 미래’를 꿈꾸게 하는 훌륭한 인문서가 적지 않다. 설령 내가 그러한 저술가가 되기에 역량이 모자랄지언정 그 가능성을 젊은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일마저 지레 포기할 수는 없다.
다만 민족을 민족으로만 가두지 말고, 고전을 과거의 것으로 버려두지 말고, 문학을 문학 내적 규칙으로 얽매지 말아야 한다. 우리 겨레에게는 말과 짓의 문학이 있었고, 한문학과 우리글 문학이 있었다. 거기다 오늘날에는 방송, 영화, 뮤지컬, 웹툰 등의 다매체 문학이 유행하면서 ‘한류’라는 문화산업을 일으키고 있다. 공연한 열패감에 주눅이 들거나 허망한 기대감에 들뜨기보다는 ‘문송겨운’ 궁함을 변과 통으로 이끌어 내야 한다. 궁즉변(窮則變)이요, 변즉통(變則通)이다. 동아시아의 전통 지식인들이 궁함을 고집스럽게 지켜냈던 고궁론(固窮論)의 전통이 새삼스럽다.
이 책의 초고를 2001년에 완성해서 국문학과의 고전문학 입문서로 사용해 왔다. 해마다 원고를 조금씩 깁고 다듬어 왔지만, 이제는 캠퍼스 통폐합이니, 구조조정이니, 기초학문 통합의 ‘리버럴아트 칼리지’이니 변화의 바람이 거세진다. 그래도 우리 옛 문학의 문을 두드리는 학생들은 여전히 있을 것이니 오히려 우리 옛문학의 넘터와 삶터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정체성을 분명히 할 필요를 느꼈다. 나 자신은 이를 통해서 인문학적 소통의 장으로 삼고자 하는 열의를 가다듬는다. 교수와 학습의 방식이 예전과 크게 달려졌다 하더라도 시대적 조류가 바뀌었다는 점을 어떻게 수용하고 문명 변화의 거센 물결을 어떻게 타고 넘을 것이냐를 문제의 관건으로 삼는다.
변화의 이면에는 이전에 좀체로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파도가 섞여 있다. 학생들은 강의실에서의 서먹한 분위기와 부족한 시간을 인터넷을 활용하여 극복하려는 적극적 자세를 보여준다. 모든 교과목에 제공되는 이러닝(e-learning)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들의 의견을 제시하며 일방적 지식 전달의 한계를 넘어서면서 상호 소통을 시도한다.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시대를 이겨낼 지혜의 일단을 여기에서 엿볼 수 있어서 무척 기쁘다.
이 책 ??한국 고전문학의 넘터??는 모두 열세 고개로 이루어져 있다. 구비문학이 네 고개, 국문문학이 연행문학 텍스트를 포함하여 여섯 고개, 한문문학이 세 고개이다. 한국을 굳이 강조하지 않더라도 우리 옛문학을 ‘넘터’와 ‘고개’라고 말한 뜻은 이 책 마지막에서 밝혔다. 원래는 조금 많은 고개를 두어 스무고개를 채울 수도 있었지만 한 학기에 맞추어 그처럼 한정했다. 문학지리학, 구비·국문·한문문학의 역동성, 고전과 현대의 관련성, 동아시아 비교문학 등의 자료를 중심으로 ‘고전문학의 삶터’라는 자매판을 꾸며보고도 싶다. 그러나 우선 ‘넘터’에서 지레 겁먹고 산고개를 회피하지 않도록 초심자를 최대한 배려한다는 마음으로 원문을 모두 현대어로 바꾸어 제시하고 필요한 곳마다 상세한 주석을 첨가했다. 아울러 그것들의 의미를 탐색하기 위한 길을 나름 다양하게 안내하고자 했다. 물론 맨 뒤에 배치한 한문학에서는 원문을 함께 두어 그것에다 각주를 달아 참고하게 했다. 이 무슨 모진 깔딱고개냐 하겠지만 이제까지 넘어왔던 다리 힘을 믿고 탄력을 받으면 한문 속에서 우리 문학의 향기를 맛보는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해마다 손질해왔던 원고의 제록스본을 접했던 졸업생들이 새삼 그리워진다. 이 원고로 강의를 들은 적이 있던 김민준은 몇 해 전에 출판사 직장을 구하고 있는 도중에 난해한 부분과 미심쩍은 부분들을 일일이 지적하고 의견을 제시해 주었다. 한편 어떤 해에는 각 고개에 댓글을 달아준 수강자들이 모두 12명이나 되었다. 한 학기 동안에 한 번도 참여하지 않은 학생들도 많지만, 열의를 보인 학생들이 제법 있어서 댓글이 풍성해졌다. 댓글에 대해 나는 강의자로서 댓글을 달았고, 다른 학생들이 또 다른 댓글로써 상호 피드백의 소통 분위기를 돋웠다. 참여한 학생들은 정리 과정에서 여러 필명을 사용했다. 특히 이승제, 강효진, 정만호는 ‘넘터 편집부’를 자처하며 댓글들을 모아서 참여 학생들에게 동의를 구하고 나에게 넘겨주었다. 지나고 보니 고개를 넘기 위한 건강한 쉼터가 마련됐음을 뿌듯하게 여긴다. ‘쉼터’의 이야기판을 꽃피운 이들의 이름과 필명을 밝혀서 정겨운 마음을 기억하기로 한다. 이승제-제로/ 막산이/ 허슬러/ 정어리목소리/고전오타쿠; 정만호-녹차라떼/ 케세라세라; 안서현-현; 지동환-세류아; 강효진-SKYHOSTAR/ 울룰루/ 미미르; 이지은-J; 김서경-서울동경/ 서쪽에서뜨는해; 이다건-보고싶다건네다; 김다희-별솔하람; 윤이화-또치; 안다영-가리C; 김혜민-해가뜨면민들레씨앗. 여기에 올해 댓글 약간을 추려 보탰다. 수민-엄수민, 기막준-김학준, 혜란쌤-이혜란.
2019년 8월 말복을 앞두고
말죽거리 무벌당(无伐堂)에서 윤주필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