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륵 같은 처지의 글
참 오랫동안 글 속에 묻혀 지냈다. 세상에 재미나는 것들은 다 피하고 머리에 쥐가 나는 글에 매달려 살았으니 딱한 세월이었다.
내가 이렇게 글을 가까이 하게 된 것은 가친의 영향이 컸다. 꿈을 펴기 위해 도시에 나가 학업을 이어가던 가친은 건강 문제로 한순간에 낙향하였고, 그 미련을 아들에게 집중하였다. 걸음마를 겨우 뗀 나에게 천자문을 가르치고, 서당에 보내 계몽편, 동몽선습, 명심보감을 익히게 했다. 그것을 밑천으로 하여 나는 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제법 규모가 큰 백일장에 나가 상을 받았다. 그때 심사를 하고 시상을 한 분이 동리, 목월 선생이었다.
용기와 격려를 받은 나는 그 후로 문예부원이 되었고, 백일장 선수가 되었다. 중학교 때도 문예부였고, 고등학교 때도 문예부였다. 대학 진학도 망설이지 않고 글을 쓴다는 국문학과에 들어갔다. 끼리끼리 모여 시화전을 열고 동인지를 만들고 자칭 문청이 되어 어지간히 돌아다녔다.
우선 먹고 살아야 했기에 교직의 길에 들어섰고, 한동안 문단의 변두리에서 어슬렁거리다가 90년대 초에 어떻게 하여 수필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작품 활동에 매진할 겨를도 없이 강단에 불려나가 수필 수업을 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강의를 하다 보니 교재로 쓰기 위해 수필문예지를 만들게 되었고, 문예지를 만들다 보니 사람이 모이고 책들이 쌓여 문학관을 짓는 일에 힘을 빼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지난 이십 수 년 동안은 글 쓰는 작가가 아니라 수필 운동가 같은 생활이었다.
내 삶은 굴곡 없이 그냥저냥 무사 평탄하였다. 지금까지도 ‘군자삼락’을 누리고 있으니 이 얼마나 큰 복인가. 인생길에서 부침이 크지 않았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다행스러운 일이나 글쟁이에게는 웅숭깊은 글이 없다는 핑계가 되기도 한다. 그러기에 내 글은 얕고 가볍다. 유치한 낭만기도 남아 있다. 다만 ‘다른 글과는 다른 형식, 다른 내용으로 재미있게 써 보자’ 하는 노력은 있었던 것 같다.
묵은 글들을 버릴 수가 없기에 이렇게 책으로 엮기는 하였으나 계륵 같은 처지의 글임을 미리 고백해 둔다.
2016년 입동 무렵
도정道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