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도록 여행자.
쓴 책으로『당분간 나는 나와 함께 걷기로 했다』 『여행도 병이고 사랑도 병이다』 『아무도 그립지 않다는 거짓말』 『같은 시간에 우린 어쩌면』 『나조차 나를 사랑하지 못하고』 『함부로 사랑하고 수시로 떠나다』 등이 있다. 지금은 길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유튜브 <모처럼, 여행>에서 여행 중이다.
일부러 길을 잃고 싶은 당신에게
골목에는 햇살이 가득한데 비마저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갑작스러운 비에 몸을 접고 걸음을 멈춘 사람의 어깨에서 모락모락 수증기가 피어났고 그 순간 우리는 간단한 눈인사를 나누었다.
모르는 사람과 나란히 서서 골목의 안을 들여다본다. 나는 마치 약속이 있는 사람처럼 서성이며 풍경을 헤아린다. 급하게 물건을 정리하는 사람, 가벼운 차림으로 나왔다가 머리에 손을 얹고 다시 돌아가는 사람, 나비를 따라다니듯 비를 쫓는 아이들. 얌전하던 골목의 풍경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언젠가 나도 저들처럼 골목에서 인생의 어느 한때를 보낸 적이 있다. 이런 풍경을 뒤적이며 며칠째 나는 골목을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골목은 지루할 틈이 없었다. 기대 없이 만나게 되는 오래된 친구처럼 반가운 마음이 먼저였다. 여행을 떠나 숙소를 구할 때면 편안함이 우선적인 고려 사항이었지만, 아름다운 골목을 끼고 있다면 더없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드넓은 대로 곁의 숙소는 이동하기가 편하다는 것을 제외하면 어쩐지 쇼윈도에서 잠을 청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깊은 꿈을 꿀 수가 없었다. 나는 언제나 낡고 오래된 골목으로 스며들었고 골목 한귀퉁이의 방에서 따뜻하고 살가운 마음으로 더욱 오래 짐을 풀 수가 있었다. 지금도 그 습성은 여전하다. 세상 어디를 가나,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골목을 좋아하는 나의 취향은 바뀌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보금자리를 떠나 처음 만났던 풍경이 골목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삶의 형태가 바뀌면서 골목이 사라졌고 길을 잃고 헤매는 일 또한 없어졌다. 마치 여행이 사라진 것처럼. 나는 내 모든 여행의 시작이 골목에서 비롯되었다고 믿고 있다. 골목은 사람들이 만든 풍경이다. 골목은 저절로 생겨난 것처럼 보이지만 의도적으로 계획한 곳이기도 하다. 골목은 그 길이만큼 이야기가 있는 곳이며 좋은 의도로 만들어진 삶의 길이다. 나는 그 속의 사람들을 여행한다. 그들의 생활을 탐한다. 결국 골목에서는 타인의 생활이 나의 여행이 되며 나의 생활이 또 다른 누군가의 여행이라 된다고 생각한다. 산다는 것과 여행한다는 것은 그리 멀지 않은 일이다.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생겨난 공간 속에 있고 싶었다. 그곳이 골목이었다. 나는 자주 멀리 떠났지만 골목을 걸으며 결국 사람을 떠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상에는 수많은 길들이 그어져 있었고 길보다 아름다운 골목이 있다. 비밀의 통로 같은 페트라의 바위틈 골목이나 달의 계곡으로 이어지는 칠레의 어느 골목처럼 신비한 골목이 있다. 쿠바의 아바나 또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낡은 골목처럼 걸음걸음마다 음악 소리와 춤이 끊이지 않는 행복한 골목들도 있다. 낯선 골목 안에서 본 것들이 뒤늦게야 내 인생에 아름다운 궤적을 내고 있다. 짧거나 좁은 혹은 깊거나 낮은 골목에서 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의 이야기를 들었다.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처럼 걷고 싶었고 일부러라도 그 안에서 길을 잃고 오래오래 돌아가지 못할 마음으로 살고 싶었다.
만약 당신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곳이 광활한 대지가 아니라 조금은 좁고 아주 오래된 낡은 골목이었으면 한다. 나는 당신이 그곳에서 더 영롱하게 빛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당신의 가장 가까이에 펼쳐지게 될 골목에 관한 것이거나, 골목과 멀지 않은 곳에서 만나는 사소한 장소에 관한 것들, 혹은 그 골목과 장소에서 스친 사람들의 마음에 관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한 번쯤 스쳐 지나갔을 곳에서 겪었던 각자의 우연에 관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는 의도적으로 길을 잃고 싶은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다.
골목은 언제나 길보다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