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은 조선의 대표적인 승려이며 시인으로서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에 서명하다가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생활을 한 독립운동가입니다. 특히 그가 감옥에서 쓴 ‘조선 독립의 서’는 조선독립선언의 이유를 밝힌 명문으로 지금까지도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런 한용운이 왜 명나라 때의 『채근담』을 다시 집필하였을까요? 원래 『채근담』은 명나라 만력제 연간의 문인이며 상인 가문 출신이었던 홍자성이 험난한 인생의 여정을 겪고 난 뒤, 후세 사람들에게 삶의 지혜를 일러주기 위해 쓴 책으로써 동서양에 널리 알려진 ‘수신修身’의 기본이며 불멸의 고전입니다.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책은 명나라 때 홍자성이 쓴 것과 청나라 때 홍웅명이 쓴 것이 있으나 일각에서는 두 사람이 똑같은 인물이라는 설이 있지만 분명치 않습니다. ‘채근(採根)’은 ‘나무뿌리’를 가리키고 ‘담(譚)’은 이야기로 풀뿌리를 씹듯이 되씹어 음미해야 할 가르침입니다.
『소학(小學)』에 인용된 송나라 때의 왕신민은 “사람이 항상 나무뿌리를 씹어 먹고 사는 것처럼 인생을 견디면서 살 수 있으면 곧 백 가지의 일도 능히 이룬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곧 사람이 인생의 역경을 이기면 이 세상에서 못할 일은 하나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추측하건대, 한용운도 일제 강점기의 힘든 삶을 사는 조선인들에게 용기와 지혜를 심어주기 위해 당시 조선의 실정에 맞게 새롭게 편역하여 조선의 신문학과 신문화운동에 공헌한 <신문관> 에서 『채근담 정선강의』라는 제목으로 발행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홍자성이 지은 『채근담』을 읽으면서 현대인들이 읽기에는 현실에 맞지 않는 부분들이 많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용운이 쓴 이 책은 문장마다 주옥같은 가르침이 있는 것은 물론, 한 편 한 편마다 향기가 나는 내용들이어서 번역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문장이 한자로 되어 있고 현대적 어법에 맞게 번역한 뒤 간략한 해설을 붙이고 세상의 근본은 ‘공사상’과 ‘마음 작용’에 달려 있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의 그릇’ ‘마음의 거울’ ‘만물의 이치’ ‘공(空)의 이치’ ‘마음의 본체’ ‘평상심이 곧 도(道다)’ 등 총 6부로 나누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학자들을 위한 책이 아니라 독자가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옮겼음을 아울러 일러 드립니다. 인생의 지혜를 가르쳐주는 『한용운 채근담』을 읽고 힘든 세상 속에서 나를 가꾸는 지혜를 증득(證得)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불교의 연기와 공사상은 소중한 진리이다. 우리는 인연에 의해 살아간다. 부모님이 나를 낳아주신 것도 인연이요, 나를 배움의 길로 인도해 주시는 선생님도 인연이요, 친구와 이웃도 인연이다. 연기법은 이러한 인연의 결과물을 가리킨다. 좋은 인연을 만나서 좋은 일이 많이 생기면 좋은 연기가 되고, 나쁜 인연을 만나서 나쁜 일이 생기면 나쁜 연기가 된다. 이렇듯 공사상은 인연과 인연이 만나서 연기에 의해 새로운 것이 생겨나는 창조성을 가리킨다.
또한 연기는 사람에게만 반드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도 어김없이 일어난다. 한 그루의 나무가 자라려면 햇빛과 물과 흙이 필요하다. 만약, 그중에 하나라도 없다면 나무는 말라 죽거나 썩을 것이다. 그렇기에 흙과 물과 햇빛은 나무가 자라기 위한 필요 조건이다. 이렇듯 세상에는 인연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나라는 존재 역시 그렇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연기에 의해 태어난 인연의 산물로서 부모님이라는 공사상에 의해 태어난 위대한 존재이다. 이것이 바로 연기와 공사상의 바른 원리이다.
그런데 문제는 연기와 공사상이 적용되려면 몇 가지의 원리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죽은 건 연기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죽은 감나무가 꽃을 피울 수 없고 죽은 벌이 꿀을 만들 수 없다. 만약, 죽은 감나무가 꽃을 피우고 죽은 벌이 꿀을 만든다면, 그 꿀은 틀림없이 가짜이다.
둘째. 눈으로 확인되지 않는 건 연기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석가모니불과 예수는 이미 수천 년 전에 죽은 성인이다. 그런 이에게 아무리 빌어도 살아 있는 나와는 연기가 일어나지 않으므로 소원을 들어줄 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눈으로 확인되지 않은 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셋째, 똑같은 것끼리만 연기가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생명에게는 그것만이 지니는 고유의 유전자가 있다. 토끼와 사슴이 연기한다고 해서 토끼가 사슴이 되고 사슴이 토끼가 되지 않는다.
이렇듯 연기는 반드시 똑같은 것끼리만 연기가 일어난다. 이것이 바른 연기법이다. 지금 우리는 이러한 연기와 공사상의 바른 원리를 알고도 단지, 많은 사람이 믿고 따르고 있다고 해서 무조건 맹신하는 잘못된 종교관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사람이 죽으면 그 업에 따라서 육도 윤회한다는 삼세 윤회설은 석가모니불의 진정한 가르침이 아닌데도 깊이 빠져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젠 종교도 시절 인연에 따라 변해야 한다. 종교의 참된 목적은 마음의 안식과 행복 추구에 있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는 한 종교는 설 자리가 없다. 이것이 내가 이 책을 집필하는 근본적인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