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뵌 적이 없다. 두 분 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자연스레 친가보다는 외가와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어린 시절의 내가 외가에서 늘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외삼촌들은 모두 고학력에 사회에서 전문직으로 활동하는 분들임에 비해서 이모와 어머니 두 분만 유독 평범한 주부로 사는 것이었다. 또 하나 의아했던 것은 외할머니가 두 분이나 계셨던 점이다. 두 분은 마치 자매처럼 사이좋게 지내고 계셨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큰할머니는 어머니와 외삼촌들을 낳으신 본처였고 작은할머니는 외할아버지의 첩이었다.
미처 문제로 인식하기도 전 어릴 때 경험한 일들이나 철들면서 의아하게 느꼈던 주변의 미묘한 인간사들이 내 안의 일부를 채우기 시작했다. 더구나 개방적인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이 활발함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보상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은 나의 관심을 여성 쪽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오늘날 마주하게 되는 많은 의문들이 보태져 여성을 공부하는 데 토대로 작용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이 땅의 여성들의 삶과 위상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를 해왔다.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으로 수년간 프로젝트를 진행한 결과물인 『한국 근대여성들의 일상문화』(전 9권, 2004)와 『한국 현대여성들의 일상문화』(전 8권, 2005)를 출간한 것은 여성문화 연구자들에게 방대한 자료와 연구방법론을 제공한 뜻깊은 일이었다. 그 이후 『뜻은 하늘에 몸은 땅에―세상에 맞서 살았던 멋진 여성들』도 저술했고, 최근에는 『여성, 역사 속의 주체적인 삶』을 출간했다. 특히 이 책의 독창성은 인문학자의 일관된 시각으로 여성에 관한 다양한 영역을 다룬 여성사라는 점과, 시대를 달리하는 여성들을 ‘주체’라는 하나의 일관된 주제를 가지고 저술했다는 점이다.
이제 학술저서의 한계를 벗어나 누구나 가까이에 두고 읽을 수 있는 책이 필요하다는 인식 아래 한국 여성의 삶과 문화를 아홉 권으로 풀어 쓰고 함께 나누고자 한다. 이 이 아홉 권의 책은 전통여성(3권), 기생(3권), 신여성(3권)으로 분류하고, 각각의 첫째 1권에서 여성의 교육, 성과 사랑, 일이라는 큰 주제를 잡아 총체적인 틀을 세웠다.
교육은 가정에서든 기관에서든 사람을 변화시켜 인간답게 만들어준다. 어린이의 몽매함을 깨우쳐주고 젊은이의 미숙함을 성숙시키며 나이 든 사람을 지혜롭게 변모시켜주는 게 바로 교육의 힘이다. 성은 인간의 자유를 확인하게 하는 중요한 잣대이다. 윤리적 질서 안에서나마 성적 자유를 시도하거나 제도를 벗어나는 일탈도 끊임없이 일어날 수 있다. 일이 없다면 개인은 물론 사회도 불행해질 것이다. 자신의 일터에서 능력을 발휘할 때 스스로 존재감을 느끼면서 가정과 사회 발전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 한국 여성들의 상당수는 부족하나마 교육에 의해 각성되고 감성에 의해 개인적 자유를 누리고자 하며 이성에 의해 공동체적 책무를 다하는 주체적 인간이 되고자 노력했다.
이상의 거시적인 총론 다음으로는 몇몇 여성들의 삶을 각론(각 2권씩)으로 다룰 것이다. 전통여성 중에서는 인수대비와 신사임당을, 기생으로는 황진이와 이매창을, 신여성으로는 나혜석과 김일엽을 대표적인 여성으로 택하여 세상에 맞서 당당하게 살아갔던 여성들의 삶에 관심을 가져보려 한다.
이 여성 에세이가 이 시대를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많은 독자들에게 ‘한국 여성’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하고 올바로 이해하면서 조금이나마 삶의 힘을 얻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나는 남성이지만 오랫동안 여성 문제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해왔다. 여성이 남성에 비해서 차별과 억압을 당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여성이 가진 다양한 미덕들에서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으로 12명의 팀을 꾸려 3년간 근현대 여성잡지를 모두 검토하여 『한국 근대여성들의 일상문화』(전9권, 2004)와 『한국 현대여성들의 일상문화』(전8권, 2005)를 출간함으로써 방대한 자료를 정리한 것은 참으로 보람 있는 일이다. 그 뒤로 『뜻은 하늘에 몸은 땅에』(2009), 『여성, 역사 속의 주체적인 삶』(2016) 등으로 여성연구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들이 대중들과는 거리가 있다는 점이 늘 아쉬웠던 차에 좀 더 많은 독자들과 소통하기 위한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술서의 한계를 넘어 한국 여성에 관한 지식을 다양한 독자들과 공유하려는 의도로 ‘지식에세이’라는 이름의 총서(9권) 출간을 기획하였다. 그래서 2017년 1차로 『주체적 삶, 전통여성』, 『융합적 인재, 신사임당』, 『강직한 지식인, 인수대비』 등의 세 권의 저서를 간행했다. 그리고 이번에 ‘기생’에 관하여 3권의 책을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1권은 총론이고, 2권과 3권은 기생을 대표하는 황진이와 이매창에 관한 것이다.(중략)
기생들은 여성이자 최하위 신분이라는 몇 겹의 억압 속에서 꿋꿋하게 한국의 문화예술을 창조해왔고 사회적 자아로서의 책무를 다하고자 했던 문화적 역사적 선두주자로서 대우받아 마땅하다. 이 책에서는 자아를 망각하지 않고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으려 최선을 다했던 기생들의 삶을 새롭고 정확하게 밝히는 데 주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