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께하며
2023년 3월 영국에서 제 독서 노트 여섯 권을 챙겨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흥민이를 포함해 가족들 가운데 그 누구에게도 이 노트를 보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지난 십오 년 동안 책을 읽고 독서 노트를 쓰는 일이 제 일상화된 루틴이었기에, 호들갑스럽게 유난을 떨며 얼굴을 보일 일은 정말이지 아니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어쩌면 가족들도 그런 제 성격을 알아 구경이나 한번 해보자는 말조차 꺼내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본다고 한들 얼마 못 가 덮어버리지 않았을까 싶은 것이 천하에 둘도 없는 악필이 저인 까닭이었습니다. 글씨는 괴발개발이지, 저나 알아먹을 법한 암호 같은 메모가 수두룩하지, 이 노트가 이토록 자유롭게 여러 권으로 기록될 수 있던 건 단 한 번도 책으로의 귀환을 꿈꿔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보잘것없는 독서 노트의 목적이라 하면 그저 나 하나 좋자고 시작한 아주 사소한 일이지요.” 우연한 자리에서 뵙게 된 김민정 시인님께 스치듯 말씀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얼마 안 가 이 말에 그만 제가 붙들리고 말았습니다. ‘나 하나 좋자고 시작한 아주 사소한 일’이 어떻게 ‘모두를 위한 아주 커다란 일’이 될 수 있는지, 저는 지금도 시인님의 그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제 독서 노트를 필두로 (어떻게 제 글씨를 읽어내셨는지 여전히 의문입니다만!) “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생을 이야기할 때 나눌 수 있는 모든 것”이라 하시는 데는 코가 꿰어 도망갈 그 어떤 명분도 서지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껏 붙들려 있는 참입니다.
김민정 시인님과 출판사 난다의 유성원 차장님과 드문드문 만나 나눈 방담을 이 한 권에 담아내기까지 제가 가장 많이 뱉은 말이 무엇일까 하니 그건 ‘버리다’였습니다. 그 순간 제 머릿속을 타격감 있게 치고 간 단어가 왜 ‘벼리다’였는지 모르긴 몰라도 그 궤를 같이했구나 싶은 안도에 국어사전을 펼치는 여유도 부려볼 수 있었습니다. “마음이나 의지를 가다듬고 단련하여 강하게 하다.” 나의 버림이 나의 벼림으로 이해받을 수 있다면 장황하게 늘어놓은 제 말을 이제라도 거두고자 하는 후회로부터 조금은 가벼워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부디 너그러이 들어주십사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2024년 4월
머리 숙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