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 아일랜드
“남자가 없는 집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일찍 죽었고 오빠들은 각자의 가정으로 가버렸다. 마흔에 과부가 된 어머니는 함께 사는 네 딸 대신에 죽은 남자를 원망하고 오지 않는 아들을 그리워하며 평생을 보냈다. 어머니의 생은 남자의 유령에서 한시도 벗어나지 못했다. 나의 생은 그런 어머니의 생과 좀체 유리되지 못했다. 나는 남자를 모른 채 남자가 없는 여자들에 둘러싸여 자랐다.
세상에 남자 없는 이야기가 어디 있을라구, 화끈한 연애 소설이나 써야지. 남성 서사를 써보자 했을 때 재밌겠다며 맞장구쳤던 걸 이 소설을 쓰는 내내 후회했다. 나의 대부분의 성장 과정 속에서 남자는 부재했고 남겨진 여자는 불행했다. 그러니 나는 남자를 몰랐다. 평범한 남자와 결혼하고 아들을 낳아 갓난쟁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키웠지만 여전히 나는 남자를 알 수 없었다. 도대체 남성 서사라는 게 뭐란 말인가.
산문집을 내느라 두 달을 한국에 머물다 어제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마감이 지난 작가노트를 쓰려고 노트북 컴퓨터를 열었다. 집이 캐나다에 있으니 돌아온다는 표현을 쓰긴 하지만, 비행기를 타기 전 친구들에게 보낸 작별 문자에는 곧 한국으로 돌아오겠다, 고 썼다. 언제부턴가 어디가 나의 원점인지 헷갈린다. 어디로 가는 게 돌아오는 건지 모르겠다. 이젠 돌아온다는 표현을 쓸 때면 모르는 문제를 받아 든 것처럼 잠시 골똘해진다. 골똘해질수록 더 미궁이다.
모국어가 없는 곳에서 그것의 부재를 써온 시간이 길었다. 부재는 존재를 증명한다 했던가. 그건 끊임없이 모국과 모국어를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남자 이야기를 쓰는 동안 나는 남자 없는 여자들의 삶을 더 오래 생각했다. 남자의 부재는 여자의 불행으로 존재를 증명하고 있었을까. 내가 보고 겪은 삶은 얼마간 그랬다. 하지만 두어 달 남자 이야기를 쓰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든다. 모국과 이국. 남자와 여자. 어쩌면 중요한 건 그게 아닌지도 모르겠다. 이야기의 마침표를 찍고 나니, 원점이 어딘지 더 모르겠다. 그래서 남자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사람 사는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도 같다.”
이민 와서 겨우 일 년이 되었을 때 둘째 아이를 출산했다. 그 아이가 백일이 되었을 즈음, 통장의 잔고는 물론 영혼까지 끌어모아 식당을 열었다. 남편은 생전 처음 주방에서 서양 요리를 했고, 나는 갓난쟁이를 남의 손에 맡기고 식당으로 나와 서투른 영어로 홀에서 음식을 날랐다. 새벽부터 밤까지 일했지만 가게는 매일매일 망해갔다. 이러다가 아이들과 함께 이국의 길바닥에 나앉는 건 아닐까 무서웠다. (……) 기다리는 것은 고역이었다. 기다리지 않기 위해 계산대 아래 한국 소설책을 펴놓고 고개 숙여 읽기 시작했다. 오지 않는 손님은 오지 않을 미래처럼 막막했지만 그럴수록 책은 재밌었다. 손님이 식당 안으로 들어와 내 앞에 서 있는 줄도 모르고 읽는 것에 몰두할 때도 있었다. 그걸 뭐라고 해야 할까. 회피라고 해야 할까, 도망이라고 해야 할까, 위안이라고 불러야 할까. 그걸 기도라고 부르면 안 되는 걸까. 내 소설은 거기서 시작되었다.
고향이 싫었다. 철들고부터는 고향을 떠나는 것만이 꿈이었다. 원대로 지구 반대편에 정착했고 이십삼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이건 또 뭔가.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니 나는 매일매일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어쩌면 진작에 그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통영. 내 모든 작품이 그곳을 향해 있더라는 말씀을 듣던 날, 나는 노트북 위에 얼굴을 묻고 조금 울었다. 그곳이 내 고향이 아니었다면 나는 소설 같은 건 쓸 수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