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시답지 않게 여겨질수록
스무 해도 넘은 오래전 일이다. 면사무소에 가서 호적등본을 신청해놓고 기다리는데 목발을 짚은 외다리 사내가 들어서더니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시를 읊었다. 사무실 전체에 울려퍼지는 우렁찬 음성이었다. 제목은 ‘나무’, 그리고 자작시라고 했다. 산에 푸른 소나무가 자라고 있었는데 어느 날 나무꾼이 올라와 톱으로 잘랐다는 내용이었다.
짤막한 동시 형태의 단순한 시였지만 워낙 진지한 낭송이었기에 충분한 감동이 있었다. 면사무소 사회계원이 그에게 얼마간의 돈을 건넸고, 나는 그를 근처 대폿집에 데려가서 막걸리를 받아주었다. 그는 마시기 전에 반드시 성호를 그었으며 양은 사발을 성배처럼 받들고 거룩하게 마셨다.
그는 단 한 편의 자작시를 낭송하며 전국을 떠도는 방랑자였다. 나는 그 사내보다 한술 더 떠서, 내 시집을 배낭 가득 짊어지고 팔도강산을 떠돈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시를 써 시집을 낸들 그게 다 소용이 닿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 외다리 사내처럼 단 한 편만 갖고도 밥을 굶지는 않을 것이었다.
문제는 얼마나 진지한가이다. 그것이 비록 일종의 앵벌이를 위한 연기일지라도 얼마나 진지하게 연기하느냐가 중요하다. 시가 시답지 않게 여겨질수록 더욱 진지하게 붙들고 있어야겠다.
2006년 6월 - 초판 시인의 말
밥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났다. 외삼촌은 밥뚜껑에 맺힌 달큼한 방울로 목을 축이고, 삼촌은 아버지의 밥뚜껑에 소주를 따르고, 어머니는 접시 위에 차곡차곡 쌓아올린 김이 쓰러지지 않게 꽂은 성냥을 뽑고, 동생은 명란젓을 집고 있었다. 돌아가신 고모, 고모부도 다니러 오셨는지 생전의 모습 그대로 흐뭇하게 젓가락을 들고 계셨는데……. 나만 그 밥상에 없었다. 나는 배낭을 메고 창밖에 서있었다. 서서, 식구들이 밥 먹는 걸 쳐다보고만 있었다. (프롤로그_'꿈에 본 식구들의 밥상'에서)
1991년이 언제인가? 무려 28년 전이다. 오래된 여행기여서 남의 기록처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그렇지가 못했다. 사진 자료까지 한 장 한 장 찾아 순서대로 배열하면서 교정지를 찬찬히 읽자니 나는 어느덧 과거의 현장에 빠져들었다. 육중하고 거대한 바위산 사이의 좁은 골짜기 저 아래로 힘차게 빠져나가는 물소리마저 다시 들리는 듯했다. 티베트와의 국경을 이룬 트리술리 강 상류의 무시무시한 절벽 비탈에 사는 사람들을 다시 만났다. 염소를 기르고 감자를 심고 기장 농사를 짓는 산촌 농민들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사진은 묘한 것이다. 사진에 고착된 과거의 인물과 풍경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 인물도 풍경도 변함없이 거기 그대로 있다. 같이 갔던 동료들과 현지 고용인들도 그곳을 걸으며 구슬땀을 뚝뚝 떨구고 있다. 네팔의 정치는 지난 30년 동안 많은 변화를 겪었다. 기나긴 내전이 있었고, 왕정이 종식되었으며 내각제가 시행되고 있다. 자연과 지리적인 변화도 만만치 않다. 트리술리 하류에는 당시 공사 중이던 수력 발전소가 생겼고, 도로와 전봇대는 계속 티베트 국경 쪽 산으로 깊이 파들어 갔다. 외국인 관광객들은 나날이 늘어나더니 예전에는 오직 걸을 수밖에 없었던 길을 지프로 왕래한다. 사흘 나흘 길을 몇 시간만에 주파하게 되었으나 자동차 도로 건설 현장은 히말라야 산악 지대 전역에 퍼져 있다.
이 책은 그런 변화 이전의 모습, 즉 수백 수천 년 동안 거의 변화가 없었던 히말라야 산간 오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고 있지만 히말라야 석청을 목적으로 했던 국내 최초의 탐방이기도 했다. 히말라야 석청은 이 여행 이듬해에 안나푸루나 지역으로 향했던 두 번째 탐방에 의해 상당량이 국내로 유입되었다. 처음에는 소소한 상업적 거래가 있었으나 영리에 밝은 국내외 상인들에 의해 오늘날 네팔의 석청 산업으로 발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