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나는 금년 8월말에 정년을 앞두고 있다. 1973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1975년에 대학원 석사과정에 이어 1977년에 박사과정에 입학한 후 줄곧 한국현대문학을 연구하며 글을 써왔다. 1952년생인 나는 1957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학생 또는 가르치는 교육자로서 학교라는 울타리를 떠나 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육십 평생을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온 셈이다.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소위 백세 시대라는 고령사회에서 내 앞에 남은 시간들이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평균적으로 볼 때 그 시간들을 적당히 여가나 즐기면서, 즉 여생(남은 인생)을 산다는 가치의식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동병상련의 몇몇 친구들이 모이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늘 이야기하곤 한다. 뚜렷한 해결책을 찾을 수는 없어도 이야기를 하다보면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다소 감소되기도 한다.
이번 저서인 ‘문학을 읽는 몇 가지 코드-젠더?폭력?상호텍스트성?치유-’는 최근에 내가 관심을 갖고 문학작품을 읽은 방식들이다. 젠더 문제야 오랜 세월에 걸쳐 관심을 가져온 것이므로 새삼스러울 것이 없지만 폭력과 치유는 국문학자로서 문학(영화) 속에 반영된 우리 사회를 읽는 코드의 하나였다. 폭력과 치유에 대한 관심은 결국 인간다운 삶을 저해하는 것, 그리고 상처받은 인간에 대한 인문학적 관심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상호텍스트성은 하나의 텍스트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텍스트나 다른 텍스트들과의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생각으로 텍스트들 간의 상호연관성을 살펴본 것이다.
그동안 내 이름자를 달고 저술한 책이 이것저것 40여 권에 달한다. 앞으로는 연구실적을 학교로부터 평가받는 일도 없을 것이고, 반드시 논문이라는 양식으로 글을 써야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어쩌면 이제야말로 쓰고 싶은 분야의 글을 자유로운 형식으로 마음껏 쓸 기회가 찾아온 것 같기도 하다. 근대여성문학을 더 연구하여 근대여성소설사를 집필해 보고 싶기도 하고, 더 많은 독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형식의 글을 써보고 싶은 마음도 있다. 무엇보다도 시간적 여유가 주어졌다는 것이 가장 고무적인 일인 것 같다.
한국문화사의 김진수 사장님과 편집진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2017년 3월
송 명 희 씀
시집은 5부로 나누어졌다. 제1부에서는 실존적 존재로서 인간의 불안과 소외, 그리고 초현실의 세계를 천착하여 보았다. 제2부에서는 역사사회적 존재로서의 나의 관심들이 담겨 있다.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 갔을 때 무심할 수 없었던 고려인의 삶이나 작가 조명희에 대한 회고, 5·18광주민주화운동이나 세월호 사건, 외주노동자나 노숙자 같은 사회적 약자들의 소외된 삶, 코로나19로 우울증에 빠진 일상 등을 그려보았다. 제3부에서는 상호텍스트성에 기초한 작품들을 수록하고 있다. 때로 예술가의 혼이 응축된 예술작품들은 더 강렬한 시적 영감을 불러일으키며 시를 쓰고 싶은 충동 속으로 몰아넣는다. 제4부의 시들은 늙음과 죽음 같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회피할 수 없는 근원적 문제의식을 환기한다. 제5부에서는 사랑과 그리움, 그리고 외로움과 같은 시공을 초월한 인간의 보편적 감정을 표현하였다.
어찌 보면 너무 다양한 시적 세계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들은 순간순간 변화하고 복잡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다양한 관심의 흔적들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때로 고독한 단독자가 되기도 하고, 때로 사회적 불의를 참지 못하고 분노하기도 한다. 어느 순간 뛰어난 예술작품들을 보면서 예술적 영감을 받기도 한다. 자신의 연령에서 경험하는 문제들에 대해서 고뇌하고, 인간 보편의 정서들과 마주치기도 한다. 나는 그때그때 부딪치는 문제의식과 감정들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하면서 남과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이라는 가치를 염두에 두고 시를 썼다.(중략)
한때 나는 사진은 현상의 기록이자 복제예술이므로 주관적 자아를 표현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 즉 리얼리즘에 고착된 사진관을 갖고 있었기에 사진예술에 대해 무관심했다. 하지만 2010년쯤에 관람했던 한 사진전은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던 사진에 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면서 사진이라는 예술에 비로소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그때부터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서도 시적 서정과 주관적 감성을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다는 표현주의적인 사진관을 갖게 되었다. 그 후 순수예술로서의 사진은 얼마든지 주관적 자아나 내적 세계를 충분히 표현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사진을 찍어오고 있다.
책머리에 중에서
문학평론가와 국문학자로서 오랫동안 글을 써왔다. 문학평론과 논문을 쓰면서 늘 글쓰기에 한계를 느꼈던 이유는 대상 작품에 의존한 글을 써야 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몇 년 전부터 현실 문제를 바로 다루는 문화비평적 또는 사회비평적 글을 집중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now)’ 살아가고 있는 ‘여기(here)’의 현실적 이슈를 다루는 글쓰기가 과거의 문학 텍스트를 대상으로 한 글쓰기보다 더욱 나의 취향에 맞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쩌면 누군가에게 잡담처럼 말하고 흘려보냈거나 또는 혼자서 잠시 스치고 말았을 생각들을 한 편의 글로 완성하여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문학평론이나 논문 쓰기와는 다른 차원의 기쁨이며, 글을 쓰는 보람을 느끼게 해준다.
살아간다는 것은 흔적을 남기는 일이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흔적을 남긴다는 것은 생각과 느낌을 글로 적는 일일 것이다. 현실적 이슈들을 다룬 이 글들은 내가 어떤 사고와 감정을 갖고 순간순간을 치열하게 사유하며 살았는지 나의 존재와 사유에 대한 흔적이 될 것이다.
매달 한 편씩의 글을 한 수필 월간지에 <송명희 교수의 트렌드 읽기>라는 타이틀로 연재해온 지 4년째다. 글을 연재하는 동안 나는 그달 그달의 정치사회적 쟁점과 문화적 트렌드에 대해서 더 민감하게 살피고 생각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아야 글을 쓸 수 있기 때문에 자연히 예민한 촉각을 갖고 그렇게 했는데, 이 또한 나이 들어가면서 자칫 세상사에 둔감해질 수도 있는 나의 사회의식을 일깨우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번 에세이집에 실린 글들은 대체로 지금 여기의 현재를 살아가는 실존적 존재로서 정치사회적 이슈들이나 TV나 영화에 반영된 트렌드를 분석하여 그 의미를 읽어내고, 미래지향적 전망을 예측해보려는 태도를 갖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