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21세기는 그렇게 '이뤄질 수 없는 꿈'을 가능케 하는 시기이다. 나는 그렇게 만들기로 했다. 그렇게 살아가기로 했다. 마치 지난 20세기, 태양이 이글거리는 사막을 목이 타들어가는 갈증을 참으며 두 손을 꼭 쥐고 걸어왔듯, 이 21세기에도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 사막에서 계속 걸을 것이므로.
나는 사막에서 두 손을, 두 주먹을 꼭 쥐고 땀을 훔치며 자신의 목표를 향해 외롭게 걸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 그들은 내 동료이며 친구이며 사랑하는 사람이다.
청춘, 용기, 열정, 파도 그리고 꿈...... 이런 단어를 좋아했다.
그래서 늘 그 단어 속에 살고 싶었다.
그런 꿈을 이루는 마법, 내게는 ‘사람’ ‘여행’ ‘책’ ‘커피’ 그리고 ‘술’이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여행을 떠나 홀로 책을 읽고 함께 술 마시는 것은 최고의 순간이었다. 그 길 위의 빛나는 시간은 거센 폭포처럼, 정다운 시냇물처럼 나를 적셨다.
‘행복’이라는 단어는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왠지 미지근하고 소시민적이고 뭔가를 포기하며 얻는 ‘느낌’ 같아서였다.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의 자기방어였을까.
스스로 어루만지고 달래며 현실에 순응하는 듯 ‘행복’이란 단어에 기대려는 비겁함이 싫었다. 아프면 아픈 대로 더 도전해야 했고 열정을 불태워야 했고 끊임없이 정면 돌파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살아와서 더욱 그랬다.
그랬던 내게 삶의 반전이 있었다.
권력의 민낯을 보았다. 정치란 결국은 알맹이 없는 빈 껍질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나를 스쳐 갔던 수많은 사람, 사람들......
어느 유행가의 한 구절처럼 내가 원하는 것은 “도저히 셀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이 아니었다. 진정으로 나를 이해하고 받아들여 주는 단 한 사람의 ‘진심’이었다.
세상 사람이 내가 “나가떨어졌다”고 생각했을 때 그때, 나는 비로소 ‘행복’했다.
살아있는 것이 무엇이며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내가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것, 뜨겁게 원하던 것을 비로소 내려놓을 수 있었다.
낡은 샌들을 신고 해진 청바지에 티셔츠 하나로 충분했다.
내 인생에 방점을 찍듯이 살 수 있었다.
단 하나 내 가슴에 담았던 사람들, 단 하나 내 입술에 닿았던 진한 커피, 가슴을 울렸던 단 한 권의 책, 그 글 한 줄, 내 마음에 압인처럼 선명히 박힌 풍경, 풍경들...
그 모든 것들은 마치 독하디 독한 한 잔의 술처럼 식도를 태울 듯 흘러들어왔다.
마치 내 몸의 실핏줄 끝까지 채운 시간들이었다.
그런 순간순간, 글이 쌓여 ‘사랑을, 놓다’라는 책이 됐다.
나의 인생이다.
나만의 행복한 인생을 책으로 엮어 기쁘다.
그러고 보니 그런 이야기를 쓴 적은 없었다. 사적으로 경험한 일본인의 모습을. 일본에서 맛본 소소한 즐거움을 쓸 때는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일본이 달라졌다. 오늘 일본은? 귀엽고 앙증맞고 깜찍하다. 한편으로는 기력을 잃은 할머니처럼 조용히 늙어가고 있다.
내가 살았던 1990년대 초-강대국의 야망으로 탐욕을 부풀리기를 포기하지 않던 '일본은 없다'. 지금 일본은 '어제의 일본'이 아니다.
그래서 편안하고 가볍게 일본에 대해 쓸 수 있었다. 삿포로에서 한 잔의 맥주로 목을 축이던 그 순간처럼-.
한국 여성들이여, 테러리스트가 돼라!
남성들이 만든 허구를 테러하라.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부양한다는 허울 아래 평생 무임금으로 여성을 착취하는 결혼의 속성에 대해서도 눈을 뜨라. `훌륭한 전업 주부`라는 거짓말로 여성을 가정에 귀양 보낸 외딴 섬, 당신의 유배지인 `가정`을 나와 당신의 제자리인 사회로 복귀하라. 남성과 여성, 그 양날개로 우리 사회와 가정의 모든 일을 사이좋게 나누고 협조하라. 여성이여, 무엇보다도 당신의 오랜 사고를 부수는 `창조적 파괴`를 거듭하는 테러리스트가 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