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실보다 몽환의 가치를, 늘 보이지 않는 저쪽을 열망한다. 가보지 못한 마을의 안개와 노을과 저녁을 기다린다. 나는 그 마을이 이 세상과 닮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곳에서 나는 새로운 풍경과 사랑과 풍속을 만나고 싶다. 그리하여, 내가 꿈꾸는 건 체온과 숨결이 묻어나는 숲과 수평선이다. 체온과 숨결이 내 시의 표정이며 정신이길 원한다. 그걸 불어넣어 세계와 사물을 초대할 때, 홀연 나는 사라지고 거기, 내 마음의 점 하나 찍히길, 내 몸이 초록숲과 수평선으로 남겨지길.
2011년 5월
나는 언어의 극한점을 꿈꾼다. 의미의 끝까지 밀고 나가 아슬한 벼랑과 마주하길 원한다. 그 언어의 꼭대기에서 내가 염원하는 건 문화어로서의 모국어다. 오브제와 한몸이 되는 것, 내가 대상 속으로 틈입하는 것, 나와 너의 사이가 사라지는 것! 물론, 그것이 얼마나 무모한 꿈인지 나는 알고 있다. 가끔 그 언저리에서 몸을 떨기도 하지만, 나의 절망 또한 거기서 시작된다는 것도. 그곳에 이르기까지 시간이 넉넉지 않다. 내가 여전히 ‘혼자’ ‘곁길’을 서성이고 있는 이유다.
어린 나이에 조부로부터 서당교육을 조금 익힌 것이 전부인, 한학의 손방이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심오한 선禪의 세계를 엿본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지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벽암록』이나 『선가귀감』은 낱장이 너덜거리도록 읽었건만 질리질 않으니 말이지요. 그 자양이 제 시와 세계관 형성에 끼친 영향력은 잊지 않고 있습니다. 오래 전부터 이 책들이 모든 이에게 쉽게 전달되는 역할을 생각해 보긴 했습니다.
제가 분에 넘친 이 작업에 손을 댄 것도 단지 그 소망 때문이지요. 그 사이, 늦겨울이 가고 봄이 지나는 줄도 몰랐습니다. 눈을 드니 어느덧 여름입니다.
안개는 환상적 은유를 구사하지요. 그의 기질은 보이는 그대로 드러내는 걸 싫어합니다. 말하자면 일체의 설명을 거부하지요. 그래서 안개의 언어는 비약과 함축이 심하며, 항상 잿빛 비유망 속에 전신을 잠그곤 합니다. 저는 선의 언어, 선시나 선문답 속에서 똑같은 걸 발견하곤 합니다. 스님들의 장삼이나 가사, 신부님이나 수녀님들의 의상이 왜 안개 빛인지 이제 알 것 같습니다. 禪은 線이며 궁극적으로 善이란 걸 눈치 챕니다. 신앙의 이념은 결국 부드러움이며 아름다운 행위이기 때문이지요. 禪은 그 자체가 절대자유를 꿈꾸는 심리이며, 자유인을 열망하는 몸짓이니 말입니다. 사유의 걸림 없는 운동, 그 속에 꽃핀 활달한 상상과 도발적인 은유의 다발들! 저는 거기서 우주와 감응하는 시의 알몸을 보았으며, 한없이 따사로운 정신의 햇볕을 쪼였습니다. 만약 이 독서노트가 미숙하다면, 결단코 그것은 제 인격의 부족 탓이지 『벽암록』이나 『선가귀감』의 모자람을 뜻하진 않습니다. 꽤 오랜 시간을 마디 잘린 언어들 앞에서 방황했으며, 때로는 길을 잃고 서있었다는 걸 고백합니다.
한순간, 내 안의 언어들이 컴컴한 낯빛으로 돌아가 요지부동이다. 그 순간, 침묵의 자국들이 지평선 가득 찍혀 있는 걸 본다. 내 안에서 펼쳐지는 이 일련의 연상들과 저 점들은 어디쯤에서 다시 만나고 흩어지길 반복하는 걸까. 시는 결국 정체불명의 망설임이란 생각, 망설임이 쌓는 시간의 누각이란 생각.
망설임이란 발효를 기다리는 시간이다. 생각도 발효가 필요하다는 것! 발효는 호흡과 체온을 요구하며, 멈추지 않는 운동 속에서만 싹틀 수 있다. 내가 추구하는 시의 향방 또한 언어에 호흡과 체온, 그리고 표정과 움직임을 부여하는 일이다.
2019년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