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을 내다 산문집을 낸다. 첫 산문집이다.
올해로 나는 공식적으로 노인이 되었다.
자전거를 타고 안민고개를 올라가는데 예전 같지가 않다. 더 좋은 자전거로 바꿔 타도 그렇다.
예순넷의 사내가 나를 앞질러 갔다. 예순셋의 여자가 나를 앞질러 갔다. 예순여섯의 노인이 나를 앞질러 갔다.
개가 나를 앞질러 간다. 고양이가 나를 앞질러 간다.
시인은 시로써만 말해야 한다고 했던가. 이 말은 미인은 이슬만 먹고 산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래도 산문을 마음먹고 써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어쩌다 어쩔 수 없이 한 편 두 편 쓰다 보니 여러 편이 모였다. 버리자니 아깝고 묶자니 주제넘다 싶었다. “쓰던 시나 잘 쓰지”하는 목소리가 내 안에서 들렸다. ‘노인’을 기다렸다. ‘노인’이면 “내도 돼” 할 것 같았다.
4부로 나누었다. 1부는 창원문학의 ‘특집’란에, 2부는 경남문학의 ‘지난호 다시 읽기’란에, 3부는 창원중앙도서관 도서관 정보지의 ‘창원 둘레길 탐방’란에, 4부는 경남신문의 ‘작가와 떠나는 경남산책’란에 실었던 글들이다. 판을 깔아준 그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다시 읽어보니 온통 자전거다. 두 번째 시집에서 나는 “자전거는 내 아들, 기타는 내 딸”이라고 쓴 적이 있다. 나는 많이 외로웠고 많이 외로울 것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하지만 나는 내가 외롭다는 것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고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할 것이다. 나는 당신의 외로움에만 신경 쓰겠다.
나는 이제 노인이다. 그런데 아직 노인과 ‘노인’이 겹쳐지지 않는다. 노인과 ‘노인’이 겹쳐지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이 있다. 그것은 못다 한 사랑이다. 나는 오늘도 사랑을 꿈꾼다.
<시인의 말>
스무 살 무렵 나는 한 노인이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꼈었다
그날 이후로 노인은 어쩌다 한 번씩 먼 모습으로 나타나곤 했는데
가까이 다가가면 얼른 뒤돌아서서 미로처럼 얽힌 골목길로 사라지고는 했다
노인은 때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나는 노인이 본래의 나라는 것을 진작에 알았다
나는 한 번도 나를 나로 살지 못했다
나는 빨리 늙고 싶었다
근래 나는 노인과의 만남이 멀지 않았음을 스스로 깨닫는다
나는 기다리고 있다
내가 나로 돌아갈 수 있는 그날을
만일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너처럼 멋진 다리를 갖고 태어나고 싶다 너의 다리가 저기 가고 있다 너는 어디 있니? 네 다리 위에 얹혀 가는 너 나는 네 다리만 보고 있다 다시 태어나면 갖고 싶은 네 다리 다시 태어나서 가장 자랑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묻는다면 네 다리를 갖고 다시 태어난 내 다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네가 너의 다리를 의식하지 못하고 걷고 있을 때 너의 다리는 가장 아름다운데 그때 나는 네 다리를 갖고 싶은 것이다 네 다리와 네가 따로 이동할 때 그때 나는 네 다리로 건너가고 싶은 것이다 네 다리가 너를 옮겨주기만 하고 네가 네 다리에게 명령하지 않을 때 그때 나는 다시 태어나고 싶은 것이다
빨간버스 한 대 헐떡이며 고개를 넘고 있었지 승객을 태운 빨간버스는 고개 중간에서 갑자기 멈춰서고 말았지 사람들은 모두 버스에서 내렸다네 날이 저물고 있었지만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네 운명이란 게 있다는 걸 모두 믿고 있다는 듯 빨간버스의 운명; 날이 저물자 눈이
내렸네 고개 너머 먼 들판이 지워지고 있었지 빨간버스는 어둠 속에서 커다란 눈만 형형했네 사람들은 기다리다 지쳤다는 듯 하나둘 어둠 속으로 사라졌지 오늘 아침 나는 발신자를 알 수 없는 소포를 하나 받았다네 겉봉에 ‘빨간버스의 운명’이라고 쓰여 있었지 나는 지금 빨간버스가 멈춰섰던 그때 그 고개를 향해 가고 있네 아직 소포는 뜯지 않았지만 그때 몰랐던 빨간버스의 운명을 조금 알 것도 같네 고개에 도착하자 날이 저물어 있었지 그날처럼 눈이 내리고 있었네 그날처럼 고개 너머 들판이 아득히 지워져 있었지
가만히 생각해보면,
하루에도 여러 번 여자를 생각한다.
하루에도 여러 번 술을 생각한다.
하루에도 여러 번 맛있는 음식을 생각한다.
하루에도 여러 번 죽음을 생각한다.
그리고 하루에도 여러 번,
내가 한 마리 수컷으로 태어나 먹고.마시고.싸고.하는 동안
나에게 몸 바친, 나를 통해 버려진 것들의
운명을 생각한다.
하루에 생각한 것들을 여기 모았다.
하루살이의 일기라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