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지하듯이 19세기에 서구에서 새로운 학문이 유입되었을 때 동아시아에서는 그것들을 한자로 번역했다. 이코노믹스economics를 경제학으로 번역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이 번역은 일본에서 했지만 중국의 천후안장陳煥章은 이코노미economy를 경제로 번역하는 데 반대해서 ‘이재理財’라고 번역했다(Chen Huan-Chang, The economic principles of Confucius and his School,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1911). 그러나 이후 경제라는 말이 일반화되기에 이르렀는데, 경세제민經世濟民, 경국제민經國濟民이라는 숙어에서 유래한 이 말에는 정치적 함의가 들어 있다(천후안장이 경제라는 번역어에 반대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영어 economy를 경제로 번역한 선인들은 유학에 깊은 지식을 갖추었지만, 지금의 경제학자들은 그것을 얼마나 의식하면서 연구하는지 의심스럽다.
또 하나의 관심은 19세기부터 지금까지 일본과 한국, 북한의 행보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일본사는 물론 한국사에서도 19세기 중반을 기준으로 전근대와 근대로 시대를 구분하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만으로 오늘날의 일본이나 한국을 이해하기에는 결정적으로 불충분하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유교적 근대의 주변적 위치에서 서구적 근대의 주변적 위치로 이행한다는 관점에서 다시 파악해보려는 것이 유교적 근대론의 제2 주안점이었다.
‘소농사회론’은 조선시대를 봉건사회로 보고 조선후기를 봉건제 해체기로 파악하는 내재적 발전론에 대해서도 비판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재적 발전론도 전전(戰前)의 일본 봉건제론과 같이 유럽모델을 한국사에 적용한 것이고, 일본 봉건제론이 이데올로기적인 것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내재적 발전론도 이데올로기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인류학자 나카네 치에 선생이 근무처 동료로 있을 때다. 어느 날 나카네 선생과 엘리베이터를 함께 탔는데, 선생이 ‘양반의 정의는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순간 답변이 궁했던 나는 아들이 어릴 때 읽어주었던 동화 『숲 저쪽에는 무엇이 있을까』의 마지막 구절이 떠올라 “한마디로는 말할 수 없군요.”라고 답했던 것을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이는 내 불학의 소치지만 양반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그만큼 한국 전통 사회의 개성이 응축되어 있다.
동아시아 소농사회론을 제기하게 된 또 다른 요인은 다름 아닌 한국사 자체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의 비교사 연구는 대부분 양자 비교, 곧 한국과 중국, 한국과 일본, 일본과 중국처럼 두 나라 간의 비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동아시아 삼국 중에서 연구의 축적이 가장 방대한 일본과 중국 두 나라를 비교하면 그 차이가 컸는데 이것이 비교사적인 연구의 진전을 방해해 왔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일본과 중국 사이에 한국을 두고 보면, 중일 간의 비교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것을 깨닫는 일이 종종 있다. 이는 한국이 한편으로 중국과의 유사성을 가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과의 유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동아시아 소농사회론을 제기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인으로서 한국사를 연구한 덕분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족보 편찬이 성행하는 현상은 조선시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대에까지 계속되고 있다. 아니 더욱 번성해가고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생긴 원인으로는 양반이라는 것의 독특한 성격과 깊이 관계되어 있고, 이와 함께 조선시대와 현대의 연속성을 강하게 시사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일찍이 양반의 증표로서 족보가 존재하였지만, 현재의 한국에서는 ‘족보도 없는 놈’이라는 말은 그 사람을 최대한 경멸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